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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회]여신 영성은 ‘살림의 영성’이다
    2012-10-17 11:30:34
  • -5차 여신스터디 모임 보고

     

    지난 9월 8일 다섯 번째 여신스터디 모임이 있었습니다. 안내자는 생명여성주의 학자이자 활동가로 잘 알려진 김정희 박사. 웹진 이프에 ‘가배울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기도 한 김정희씨는 ‘살림’이란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며 우리 모두를 살리는 살림의 영성, 살림의 사상에 대해 이론연구 만이 아니라 생태운동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중한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현재 전라도 강진에서 생태마을 운동을 한 발 한 발 진척시키고 있는 상황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몇몇은 강진에서 생산되는 유기농 농산물, 맛깔진 반찬류 등을 안정적으로 소비하는 소비자가 돼주기로 하기도 했고, 그러면서 활기 찬 대화들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강연의 주제는 ‘한국 역사 속 종교에서 읽는 생명여성주의’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데요, 아래 첨부된 참고자료를 보시면 대충 내용을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갈수록 내용이 풍부해지고 흥미로워지는 여신스터디 모임,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기대합니다^^

     

     
    ▲모임 때마다 빠지지 않는 꽃 장식. 꽃 만큼 여신을 잘 표현해주는 매체가 있을까?
     
      
    ▲강의 시작 전 차 한잔으로 마음을 정돈시키고(좌) 드디어 강의 시작(우)
     
      
    ▲모두 함께 안내자의 인도로 명상에 빠지고(좌) 자료를 보며 열공하는 모습(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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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한국역사 속에서의 불교, 도교와 여성

     

    우리 문화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는 토착 종교인 무속이고 따라서 최고(最古)의 신화 역시 무속 신화로 여겨진다. 이능화에 의하면 환웅과 단군은 무당이었고, 신라 초기의 왕명이기도 한 ‘차차웅’은 환웅에서 비롯된 무당을 의미하는 말이다.

     

    신라 방언에 무당을 차차웅(次次雄)이라 하는데, 웅을 무당이라 하는 것은 신시(神市) 환웅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대개 환웅의 신시라는 것은, 고대 무축(巫祝)의 일로 단(壇)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지내므로써 단군이라 불렀다. 단군이란 곧 신권을 가진 천자였다. 신라 사람은 차차웅이 제사를 숭상하고 귀신을 섬김으로써 그를 경외하여 마 침내 존장을 차차웅이라 불렀는데, 이들 방언은 삼한시대부터 전해 내려왔다(이능화, 1991: 32).

     

    마한의 천군(天君), 예의 무천(舞天), 가락의 계락(稧洛), 백제의 소도(蘇塗),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도 모두 무축신사(巫祝神事)를 말하는 것이다(앞글:10). 현존하는 무속신화는 가부장적으로 윤색되고, 불교․도교의 영향이 가미되어 있는 것이기는 하나, 무속 신화의 일정 면모는 그 첫 형성 시기가 고대 국가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는 면도 보여준다. 앞에서 소개한 마고 신화가 그 대표적 예이다. 이 외에도 무속신화인 여신 창조 신화의 예를 더 찾아볼 수 있다.

     

    설문대할망 신화는 제주도라는 국한된 지역에 한정되기는 하나, 창세 여신의 신화를 엿보여준다. 여신의 생리적 활동이 그대로 창조 행위로 연결되는 것은 정신이나 명명(naming)에 의해 창조가 이루어지는 가부장적 신화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으로 이는 이 신화가 몸과 정신의 이원론이 발생하기 이전의 신화임을 추정케 한다. 제석 본풀이에서 당금애기가 낳은 세 명의 아들 제석신(帝釋神)은 수(壽).복(福).농업(農業)을 관장하는 생산신이다. 이것은 이 신화가 인간의 생명과 길흉, 먹을거리의 생산을 모두 주관했던 대모신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신직을 분화시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금 애기 신화는 대모신 홀로 창조의 시대 다음 단계인, 기원 전 3, 4천년 전 신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는 가축 사육과 낙농의 발달로 남성의 생명생산 과정에서의 역할이 보다 분명하게 이해되게 되고 이것이 신화에 반영되고 있다. 대모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라 아들이나 형제를 동반하고 나타나며, 생사를 여전히 주관하지만, 남성 조력자의 역할이 보다 분명하게 인식되고 있다(Lerner, 1986: 149-150).

     

    한편 바리데기 신화에서 딸이라고 버림받는 것은 남아선호가 공고해진 역사 시기 이후에 윤색된 내용이지만, 바리데기가 생명수와 생명의 꽃을 구해오는 것은 생명을 주재하는 대모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신할망본풀이에서는 출산과 육아를 관장하는 삼신은 대모신의 모습을 담고 있다. 할머니라는 말 자체가 본래 늙은 여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크다는 뜻을 지닌 고유한 우리말 ‘한’과 근원적인 생명을 뜻하는 ‘어머니’의 합성어로서 대모(大母)를 뜻한다(강진옥1993: 20).

     

    한편 서양에서는 기원전 2, 3천 년 전 이름 없이는 존재도 없다는 종교적 사상이 등장한다. 이는 문자 발명과 역사의 시작에서 비롯된 변화로 이때부터 창조는 남신의 일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천지 창조를 설명하는 구약 성서는 그 대표적 예이다. 이 단계에서 창조 여신은 강등되어 생명을 주는 어머니, 남신의 신실한 아내가 된다(Lerner, 1986: 150-54). 우리 문화에서 ‘장길손’과 같은 창조신 남신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장길손은 선문대 할망처럼 자신의 토악질과 설사 같은 생리활동을 통해 흙, 돌, 바위, 산, 섬을 창조하며 절대자 하나님이 아니라 늘 배고프고 사람들에게 쫓겨 다니는 다니는 불쌍한 창조신이다. 따라서 이는 고대의 창조 설화로 보기는 어려운, 오래되기는 했지만 선사 시대의 창조 설화로까지는 거슬러 올라가기는 힘든 민중의 옛날 이야기의 하나일 뿐이다.

     

    한국의 경우, 가부장제 체제로서의 국가 시대에도 여신은 부정되지 않고 여전히 숭배 대상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단군은 아사달에서 1천 5백년 동안 다스린 후,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된다.1)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온 환인과 땅의 족속인 웅녀의 자식이지만 단군이 땅의 신이 되었다는 것은 고조선이 산신, 지모신 신앙으로 표현되는 토착 문화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 성립될 수 있었다고 가정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다물’로 표현되는, 고구려까지 이어지는 마고성 시대로의 회귀의 이상은 서양의 ‘하나님 아버지’로 대표되는 유일신 신앙과는 다른 여신 신앙의 지속을 보여준다. 고구려에서 국조(國祖)인 주몽이 아니라 그 어머니 유화가 숭배되었던 것, 박혁거세와 알영의 두 성인을 낳았다는 선도성모에 대한 신앙2)이 그 예이다.

     

    그런데 지모신 신앙이기도 한 여신 신앙, 산신 신앙은 자연에 대한 경외를 수반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한국의 고대 문화는 도교와 유사한 합자연적 문화였다고 추정된다. 즉 자연이 경외의 대상이었던 고대인들은 자연의 대생명에 합일하고자 하는 정서를 기저에 깔고 있었고 이는 자연숭배 여신숭배나 신선사상과 같은 토착 설화나 신앙으로 표현된다고 보인다. 신라에서는 매년 정월 초하루에 일월신에 제사를 지냈고(이능화, 1992:65), 이능화가 조선 영조 떄 유학자인 이종휘(李種鰴)의 『수산집』(修山集)에서 인용하고 있는 아래 문구는 신라에 이미 자생적인 도교가 성립해 있다는 견해를 보여준다.

     

    대개 진한(辰韓)의 구속(舊俗)은 저절로 외루(畏壘)와 화서(華胥)의 경지까지 도달하되 이것이 황로의 사상인 것조차 알지 못한 채 팔구백년을 내려 왔다. 노담과 장주로 하여금 이 나라를 다스리게 한다 할지라도 이보다 더 잘 다스리지는 못하였으리라...삼교(三敎)가 중국에 퍼질 때부터, 유교는 기씨(箕氏)때부터 이미 들어왔고 불교는 위진(魏晉)시대에 동국(東國)에 유입되었으나 오직 노자의 도만은 퍼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배우지 않고도 능히 잘 행하여졌던 것이다(이종휘(李種鰴)의 『수산집(修山集)』; 이능화, 1992:69-70에서 재인용).

     

    진흥왕 37년(576년)에 최치원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고 한다...유불선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모든 생명과 접촉하여 이를 감화시킨다”3)는 뜻이라고 말하고 있다. 풍류(도)는 “인간이 천지와 자연에 의빙(依憑)하려고 할 때, 거기에서 생명의 근원을 체감(體感)하는 것...인간의 생명의 근원이 그 타고난 자연 속에 있음을 체감함으로써 영원한 생명, 무한한 생명, 절대의 생명에 감응된다고 믿고, 스스로 그 생명의 근원에 자기 생명을 계합(契合)시키려는 행위”(유병덕, 1989: 149)로 설명된다. 이러한 풍류도는 진흥왕이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우위를 표방하기 위해 화랑도의 이념으로 채택하기 이전부터 전통적인 신앙이자 생활양식이었다(앞글: 141). 따라서 대자연의 생명에 합일하고자 하는 풍월도는 이러한 자생적인 도교의 전통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도교가 정식 국교로 된 것은 당대 이후이다. 따라서 7세기 이후이다. 그렇다면 신라는 중국에서 도교가 공인되기 전에 이미 충분히 도교적이며 도교를 넘어서는 내용을 갖는 풍류도의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 경우, 전통적인 신앙이자 생활양식으로의 풍류가 신라에만 특유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삼국에 공통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 풍류는 고구려 벽화에 엿보이는『산해경』의 정서에 닿아 있고 고구려인의 정서에 닿아 있고 그래서 중국에서『산해경』의 신화적 세계를 계승하여 만들어진 도교와도 정서적으로 닿아 있을 뿐이다.

     

    도교 신선 설화의 모태가 된 『산해경』 신화는 발해만 연안의 동이계 신화를 위주로 편성된 무서(巫書)로 고구려 고분 벽화상에 다수 출현하고 있는 신화는 바로『산해경』적 제재라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정재서, 1995: 63-69; 1997). 또한 서왕모는 일설에 의하면 중국 서방의 여신이 아니라 동이의 형신(刑神)이다(정재서, 1997: 138). 음양오행사상도 중국 문명 자체의 산물이 아니라 샤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발해안 연안(중국 동쪽 해안 변방문화)의 문화에서 발생했다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시에 쏭링, 1995: 49-56). 고구려의 도교(오두미교)는 공식적으로는 영류왕(榮留王) 7년(624년) 당으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그러나 이 도교는 이미 관방화(官方化)된 당의 국교로서의 도교로 이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출현하고 있는 도교와는 성격이 다르다(정재서, 1997: 139). 이능화는 “민간의 습성은 신도(神道)와 선도(仙道)가 굳게 뿌리박혀 있었으므로 오두미교가 들어왔을 때에는 나라 안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고 다투어 신봉하게 된 것이다”(1992:53)라고 말하고 있다. 도교 행사인 팔관회가 고구려에서 신라로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고 있는 것 또한 토착도교의 삼국 공유성을 말해준다고 보인다. 고려 시대의 팔관회는 하늘과 오악. 명산. 대천을 섬기는 것으로 “이름은 비록 불계(佛戒)라 하나 실은 도교의 초례(醮禮)이었다”라고 이능화는 말한다. 이 팔관회는 고구려부터 기원한다. 즉 고구려 승 혜량(惠亮)이 신라로 귀순하면서 진흥왕(540-577)에게 팔관회를 권하여 이때부터 신라는 매년 팔관재를 거행한다. 고려의 팔관회는 이 신라 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이능화, 1992: 88). 여기서 고구려의 팔관회는 고구려가 당의 도교를 수용하기 이전부터 거행되어 왔었고 이는 토착적인 자연을 섬기는 의례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의 팔관회는 수용된 도교와 무관한 토착 의례였거나 아니면 토착 의례에 신라에 수용된 도교가 혼융된 도교 의례였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경우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 고이왕 51년(284년)에 아직기와 왕인이 『역경』『효경』『논어』와 더불어『산해경』을 일본에 전해주었다. 일본 학자 구로자까 가쓰미(墨板勝美)는 아직기와 왕인을 도가류의 사람으로 추측하기도 한다(이능화, 1992: 58-62). 이능화는 왕인은 그 선조가 낙랑(樂浪)의 호족이었고 따라서 당시 발생한지 얼마 안되는 중국 도교를 왕인이 수용했을 것이라 추측한다(앞글: 62). 그러나 최근 백제 왕실이 부여계로서 백제와 고구려가 부여의 정통 후예라는 정통성 확보를 위해 오랫동안 대립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새로운 설이 나오고 있다(이도학, 1997: 37-60). 당시는『산해경』적 제재의 신화들이 그려져 있는 고분들이 고구려에서 한창 만들어지고 있던 때이다. 따라서 백제는, 문자화된 서적으로의『산해경』은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였을지라도『산해경』의 기저를 이루는 문화를 고구려와 더불어 이미 공유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한편 고구려는 마고성으로의 복본의 이상을 지니고 있는 나라였다. 그렇다면 삼국의 도교 문화는 마고성 신화와 연속선 상에 있다.

     

    가야도 마고성 신화의 자장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 거 같다. 대가야의 시조 수로왕과 허태우에 관한 기록은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陀國) 공주였던 허태우는 부모님의 꿈속에서 딸을 가락국의 수로왕의 베필이 되게 하라는 상제(上帝)의 말에 따라 가야로 보내지게 된다. 여기서 상제는 도교의 하늘신임을 주목해 볼 수 있다. 또한 왕과 왕후의 관례를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에게 음이 있는 것과 같았으며...”5)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음양을 상보적으로 보는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구전되어 오던 수로왕과 허태우에 관한 이야기가 『삼국유사』에서 문자로 기록된 것은 13세기이다. 따라서 이 기록을 중국으로부터 수용된 도교의 영향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노자의 음양론이 중국 고대의 여신 숭배와 연관된 귀음사상의 철학화이듯이, 우리 고대 문화에서도 그러한 음양 상보적인 음양오행 관념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부도지』의 다음 문구들은 보여준다.

     

    “그 남녀가 서로 결혼하여 몇 대를 거치는 사이에 족속이 불어나 각각 삼천 사람이 되었다. 이로부터 열두 사람의 시조는 각각 성문을 지키고, 그 나머지 자손은 향상을 나누어 관리하며 하늘과 땅의 이치를 바르게 밝히니, 비로소 역수(曆數)가 조절되었다.”(31쪽)

    “이때에 기(氣)와 토(土)가 서로 마주치어 때와 절기를 만드는 빛이 한쪽에만 생기므로 차고 어두웠으며 수(水)와 화(火)가 조화를 잃으므로…”(38쪽).

     

    이 음양 상보적 사상은 생활에서 남녀의 상생적 삶을 유지하는 원동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48년 아유타국에서 배를 타고 왔다고 전해지는 허왕후는 김해의 할머니들이 아직도 ‘허수로왕’이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수로왕과 권력을 함께 한, 그런 의미에서 ‘가야 여왕’이라 은유되어도 무방한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두 아들에게 허씨 성을 주고 자신이 가져온 재물을 자신이 관리한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의 고대 사회에서 여성이 아들에게 성을 주었다는 것도 놀랍거니와 이것은 허왕후가 일정한 권력을 배분받았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이는 일연이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에서 “수로왕이 맞아들여 함께 나라를 다스리기 일백 오십 여년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데서 확인된다. ‘함께 나라를 다스리기’라는 이 말은 김해 할머니들이 허왕후를 오늘날에도 ‘허수로왕’으로 부르게 된 역사적 전거와 허왕후의 실질적인 권력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6) 이같이 외지인 여성이 국제혼을 통해 온 나라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살 수 있었다는 것은 가야에 그러한 것이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부도지』에 나오는 유인씨가 전수하였다는 굿인 계불(械祓)과 비슷한 말인 계욕(械浴)이라는 말이 “3월 계욕일에 그들이 살고 있는 구지봉에서 무엇을 부르고 있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는 문구로『삼국유사』<가락국기>에 나오고 있는 것은 이 문화가 마고 문화와 연결되어 있음을 상상해보게 한다.

     

    가야와 삼국에 뒤이은 고려 시대에도 토착적인 도교 문화와 수용된 도교 문화, 그리고 불교가 한데 모순 없이 융합되어 있었을 것이다. 불교와 도교가 우세했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가 조선보다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우월한 했던 것은 분명하다. 신라는 직계 아들이 없을 때, 조선처럼 후궁의 자식이나 몇 촌을 건너뛰면서도 남자로만 왕위를 계승했던 조선의 경직화된 부계혈통제와 달리 딸이 여왕으로 추대될 수 있었다. 이는 상대적으로 삼국시대는 조선보다는 그만큼 여성의 지위가 높았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이름은 각각 덕만(德蔓)과 승만(勝蔓)이었는데 돌림자인 ‘만’은 승만경의 주인공인 승만부인에게서 따 온 것으로 승만경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이창숙, 1983: 52-56). 이는 불교 경전의 여주인공이 여왕의 권위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법흥왕과 진흥왕 자신과 그 두 왕비가 모두가 말년에 출가해 승려가 되었고7) 진흥왕 12년에 왕이 승직제를 마련할 때 도유나근(都唯那根)이라는 승직에 여성인 아니(阿尼)가 임명되었다는 것은 이 시기에 통솔해야 할 정도의 규모를 갖는 비구니 승단이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김영태, 1967: 59; 이창숙, 1983: 58). 진평왕 때 지혜(智惠)라는 비구니가 선도산(仙桃山) 신모가 현몽해준 대로 금 열근을 파내어 절을 짓고 매해 봄과 가을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모아 법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은 불교의 확장에 여성이 중심이 되었음을 보여준다.8)

     

    우리 문화와 역사 속에는 부계적이거나 존양음비(尊陽陰卑)적 원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또 다른 전통들을 살펴보자. 오늘날까지 민족의 명절로 내려오고 있는 추석은 신라의 가배에서 비롯된다. 신라는 유리왕 때부터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한달 동안 매일 밤 10시까지 6부의 여자들을 두 조로 나누어 길쌈 경합을 하였다.(김용숙, 1990: 54) 조명도 없는 당시에 밤 10시까지 한 달간이나 지속되었던 이 길쌈 경합은 가배가 여성축제라 불릴만한 것이었음을 짐작케한다. 한국의 고대사회는 농사 또한 여성농경이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M.K. 마틴(Martin)과 B. 부히즈(Voorhies)는 515개의 현존 원시농경 사회에서 여성농경이 지배적인 지역이 41%, 양성이 비슷한 비중으로 농사짓는 지역이 37%, 남성만 농사짓는 지역은 22%에 불과하다는 머덕(Murdock)의 자료에 근거해 경작은 여성의 채집 활동에서 점차적으로 발달해 왔을 것으로 추론한다(1975: 216). 신석기 초기의 농업혁명이 여성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이같은 가설은 오늘날 여성인류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 경우도, 농촌에서는 남녀가 편을 갈라 하는 줄다리기에서 여조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생각하는 풍습이 최근까지도 내려오고 있었고(장주근, 1969) 경상남도 동래 지역에는 산실(産室) 한구석에 짚단을 세워 놓는 풍습이 있어(홍순창, 1967), 한국고대 사회는 여성농경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장주근, 1969). 또한 고대 사회에서는 성별분업도 느슨했을 것으로 보인다. 딸이 고용살이(傭作)를 하면서 어머니를 봉양했다는 효녀 지은의 이야기,9) 역시 품팔아 아버지를 봉양하다 부역을 나가게 되어 아버지 봉양을 걱정하는 설씨녀 이야기,10)고구려에서 연개소문 당시, 남자는 성 쌓는 부역을 시키고 여자는 농사를 짓게 했다거나 봉상왕 때 남녀를 부역시켜 성과 왕실을 지었다는 기록11) 등이 이런 추론을 가능케 한다. 또한 신라 시조 혁거세는 알영과 함께 6부를 돌며 농사와 양잠을 감독했다(勤督農事桑)는 기록12)은 허왕후와 비슷하게 알영이 나라 경제의 경영에 실무적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또한 여성이 가재를 털어 절을 짓거나 종을 시주하는 기록들,13) 소서노가 자신의 가재로 주몽의 건국을 도왔다는 기록들은 왕실 여성들을 제외하고도 일반 여성들 당시에 상당한 자기 소유의 재산을 가졌던 재력가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고대 사회 여성의 경제력은 한 가족의 재산이 부변전래(父邊傳來) 재산과 모변전래(母邊傳來) 재산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이는 조선 중기까지도 자녀의 균분상속과 처가 자신의 재산을 단독으로 관리하는 전통으로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17세기 중엽 이후부터 점차로 장남우대, 남녀차별, 남자균분 등의 차등 분할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점차로 장자 상속제가 지배적이 되어 간다(최재석, 1983:521-51)14).

     

    또한 고대 사회에는 혈통제도 조선만큼 부계가 확고하게 자리잡았다고 보이지 않는다. 신라의 혼인제도는 모계 씨족제에 기반한 부족 내혼의 성격을 지니며(김재붕, 1988) 신라는 공동의 시조를 중심으로 한 혈연집단이 기능했으나 이 집단이 부계 혈족 집단은 아니고 부계 계승과 모계-처계친의 두 원리가 동시에 나타나는 친족조직이었다는 연구도 있다(노명호, 1979; 최재석; 1983). 즉 고려의 친족관계는 개인이 자신을 중심으로 혈연관계를 형성하며, 자기를 중심으로 자녀와 부모 관계로 이어지는 관계망에서 남과 여, 어느 쪽을 통해서 이어지든 관계없이 혈연관계가 존재하는 모든 계보상의 인물들과 다측적으로 확대될 수 있는 것이었다(노명호, 1979). 음서(蔭敍)제도의 혜택도 내외손들과 사위와 생질의 범위로까지 방계.직계 모두의 남-녀 계보를 따라 확대되었다(김용선, 1987). 이같이 고려까지도 확고한 부계가 성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버지를 모르는 서동이 백제 무왕이 될 수 있다거나15) 고려 시대까지는 부계 혈통 계승을 위한 양자 들이기는 없었고 (이효재, 1990; 박혜인, 1991) 신라에는 세 명의 여왕이 있었으며, 신라에서 조선 중기까지 사위가 처가살이를 하는 서옥제가 양반계층에서도 낯설지 않은 풍속으로 내려올 수 있었고 과부의 재혼이 자유로왔던 것으로 보인다. 재혼은 왕실에서도 자유로왔다. 상당한 재력가였던 소서노는 우태와 초혼을 한 적이 있으나 주몽과 재혼하였으며, 고려 성종의 비인 문덕왕후 역시 성종과의 혼인이 재혼이었고 순비는 40대에 3남 4녀의 어머니로 충선왕의 후실이 되었다(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사편찬위원회, 1984: 221).

     

    정치 영역에서 여성이 전적으로 배제된 것은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기록도 보인다. 『三國遺事』에는 가락국의 수로왕 떄, 아진포(阿珍浦)의 아진의선(阿珍義善)이라는 노구(老軀)가 해변에 닿은 배의 상자에서 단정한 사내아이를 꺼내고 그 아이는 장차 탈해왕이 된다는 기록이 나온다.16) 여기서 아진포와 아진의선이라는 명칭의 유사성은 아진의선이 아진포 주민을 대표할만한 공적 지위였음을 말해주고 이는 『삼국사절요』의 기록에서 촌장의 지위임이 드러난다; “아진포의 촌장 아진이 상자를 열어보니 알이 나왔다. 갑자기 까마귀들이 와서 쪼아 알이 열리면서 사내 아이가 나와 스스로 탈해라고 하였다. 노구에게 맡겨 어머니를 삼아 서(書), 사(史), 지리(地理)를 배우게 하였다.”17) 이 아진선의라는 촌장의 지위를 갖는 노구는 탈해에게 학문을 가리칠 수 있는 학식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18) 이외에도 노구는 부여왕 대소(帶素), 신라 소지왕(炤知王)의 측근에서 자문을 하고 있으며 왕명을 수행하는 자로 기록되고 있기도 하다. 또한 남해 차차웅은 그의 친누이 아노(阿老)로 하여금 시조의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이능화, 1991: 64) 이는 제사장으로서의 여성의 지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문화 또한 자유분방함과 양성적 색채가 엿보인다. 중국의 『삼국지』권30 ‘위지동이전’에는 ‘그 풍속이 음해서 가무를 즐기고 밤늦게 남녀가 모여 함께 노래하고 논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옥은 이에 대해 배우자를 쌍방이 자유롭게 선택했으며, 혼인 후의 여성은 정숙해야 했지만 혼인 전의 여자들은 성적으로 자유로왔다고 해석한다(1984: 249). 이러한 해석은 김문희가 혼전 임신을 하고 왕후가 될 수 있었고 역사 기록에 남녀의 사랑을 지칭하는 야합(野合)이 사실은 혼전 성관계를 가리킨다는 면에서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성교를 ‘새끼줄’과 같은 생활용품으로 표현해낼 수 있었고 부계 혈통의식이 경직되게 강화된 조선에서조차 민간의 성 신앙에서는, 남녀의 생식기 형상을 한 자연물이 함께 숭배되었지, 남근 숭배만이 지배하지는 않았던 것은(주강현, 1997: 194-231, 이태호, 1998) 이같은 성적 개방성의 문화가 민간 문화의 저변에 도도히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 삼국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남자들은 귀고리를 하는 풍습이 유지되었고, 고려시대에 남녀가 절하는 방식과 속옷이 동일했으며 여자도 기마나 격구를 했다(김용숙, 1990: 71-72, 74, 79). 이런 풍습들은 오늘날 유행하는 ‘유니섹스문화’를 연상시킬 만큼, 양성적 문화의 색채를 풍긴다. 또한 우리 역사에서는 서구의 기독교처럼 남신이 전적으로 지배해 본적이 없다. 마을 수호신으로는 여, 남을 상징하는 ‘지하 대장군’, ‘지하여장군’이 마을 어귀에 함꼐 세워졌다. 이것은 남성을 양, 여성에 음에 직대입시키는 이데올로기화한 음양존비(陰陽尊卑)의 유교 관념과는 달리 노자적인 음양 상보적 문화 전통이다.

     

    이상에서 개략적으로나마 살펴 본, 고대 한국 여성의 삶과 풍습들은 ‘유교 가부장제 원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또 다른 여성사의 전통이고 이러한 전통은 정세화의 지적대로 “성별이분법적 의식이 없으며 자연과 인간을 일관하여 수평적 일원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하는(1994: 29) 한민족의 인간 인식의 기저에 깔려 있는 합자연적인 사상이 아니고는 설명되기 힘들 듯 싶다. 그것은 풍류도, 신도, 선도로 불리운 민족 고유의 정서며 사상이고 이는 『산해경』의 신화 세계와도 맞닿아 있을 가능성이 농후한 토착 도교의 정서며 풍습이고 이는 국가 성립 이후 남성인 왕들까지도 마고성 시대로의 회귀를 끊임없이 꿈꾼 마고의 문화 자장(磁場) 안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가부장적 제도와 관습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러한 것들의 연원에 대한 탐구는 한국 여성사 연구의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이 원고는 <불교 여성 살림>(김정희, 모심출판사, 2011) 의 3장 2절에 실린 글의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1)『三國遺事』卷第一 記異 第一 ‘古朝鮮 王儉 朝鮮’

    2)가 처음 진한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東國)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필경 혁거세와 알영의 두 성군(聖君)을 낳았을 것이다.(其始到辰韓也. 生聖子爲東國始君. 赫居世閼英二聖之所自也. 『三國遺事』卷第五感通 仙桃聖母隨喜佛事)

    3)國有玄妙之道曰風流...包含三敎 接化群生(『三國史記』4 新羅 本紀4 眞興王 37년 條)

    4)『三國遺事』 卷 第三 寶藏奉老 普德移庵

    5)『三國遺事』 卷第二 記異 第二 駕洛國記

    6)외지인 허왕후 여기에 더해 그녀의 딸 묘견(<삼국지>에는 비미호卑彌呼로 기재되고 있으며 일본 발음으로 히미코)는 일본으로 건너가 최초의 여왕국 야마이국의 여왕이 되었다고 한다.

    7)『三國遺事』 卷第三 興法第三 ‘原宗興法’

    8)『三國遺事』 卷第五 感通第七 ‘仙桃聖母隨喜佛事’

    9)『三國史記』卷 列傳8 孝女知恩

    10)『三國史記』卷 第 48 列傳8 薛氏

    11)『三國遺事』卷3 宝藏奉老普德移庵; 『三國史記』卷 17 고구려 本紀 5, 奉上王 9년 8월 조

    12)『三國史記』 卷 1 新羅本紀1 始祖 赫居世 17年 條

    13)『三國遺事』 卷3 塔像 4 皇龍寺種芬皇寺藥師奉德寺種 ; 강영경(1980):49

    14)이런 연구에 대한 반박도 있다. 이문웅(1985)은 왕위 계승만 갖고 당시 사회의 혈통체계를 구명하고자 하는 연구 방법론상의 문제와 아울러 신라는 왕위 계승에서도 몇몇 예외는 있지만 부계계승의 오리엔테이션이 강하다고 주장을 한다.

    15)『三國遺事』 卷 第二 武王편에는 무왕의 어머니가 과부였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무왕을 낳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三國遺事』에는 이외에도 사동(蛇童)의 모가 남편없이 아이를 낳았다거나(卷第4 蛇福不言) 진지왕이 도화녀의 꿈속에서 관계를 가져 비형이 태어났다는 등(卷第1 桃花女와 鼻荊郞)미혼모의 출산을 미화하고 있다. 이는 그 자식들이 당시 사회에서 인정받는 지위에 오르자 이를 합리화하는 신화가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사생아였다는 점이 큰 제약으로 작용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6)『三國遺事』 卷第 1 第 四代 脫解王

    17)阿珍浦村長阿珍等開櫝出有卵. 忽有鵲來豚卵開有童男自稱脫解. 託村후爲母學書史廉通地理(『三國史節要』卷 二 脫解王元年).

    18)『三國史記』 卷 13 高句麗本紀1 琉璃明王 28年 8月組; 卷3 新羅本紀 炤知麻立干 22年條; 卷8 新羅本紀8 神文王 3年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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