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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회] 이프 공동대표 유숙열, 한겨레 신문에서 인터뷰
    2012-04-02 11:40:26

  • 지난 3월 31일 한겨레 신문 토요판에 이프 공동대표인 유숙열 대표를 김두식 교수가 인터뷰한 글이 실렸습니다. 이프 창간의 주역이자 지금까지 이프 역사의 산 증인인 유숙열 대표의 열정적이고 파란만장한, 그리고 마침내 따뜻해진, 짧지 않은 인생이 잘 정리돼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그 인터뷰기사를 소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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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워서, 전향을 할까도 생각했었어’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페미니스트’ 유숙열씨



    성평등을 내면화하지 못한 남성들에게 젠더 이슈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과 같습니다. 1997년 여름 창간되어 2006년 봄 완간호를 낸 <이프>(IF)는 저처럼 숨겨진 마초들을 그나마 지금만큼이라도 조심하게 만든 전투적 페미니즘의 상징이었습니다. 유숙열 문화미래 이프 공동대표는 지난 15년간 김신명숙, 박미라, 제미란, 권혁란 등과 함께 ‘이프 진영’을 대표하는 논객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문열, 송기원, 김원우, 김완섭 등의 남성 작가들은 남근을 통해 사고하고 창조하며, 문학 또는 예술이라는 허울을 쓰고 펜으로 붓으로 카메라로 여성에 대한 성희롱과 폭력을 자행하고 있다.” 이프 창간호에 실렸던 시퍼렇게 날선 글을 시작으로 그의 남성우월주의 비판은 늘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최근에는 ‘내게 팬티를 사준 남자, 이근안에게’라는 글로 고문기술자 출신의 목사를 고발했고, “꼴보수나 진보나 똑같이 성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마초”라면서 나꼼수의 “저급한 음담패설 문화”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30년 가까이 <문화일보> 등에서 기자로 일한 유숙열은 버지니아 울프의 강연을 연극으로 만든 <자기만의 방>의 대본을 집필하고,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번역했으며, <외로워서>라는 시집을 출간한 극작가, 번역가, 시인이기도 합니다. 서울 양재동 주택가 지하실에 자리잡은 이프 사무실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극렬 페미니스트’를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좀 떨렸습니다.

     

     

                                   ▲유숙열씨는 2006년 펴낸 <이프> 종간호에 ‘내 인생의 주홍글씨, 페미니즘’이란 글을 남겼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거울 앞에 섰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요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요?



    “한가해요. 이프의 웹진(www.onlineif.com)이 일주일에 한번씩 나오는데, 거기에 해외 페미니즘 관련 기사들을 번역해서 싣고 있어요. 일주일에 이틀 정도 사무실에 나와서 회의하고 뉴스레터 발송하고 모여서 놀기도 하죠.”



    -웹진으로 전환한 이후에도 이프를 읽는 사람들이 많이 있나요?



    “요즘 이프에는 남자들도 육아일기를 비롯한 다양한 글을 쓰고 있고, 회원 등록을 한 독자 중에도 남자들이 많아요. 참 이상해요, 여자들은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고, 딴지 걸러 들어오든 궁금해서 들어오든 배우러 들어오든 아무튼 남자들이 많아요. 요즘 페미니즘이 죽었다고 하잖아요.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법제도적 장벽이 많이 사라졌으니까 페미니즘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식의 얘기도 나오고요.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성차별은 문화적으로 뿌리 깊은 거라서 페미니즘은 여전히 필요해요.”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나꼼수를 비판하며 “남자들의 허세놀이에 진짜 신물이 난다”고 쓰셨던데요?



    “신문사에 오래 다니는 동안, 기자라는 사람들, 사장, 편집국장, 원로 언론인들의 짓거리를 보고 깨달은 거지. 그 사람들이 여자를 동료나 기자로 보지 못해요. 구색 맞추기에만 이용할 뿐, 권력을 주거나 승진을 못 시켜. 원로 언론인으로 지금도 존경받는 사람이 문화일보 사장을 하면서 나를 정리해고하려고 한 적 있어요. 이미 나이 40이 넘고 차장이고 여성 관련한 이슈를 계속 던져왔는데도, 그 사람 눈에는 내가 기자가 아니라 ‘일개 여직원’인 거야. 그뿐만이 아니에요. 남자 기자들이 대부분 결혼하고 자식도 있고 그렇잖아. 근데도 맨날 농담이랍시고 한다는 게 여자 소개해 달라는 얘기야. 내가 여성운동도 하고 여자들을 많이 안다고 그런 거지. 그때마다 전쟁을 할 수는 없으니 나도 농담으로 대꾸했지, 남자 좀 소개해 달라고.”

     



    -그간의 인터뷰에서 ‘엄마의 부재’를 얘기하신 분들이 있었는데, 유 선생님은 ‘아버지의 부재’가 눈에 띄더군요.



    “제가 유복녀로 태어나고 4~5년 후 엄마가 재혼하셔서 계부 밑에서 자랐어요. 엄마는 재혼에 대한 죄의식을 가지고 계셨지만, 강한 분이셨어요. 엄마의 인생을 보고 저는 페미니즘을 하기로 결심했어요. 그런데 나이 50이 넘고 정작 나를 병나게 한 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었어요. 나를 키워주신 아버지가 야단 한번 안 치신 좋은 분이었는데 내가 대학생 때 돌아가셨거든요. 아버지가 시골에서 꽤 알려진 분이었는데 나하고는 성이 다르잖아. 그게 나에게는 큰 벽이었고, 그래서 부성에 대한 그리움, 분노가 있었던 거지.”



    1980년 7월17일 새벽 합동통신의 2년차 기자였던 유숙열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습니다. 훗날 김근태가 고문받았고 박종철이 죽어간 그곳에서 유숙열은 김태홍 한국기자협회장의 행방을 추궁당하며 이근안에게 물고문을 당했습니다. 고문을 당한 뒤 난감하게도 때아닌 생리가 터지자, 이근안은 생리대와 팬티를 사다 주며 “가게 가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아느냐?”고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 살벌한 시기에 어떻게 수배자를 숨겨줄 생각을 했는지 물었습니다.



    “10·26 때부터 내가 역사 속에 살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나는 운동권도 아니었고 광화문 가서 분신자살할 것도 아니었지만, 역사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고민했어요. 그때 마침 김태홍 선배에게 연락이 왔어요. 매일 텔레비전에 지명수배자로 얼굴이 나오던 시절인데, 이게 내가 할 일이구나 생각하고 기꺼이 내 친구 화실에 숨겨줬어요. 두 달 후 새벽에 내가 붙잡혀 갔고.”

     



    -고문자가 이근안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나중에 신문에 이근안 사진이 나왔는데 금방 알겠더라고요. 근데 얼마 전 나꼼수 비판하는 글을 쓰고 나서 꿈에 이근안이 다시 나오더라고. 며칠 동안 이근안에게 쫓기는 꿈을 꾸고 자다가 소리 지르고 그랬어요. 인터넷의 폭력적인 댓글을 읽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도 무의식적으로 상처를 많이 받았나 봐요.”

     



    -“페미년”, “꼴페미” 같은 표현이 난무하는 인터넷 문화에 질리셨군요?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가 없는 남자들의 폭력에 신물이 나요. 김어준은 자기네들이 성희롱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가해자가 너무 많은 거지. 성희롱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가 부족한 거야. 이프가 처음부터 지적한 게 바로 지식인 남성의 성희롱이잖아요. 모르고 한 거니까 사과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우리가 이것밖에 안 된다 인정하고 노력하겠다고 하면 되는 거지. 그런데 그것도 안 해요. 페미니즘이 여성만을 위한 게 아니에요, 남녀 모두 잘 살자는 거지. 페미니즘이 ‘가장 늦게 이루어질 혁명’이라고 하잖아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풀려난 다음 기소유예를 받으셨죠. 1982년 도미할 때까지는 뭘 하고 지내셨어요?



    “언론에 취업이 금지되었던 때라 같이 해직당한 기자들과 맨날 술 먹고 울분을 토로하는 게 일이었는데 그때 창비에서 나온 <여성해방의 이론과 실제>를 읽고 페미니즘을 발견했어요. 그 책에 베티 프리단이 쓴 <여성의 신비>의 한 장이 번역되어 있었는데, 그걸 보고 이거구나 깨닫고, 미국 가면 페미니즘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했죠. 대학 때부터 사귀던 사람과 82년 결혼하고 남편이 유학 가게 되어 함께 미국에 갔어요.”



    뉴욕에서 10년을 사는 동안 유숙열은 미주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는 한편 헌터칼리지와 뉴욕시립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했습니다. 신혜수(전 국가인권위원), 이영란(경희대 예술학부 교수) 등과 함께 ‘여성청우회’를 조직해 영사관 앞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고발하는 민주화 시위를 벌였고, 이웃에 살던 여성신학 유학생 정현경(유니언신학대학 교수)과 평생을 이어갈 우정도 쌓았습니다.

     


     

    순종적 여성상에 도전한 ‘폴리티컬 스모킹’



    -일하면서 공부하고 아이까지 키우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회사에서 봐준 덕에 오전에 원고를 넘겨주면 오후에는 나와서 자유롭게 공부를 했어요. 애는 베이비시터에게 맡기기도 했고, 한국의 친정에서 어머니가 2년 반을 키우기도 했죠. 아이 키우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이잖아요. 엄마로 보낸 세월을 되돌아보면, 내가 딸은 ‘안중에도 없이’ 살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속이 아파요. 페미니스트 엄마에 대한 반작용인지 딸은 가정에 대해서 보수적인 입장이에요.”

     



    -1991년 귀국하면서 문화일보 창간에 참여하셨죠?



    “처음에 문화일보를 만든 사람들의 컬러가 참 좋았어요. 한겨레에도 선배들이 많았는데, 돈 적다고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요.(웃음) 그래서 문화일보로 들어가게 됐지. 초창기 문화일보에는 ‘달라야 산다, 같으면 죽는다’ 그런 격문이 붙어 있었어요. 제가 오자마자 여성표가 선거를 좌우한다는 정치기사를 써서 그게 1면 톱으로 나왔어요. 정치기사에 젠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기사였죠. 그러나 그런 기간이 길지 않았고 사장이 새로 오면서 탄압을 많이 받았죠.”

     



    -검색을 해보니 쓰신 기사의 절반 이상이 여성 관련이더군요.



    “당시 여성담당 기자가 쓰는 기사라는 게 자녀양육, 미용, 김장, 옷, 제사상 차림 같은 것이었어요. 나는 그걸 바꾸려고 노력했고, 페미니즘 관점에서 정치, 문학, 연극, 미술, 법조, 소비자 문제 등 모든 분야를 다뤘어요.”



    -여성이라 힘든 점도 많지 않았나요?



    “취재나 편집 관행이 남성 위주로 되어 있잖아요. ‘보이스 네트워크’(boy’s network)가 있어서, 폭탄주 마시고, 기업이나 취재처에서 접대 받고, 룸살롱 가서 계곡주 따르고, 그러면서 취재원하고 친해지고, 출입처 관리하고, 어떻게 여자가 끼어요? 그러다 보니 성희롱 사건도 나는 거죠. 석간이라 새벽 일찍 출근하다 보면 편집국장, 동료, 후배, 취재원, 심지어 택시기사까지 ‘남편과 애들 밥은 누가 해주냐?’고 했어요. 한국 사회에서 여자들은 1년 365일 전천후 성차별적인 환경에 노출돼 있다고 봐야지.”

     



    -1997년 이프 창간에 참여하셨죠?



    “미국에서 페미니즘 공부할 때부터 내 꿈은 한국에서 페미니스트 저널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여성의 욕망을 아는 잡지’를 콘셉트로 잡고 ‘웃자, 놀자, 뒤집자’라는 이프 스피릿을 내걸었죠. 여성문화예술기획의 출판 분과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아 십시일반으로 돈을 내서 시작했는데, 내 인생에서 제일 따뜻했던 때가 그때야.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도 하고 책 출판도 하고 그때가 좋았어요. 인간을 살게 하는 건 욕망이거든요.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모르고 아내, 엄마로서 타인의 욕망을 채워주는 존재로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성잡지들은 남편을 꼬시는 법, 아이를 영재로 키우는 법, 연예인 가십, 요리, 상품 선전으로 가득 차 있고, 여성학의 담론은 너무나 현란한 언어의 유희라서 격차가 너무 컸어요. 그 간극을 메우고 싶었어요.”

     

      


     

     

     

     

     

     

     

     

     

     

     

                                   ▲유숙열씨

     

    -2003년부터는 방송위원도 하셨는데, 재밌으셨나요?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원로회의의 작동 메커니즘 같은 걸 깨달았어요. 여당, 야당 몫이 있으니까 국회랑 똑같이 갈라서서 매일 싸워요, 회의를 박차고 나가기도 하고. 갈등이 심해지면 정회하고 쉬는데 그때 제일 나이 드신 분이 성희롱적인 농담을 하더라고.



    그러면 여야를 막론하고 남자들 사이에 긴장을 늦추는 완화제 역할을 하는 거야. 그래서 ‘그거 성희롱적 발언이다. 내가 홍일점이지만 대한민국 여성을 대표해서 온 거다. 기자회견도 할 수 있다’고 했지.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지만, 그다음에는 숙연해졌지. 회의하면서 내가 일부러 담배도 피웠어요. 담배 피우는 페미니스트가 많은데 공식석상에서는 남자들만 피우고 여자들은 잘 안 피워. 그래서 나는 문화일보에서도, 방송위원회에서도, 심지어 평양 가서도 만찬장 헤드테이블에서 보란 듯이 피웠지. 남쪽 여자들은 저렇게 담배를 피우냐고 북쪽에서 난리가 났어. 그래서 폴리티컬 스모킹(정치적 담배피우기)이라는 말이 나왔죠. 조신하고 순종적인 전통적인 여성상하고 나를 맞바꾸고 선전포고를 한 거지. 나 담배 피우는 여자야, 만만히 보지 마, 큰코다쳐, 이런 식의 선전포고 같은. 지금은 담배 끊었어.”

     



    헤어진 남편에게 감동…혼인신고를 다시 하다



    -기자, 여성운동가, 번역가, 방송위원으로 정신없이 일하다가 2004년에 위기가 왔죠?



    “신문사에서 잘리다시피 실직하고, 이혼하고, 산소결핍증처럼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건강의 심각한 위협을 느꼈어요. 두 차례 쓰러져서 입원하고 정신과 치료도 받았죠.”

     



    -그 시기에 <외로워서>를 쓰셨는데, 전투적 페미니스트의 시집 제목으로는 의외였습니다.



    “내가 사상 전향서를 써야 하나 생각했었어.(웃음) 이프 빼고는 평생 남자들 속에서 산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살면서 좋은 남자들을 많이 만났어요. 문화일보에서 나를 끝까지 보호해준 것도 남자 후배들이었고. 시를 쓰던 시절에는 인생 자체가 힘들어서 전투적이지도 않고 페미니즘도 시들하고 세상이 다 시들하고 외롭고, 그러니까 사랑이 그리워지는 거야. 내가 박탈당했던 부성, 아버지의 사랑 같은 걸로 돌아가게 되더라고요. 너무 외로워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었어. 시집은 그 감정을 담은 거야. 시라도 쓰면서 버틴 거지. 외롭다고 만방에 대고 중계방송을 했으니 지금은 그 시집이 참 창피한데,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아요. 이게 나인데 뭐, 창피하지만 이게 난데. 자기 자신을 알게 된 거지.”

     



    -어떻게 다시 일어서게 되셨나요?



    “내가 쓰러졌을 때 페미니스트 친구들이 실제로 나를 업고 병원에 입원시켰어. ‘지구 끝까지 지켜줄게’ 그렇게 말하면서.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의 사랑으로 회복된 거죠.”

     



    -남편과 재결합하신 것도 의외입니다.



    “2009년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는 정신적으로 힘들고 집안에도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 이혼한 남편이 와서 모든 걸 함께 해줬어요. 그 사람에게 감동을 받았어. 그래서 혼인신고까지 새로 했잖아.(웃음) 지금은 내가 한가해졌으니 가정에 충실할 수도 있고.”

     



    -전투적인 입장은 포기하신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현장에서 극렬 페미니스트의 삶을 살다 돌아온 셈인데, 나의 결론은 예수하고 똑같아요. 사랑이 최고더라. 좋은 사람들하고 만나서 술 마시고 좋은 얘기 하고, 결국 인생은 만남이고 사랑이에요. 내가 비판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생겼어요. 나는 남자들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여자들한테 가해자의 입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남자들도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구나 하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남녀가 함께해야 하는 거죠.”



    평생 남자들과 부대껴온 힘겨운 삶이었습니다. 한때는 남자들뿐만 아니라 ‘영페미’ 후배들에게도 비판받으며 “페미니즘은 나의 주홍글씨”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강한 글을 썼지만 내면은 그만큼 외롭고 여렸습니다. 결국 유숙열은 외형적으로 멀쩡한 자신을 내려놓고 “창피한 자신”을 받아들임으로써 공존의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얘기를 듣다 보니 “새 시대의 맏형이고자 했지만 구시대의 막내가 되고 말았다”던 전직 대통령의 탄식이 생각났습니다. 개척자의 삶이 원래 그런 거지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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