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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회] 군인을 사랑하는 것의 ‘아주 작은’ 차이
    2012-02-21 12:35:42
  • -남녀 사이를 통해 군대보기

     

    이 글은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2003년 봄호에 특집으로 다뤘던 “여자, 군대를 말하다”에 실렸던 것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편집자 주

     

    현재 잡지사에 근무하는 이정민(가명, 29)씨의 얘기다. 대학교 3학년 때 2년 넘게 사귀어온 남자친구가 입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별의 서운함도 잠깐, 남자친구는 논산훈련소에서 시험을 거쳐 카투사에 합격했고, 얼마 후 그는 그녀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용산 미군부대에 짐을 풀었다. 면회를 갈 필요도 휴가를 기다릴 이유도 없이 남자친구는 주말이면 꼬박꼬박 그녀 앞에 나타났고, 그녀는 차츰 주말데이트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군인 신분의 남자친구는 너무 가난했고, 자취생인 그녀 역시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버는 처지여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주말이면 다른 스케줄을 잡을 수 없다는 점도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고생하는’ 군인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기에, 그녀는 만날 때마다 매번 밥과 술을 샀으며 심지어는 얼마간의 용돈도 찔러주었다.

     

    훗날 둘은 헤어졌으나, 이별을 결정하기까지 이씨는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리며 속앓이를 했다고 털어놓는다. 헤어진 이후에도 그 둘의 관계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동문회엔 나갈 수조차 없다고 한다.

     

    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웃고 넘기겠지만 경험자들은 다르다. 또 이건 단지 구세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낸 여자들의 인터넷까페 곰신’에서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지은(23, 직장인)씨 역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걸핏하면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 외치고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 주장하는 신세대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비슷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군대커플인 경우, 일반적인 연인 사이에는 없는 특별한 ‘무엇’이 관계를 규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그리고 이런 현상을 당연하게 만드는 어떤 관념적, 사회적인 기제가 있어 쌍방이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게 아닐까.

     

    자발적인, 그러나 강요되는 ‘여자들의 서포트’

     

    지금은 모르겠으나, 한 십몇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국군 아저씨’들에게 위문편지를 줄창 써대야 했다.

    그걸 즐겼건 귀찮아했건 상관없이, 이는 군인에 대해 ‘위문받아야 할 사람’ 으로 시선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봐도 그렇다. 한때 인기를 얻었던 ‘우정의 무대’는 물론이고 군인을 소재로 다루는 영상에는 늘 그들의 고된 모습과, 후방에 남은 이들의 안쓰러워하는 표정이 클로즈업된다. 게다가 군대에 갔다온 남자들은 한결같이 군대가 얼마나 엄혹한 곳인지를 강조한다. 그러니 ‘군인’ 하면 일단 고생하는 사람, 마땅히 대접받아야 할 사람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이런 관념은 아무래도 군대에 갈 의무가 없는 여자들, 나아가 남자친구를 군에 보낸 여자들에게 더욱 깊고 절실하다.

    “일반인은 느끼지 못하는 게 있죠. 애틋함같은 거요. 남들은 이해 못해요. 남자친구가 수신자 부담으로 연락하는 통에 전화세가 20만원 넘게 나온다고 하면 믿겠어요? 다들 미쳤어, 그러지.”

     

    작년 가을에 인터넷 까페 곰신에 가입했다는 김정현(28, 직장인)씨는 사실 그리 ‘잘하는’ 편은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잘한다는 건 무엇보다도 겉으로 태가 나는 것을 말한다. 지은의 경우가 그런 예로, 그녀는 남자친구가 처음 자대배치 받았을 때 내무반 식구들 것까지 전부 챙겨 초코파이에, 사탕에, 초콜릿을 바리바리 싸서 보냈다고 한다. 한 번 면회가면 보통 깨지는 돈이 30~40만 원. 남자친구 개인은 물론이고, 돌아올 때 다시 내무반 식구들 몫으로 치킨이며 라면 등을 챙기다 보면 지출규모가 커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현은 “쟨 좀 오버한다”고 웃으면서도 “어쨌든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라고 덧붙인다. 꼭 경제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두어 번 보내는 편지며 못해도 한 달에 한 번 아침 일찍 일어나 먹을 거 챙겨서 면회 가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라고.

     

     

    ▲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낸 여자들의 인터넷 카페 ‘곰신’ 회원들

     

     

    이처럼 경제적, 심적인 부담이 만만치 않는데도 여자친구들이 서포트를 멈추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고생하니까”이다. 특히 애인이 군에 들어간 지 얼마 안된 초년병 시절에는 안쓰러운 마음이 더욱 크다. 조금 과장하면 거리에서 마주치는 세상 모든 군인들이 다 애인같고, 혹 지하철같은 데서 손이 거친 이등병이라도 보면 울컥하게 된다고 한다.

     

    여자들의 서포트를 강제하는 요인 가운데 또 하나는 바로 군대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특수한 정서다. 여자친구가 있고 없는 것에 따라,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해당 군인의 위치가 달라지는 게 바로 그것. 사실 지은이 무리해가며 내무반까지 챙긴 이유도 신병인 남자친구를 잘 봐달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군대내에서 흔히 ‘예쁜 선물 보내오는 여자친구를 둔 군인에게 포상휴가 주기’ 따위의 이벤트를 벌이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이 관계를 부담스럽게 만드나?

     

    그렇다면 애인도 가족도 아닌 타인, 이를테면 친구나 선후배가 군에 간 남자를 바라보는 심정은 어떠할까.

    “안돼 보이죠, 뭐. 일단 좋아서 가는 게 아니라 마지못해 가는 거니까. 또 군에 가면 막 굴러야 하고 거친 일도 많을 텐데 쟤가 그걸 잘 견딜 수 있을까, 걱정도 되고요. 그래서 휴가 나오면 하다못해 밥 한 끼, 술 한 잔이라도 사줘야 할 것 같고, 또 그 남자애한테 여자친구가 없을 땐 편지도 보내야 할 것 같고 그렇게 돼요.”

    대학 다닐 때 같은 과 남자동기나 후배들과 친하게 지냈다는 강선미(가명, 25)씨의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극히 자연스럽던 이런 태도와 마음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한다는 것. 강선미씨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처음 몇 번은 “같이 시간을 보내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술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하지만, 나중엔 별로 할 말도 없고 군대얘기와 여자친구 소개해 달라는 얘기 듣는 게 지겨워서 가능하면 슬그머니 빠지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고백이었다.

     

    군대는 관계를 변질시킨다.

     

    이처럼 애인의 자격으로 적극적인 서포트를 하건, 아니면 단순한 친구, 선후배 입장에서 의무를 다하건, ‘군대’로 인해 생기는 관계의 파장은 분명 있는 듯했다. 첫째는 관계가 쌍방향이 아닌 ‘일방적’이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여자는 베풀고 남자는 이를 향유한다. 여기엔 별다른 문제의식이 끼어들 틈이 없다. 고생하지 않는 이가 고생하는 이를 지지, 지원하는 건 당연한 이치인 것과 마찬가지다.

     

    둘째는 관계에서 투명성이 사라진다는 것. 관계의 투명함이란, 말하자면 어떤 전제나 규범에 매이지 않고 터놓고 소통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군대가 끼어드는 순간 관계는 어떤 필터에 의해 걸러지고 특정한 관념으로 채색되고 만다. 불만이 있어도 쉽게 터놓을 수 없고,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해야 하고, 헤어지고 싶어도 말을 못하겠고, 정작 헤어져도 맘이 불편하고, 뭐 이런 것들이 전부 그 결과라 하면 정확할까?

     

    이런 시간들이 쌓여 관계가 참을 수 없이 부담스러워질 때 여자들은 일명 ‘고무신을 거꾸로 신거’나 혹은 ‘벗게’ 된다. 단순히 남자의 현실적인 조건을 저울질한 계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도 모르게 이미 불합리해진 관계에 지치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비단 여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인터넷에 떠있는 수많은 곰신까페에 들어가 보면 고무신 거꾸로 신은 여자들의 고백 못지않게 ‘군화를 거꾸로 신거나 혹은 마음이 변한 남자친구’로 인해 고민하는 여자들의 글이 많이 올라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남자들은 여자가 자기를 위해 몇 년간 헌신한 걸 인정하면서도, 또 그게 부담스러워지나봐요. 군에 있을 땐 외롭고 힘드니까 그런 생각 잘 안 하죠. 보통은 전역할 무렵에 마음이 바뀌더라구요. 그래서 곰신들 사이에선 전역 전후로 7개월이 고비라고들 하죠.”

     

    정현의 말에 뒤이어 지은이 한마디 덧붙인다.

    “그런데도 일단 헤어지면 여자 혼자 나쁜 년 되고 남자는 불쌍한 애 되는 거예요. 우습고 기분 나쁘지만 그게 현실이죠.”

     

     

     


     

    군인과 고무신이 아닌 평등한 남녀로

     

    사실 모든 남녀관계는 단순한 듯하면서도 복잡하고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특별하지 않은가. 하지만 군인을 사랑한다는 것, 군인과 사귄다는 것은 복잡하고도 특별한 그 지점이 개인성을 넘어 훨씬 ‘사회적’이라는 데 그 차이가 있는 듯 했다. 여성학자 권오분씨가 지적한 것처럼 “여성은 군인의 보호를 받는 존재이자 군인의 능력을 나타내는 존재로 규정됨으로써, 알아서 적극적으로 군인 남성을 지원하는 미시적인 행위를 수반하게” 되고, 더욱이 이것은 “여성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취재중 만난 한 여성은 심지어 애인의 탈영과 그것이 불러올 국가적, 사회적 파장이 두려워 쉽게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과거의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저 웃어넘길 일만은 아닌 것이, 병역필자인 이모(29, 컴퓨터 프로그래머)씨에 따르면 “군대에서는 신참이 들어오면 ‘여자친구가 있는지, 관계는 어떤지’ 등의 신변조사를 굉장히 철저하게 하고 이후 지속적으로 관리를 한다”고까지 했다. 이것 또한 지극히 사적인 관계에 군대라는 거대조직이 개입해 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열녀가 되어 무조건 헌신하는 것만이 능사인지, 혹은 단순히 밀고 당기는 게임을 잘함으로써 군에 있는 남자친구를 적당히 길들이는 것이 최선인지는 의문이다. 어찌됐건 건강한 관계란 이데올로기에 짓눌리지 않은 자유로운 대화와 거짓없는 이해와 배려가 가능할 때 꽃피고 열매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신이 건강한 남자라면 어떤 식으로든 군대생활을 거치게 되어있는 우리 사회에서, 이 문제는 어쩌면 젊은 선남선녀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오는 화이트데이에는, 군인과 곰신의 입장에서 사탕이나 초콜릿, 그리고 은장도와 꽃고무신 등의 선물을 주고받는 데 만족하기보다는, 평등한 남녀로 돌아가 쌍방향의 소통이 투명하게 이루어지는 관계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보니 너무 재미없는 제안이기는 하지만 해볼 만한 가치는 있을 것 같다.

     

    글 박미숙 사진 윤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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