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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회]성모천왕과 법우화상이 결혼한 내력
    조승미 / 2012-06-25 12:04:11

  • -지리산의 여신들, 불교와 동거하다2



    아무튼 반야도사와 혼인하여 여덟 딸을 낳고 함께 살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이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가 아니라, 비극적인 막장 드라마의 결말로 마무리된다. 우선, 남편 반야가 도를 닦기 위해 반야봉으로 떠나면서 그들의 동거는 끝이 났다.

    마고는 딸들을 한명씩 전국 팔도에 내려 보낸다. 그리고는 홀로 남편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이 입을 옷을 만들기도 하였다. 옷감을 짜는 직조의 여신 형태를 통해 그녀의 생산능력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기다림에 지친 마고는 그만 만들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죽고 만다. 찢겨진 옷은 바람에 날려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고 한다.

    성모천왕으로 숭배받던 여신이 남편을 기다리다 화병으로 죽었다는 이 이야기는 좀 어이없게 느껴진다. 신화가 민담화되면서 여신을 조롱하는 시선이 포함된 것 같다.

    한편, 이능화의 <조선무속고>에도 이와 유사한 설화가 소개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이야기가 아래와 같다.



    딸들 모두에게 무술(巫術)을 가르쳐



    주인공은 지리산 고엄천사의 남자승려 법우화상이다. 한가로이 수도를 하고 있었던 어느 날, 그는 이상한 것을 경험한다. 산에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계곡에 물이 불어있었던 것이다. 연유를 알고자 천왕봉 정상에 올랐다가, 키가 크고 힘 센 한 여인을 본다. 그녀는 자신이 성모천왕이라 하면서, 인간 세상에 내려와 군과 더불어 인연을 맺고자 물의 술수를 썼다 하면서 스스로를 중매하였다.

    그들은 이후 부부가 되어 집을 짓고 살면서 슬하에 딸 8명을 낳았다. 그리고 딸들 모두에게 무술(巫術)을 가르쳤는데, 금방울과 부채를 쥐고 춤을 추고 아미타불을 창하고 법우화상을 부르고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무업을 했다. 이 때문에 세간에서는 큰 무당은 반드시 지리산에서 성모천왕에게 기도해서 접신한다고 한다. 

     

                                                                                 ▲하동 쌍계사 산신도
     

    이 버전에서는 성모천왕이 거녀신화의 창조신 형태로 등장한다. 물의 술수는 생명탄생을 위한 그녀의 권능이었다. 그리고 여신은 인간세상과 인연을 갖기 위해 불교의 남성승려 법우화상과의 혼인을 선택하였다. 스스로 중매하는 모습에서 대모신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것같다. 또한 도 닦으러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죽은 무력한 할매의 모습 대신, 전국의 큰 무당들이 접신하고 기도하기 위해 찾아오는 강력한 신앙대상의 여신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모천왕과 법우화상은 딸들에게 무업을 가르쳐 전국으로 내보냈다. 이것은 곧 역으로 전국의 큰 무당들이 지리산 성모를 어머니로 여기고, 아버지를 불교의 법우화상으로 삼았음을 말한다. 불교와 무속이 얼마나 깊숙이 습합되었는지 알 수 있다.



    산신은 본래 어머니여신이었다



    역사적으로 이런 신앙형태가 전개되었던 것은 조선후기의 일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산중에 사찰이 증가하고 무속의 신당이 늘었다고 개탄하는 유림들의 글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불교와 무속의 신앙 형태도 결합되기 시작했다. 무당들은 지리산으로 모여들어 성모천왕과 같은 강력한 여신에게 접신하면서도, 한편으로 불교에 근거지를 설정하고자 했다. 여신을 결혼시킨 것은 이들 딸들, 즉 무당의 요청이었던 것이다.

    불교 내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사찰 안에 산신신앙이 적극 수용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현존하는 산신도는 대부분 19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이라 하는데, 이것을 보면 이 시기부터 산신 신앙이 왕성하게 불교 안으로 들어왔던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현존하는 산신도는 대부분 하얀 수염의 할아버지 일변도의 산신 이미지로 나타난다. 하지만 아직도 산신각을 성모각(聖母閣)으로 부르면서, 어머니 여신으로서의 산신을 기억하는 사찰이 남아있다. 그리고 특히 지리산, 계룡산과 같은 민족의 영산에 있는 사찰들은 여성 산신의 모습을 지키고 있기도 하다. 그만큼 이런 산들을 여신으로 인식해 온 뿌리가 깊고 강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지리산 법계사 여자 산신도

     

                                                   ▲계룡산 동학사 여자 산신상 (흰옷을 입고 손에 영지를 들고 있다)

    산은 억불로 핍박받았던 불교의 사찰을 품어주었고, 불교는 절 안에 산신각을 안고서 함께 흘러왔다. 한때는 불교 본연의 신앙이 아니라고 산신각을 부수는 승려들이 더러 나오기도 했지만,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사찰은 산신각을 반드시 조성하고 있다. 이것은 산신에 대한 민중의 신앙이 끊어지지 않는 생명력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은 한국인의 영성을 특징짓는 가장 강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산을 성스러운 어머니로 부르고, 친근한 신성인 ‘할매’가 주재하는 곳으로 인식하며, 삶의 풍요로움과 치유의 약을 모두 그곳에서 얻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불교와 동거하며 딸을 낳고...



    전쟁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삶이 피폐화된 조선후기에 지리산의 여신 성모천왕은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불교와 동거하며 딸을 낳고 이들을 무당으로 키워 세상으로 내보냈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던 것이고, 그리하여 천왕할매의 결혼설화가 만들어졌다고 하겠다. 

    일상의 삶이 전쟁이 된 오늘날, 몸과 마음에 병이 든 사람들이 다시 지리산을 찾아 들어가기 시작한 것 같다.

    혹시 천왕할매가 지금도 누군가와 동거하며 딸을 낳고 계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들을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해 무엇을 가르치고 계실지 자못 궁금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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