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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믄장아기2
    이프 / 2012-04-03 03:33:18
  • 집을 나선 가믄장아기는 산을 넘어 길을 가다가 허름한 초막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한다. 노부부가 마를 캐는 아들 삼형제와 사는 집이었다. 해가 저물자 큰 마퉁이, 둘째 마퉁이가 차례로 들어오면서 계집애를 들여 놀고 있다고 부모를 욕한다. 막내만 하늘이 도와 검은 암소와 사람이 함께 들어왔다고 반갑게 맞았다. 첫째와 둘째는 마를 삶아서도 부모에게는 모가지나 꼬리 부분만 주는데 막내는 가운데 부분을 드렸다. 가믄장아기가 찹쌀로 밥을 지어 밥상을 들고 들어가자 노부부와 두 형제 모두 조상들도 안 먹던 벌레 밥이라며 거부한다. 그러나 막내는 맛있게 받아먹는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둘은 백년동거를 약속하고 부부가 되었다.

     

    쫓겨난 여자의 발복(發福) 이야기

     

    다음 날 가믄장아기는 마 파는 곳에 구경가자고 한다. 그런데 큰 마퉁이가 파던 곳에는 똥만 물컹물컹하고, 둘째 마퉁이가 파던 곳에는 지네, 뱀, 짐승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작은 마퉁이가 파던 곳에서는 금덩이, 은덩이가 나와 검은 암소에 실어다 팔아서 기와집에서 부자로 살게 된다.

     

                                                            ▲작은 마퉁이가 파낸 금덩이, 은덩이(출처:jejumall.com)

     

    어느 날 가믄장아기는 작은 마퉁이에게 낳아준 부모가 틀림없이 거지가 되어 거리를 떠돌고 있을 테니 거지잔치를 벌여 부모를 찾고 싶다고 말한다. 부자도 보통 부자가 아니었던지 석 달 열흘 잔치를 여는데 만 명이나 되는 거지가 모여들었다. 백일 만에 강이영성 거지 부부가 찾아왔는데 가믄장아기의 꾀로 얻어먹질 못해 마지막에 남는다. 가믄장아기의 명을 받은 하인이 두 거지를 안방으로 청해 한 상 가득 차려 준다. 정신없이 먹는데 가믄장아기가 들어와 억지로 이야기를 청하자 살아온 내력을 풀어놓는다. 그때서야 가믄장아기는 ‘가믄장아기가 여기 있다’면서 술을 따른다. 깜짝 놀라 술잔을 놓으며 어머니, 아버지는 눈을 활짝 뜬다.

     

                                                             ▲거지잔치를 벌여 부모를 찾는 장면(출처:jejumall.com)

     

    무당 안사인이 부른 창본은 여기까지가 끝이지만 한생소 등이 부른 몇 창본을 참고해 보면 가믄장아기의 말이 더 있다. “저는 본래 전상을 맡아 인간 세상에 나왔습니다. 부모님이 부자가 된 것도 저 때문입니다. 인간 세상 먹는 것도 전상, 입는 것도 전상, 장사하는 것도 전상, 농사일도 전상, 글하는 것도 전상, 활 쏘는 것도 전상, 모든 게 전상 아닙니까.”

     

    이렇게 줄거리를 따라가자니 몇 가지 물음이 저절로 떠오른다. ‘아니 이거 평강공주 이야기 아냐?’, 가믄장아기가 거지잔치를 벌여 눈먼 부모를 다시 만나고 마침내 눈먼 부모가 눈을 뜨는 대목은 옛소설 <심청전> 혹은 판소리 <심청가>를 빼닮았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조금씩 비슷할 뿐 정작 어느 이야기와도 꼭 같지는 않다. 그런데 <삼공본풀이>와 아주 비슷한 민담이 있어 주목을 끈다. 이른바 ‘내 복(덕)에 산다’ 유형의 민담이 그것이다.

     

    이 유형의 민담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집에서 쫓겨난 여자가 천한 남자를 만난 후 귀한 물건을 발견하여 잘 살게 된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누구 덕에 먹고 사느냐고 아버지가 묻자 막내딸만 내 덕에 산다고 대답하여 쫓겨난다. 가난한 숯구이 총각을 만나 함께 살다가 숯막 근처에서 금덩이를 발견하여 거부가 된다. 가난해진 아버지를 다시 만나 모시고 잘산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내 복에 산다’ 형 민담은 아무리 봐도 <삼공본풀이>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다만 부모가 맹인이 되었다가 눈을 뜬다거나 두 언니가 청지네와 용달버섯(독버섯)으로 환생한다거나 숯구이 총각이 아니라 마퉁이 삼형제라거나 하는 부분에서 변이가 있을 뿐이다.

     

    한데 이런 쫓겨난 여자의 발복(發福) 이야기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민담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는 이야기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은 보편적 이야기라는 뜻이다. 게다가 이미 <삼국사기>의 <온달전>에도 평강공주 이야기로 들어가 있으니 꽤 오래 전부터 구전되던 민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화에서는 제주도 <삼공본풀이> 말고는 같은 유형의 이야기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무슨 뜻인가? 이 유형의 민담이 신화에서 온 것이 아니라 신화의 변형이란 뜻이다. 운명신의 본풀이가 먼저 있었다면, ‘내 복에 산다’ 형 민담은 우리나라 전역에 전승되고 있는데, 제주도에만 운명의 신이 살아 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삼공본풀이>는 널리 퍼져 있는 민담을 심방들이 받아들여 전상신의 이야기로 새롭게 풀이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우리 운명의 여신, 가믄장아기

     

    그렇다면 왜 제주 심방들은 부모에게 쫓겨난 가믄장아기를 전상신으로 모셨을까? 자연히 뒤따르는 의문이다. 이 의문을 풀려면 ‘내복에 산다’ 형 민담과 <삼공본풀이>가 공유하고 있는 핵심적인 화소를 불러내 심문해야 한다. 곧 아버지가 딸들에게 누구 덕에 사느냐고 물었을 때 언니들과는 달리 왜 막내딸은 그렇게 맹랑한 대답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저 버르장머리 없는 막내라서 그랬던 것일까?

     

    두 딸은 심심해서 괜히 쓸데없는 질문을 한 아버지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준비된 답변을 한다. 신화에서는 하느님(天神), 지하님(地神)의 덕이 관용적으로 덧붙었지만 정답은 ‘아버지 덕’이다. 얼마나 착한 딸들인가? 이들 민담이나 신화가 효(孝)에 방점을 찍었다면 당연히 두 딸이 주인공이 되고, 두 딸이 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이야기는 효가 아니라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운명이란 시각으로 보면 두 딸은 아버지의 효성스러운 딸이라는 주어진 운명 안에 정확히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러나 막내딸은 그것을 거부한다. 막내딸은 자신에게 주어진 효녀로서의 운명을 부정한다. 따라서 민담에 그려진 막내딸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부모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일궈나가려는 한 여성의 주체성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두 언니의 운명론에 대해 반운명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언니들은 등장하지 않지만 <온달전>의 평강공주가 보여주는 ‘선택’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 평강왕의 명을 거부하고 오히려 한입으로 두말하는 아버지를 나무라다가 궁궐에서 쫓겨나지 않았던가.

     

    그런데 <삼공본풀이>는 이 핵심화소를 아주 재미있게 변형시킨다. 앞서 줄거리를 더듬으면서 슬쩍 흘렸지만 가믄장아기는 ‘내 덕에 산다’고 말하지 않고 ‘내 배꼽 밑에 선 그믓 덕에 잘 산다’는 괴상한 대답을 한다. ‘배꼽 밑에 선 그믓’ 이란 총각들은 잘 모르겠지만 배꼽 밑에 세로로 서 있는 금, 곧 임신선을 말한다. 임신을 하면 짙어졌다가 출산 후 다시 옅어지는 묘한 선이다. 이 임신선이 뚜렷해야 잘 산다는 민간의 속설이 있는 것을 보면 임신선과 여성의 운명을 연결시키는 관념이 있었던 모양이다. 마치 수상(手相)에도 운명선이 있고 관상을 통해서도 운명을 점치듯이. 그렇다면 가믄장아기의 대답은 나는 내 타고난 운명대로 산다는 뜻이 된다. 사실 본풀이의 마지막에 가믄장아기가 밝히듯이 자신은 전상신의 직분을 받아 세상에 온 것이고, 부모가 부자가 된 것도 자신 덕이고, 모든 것이 ‘전상’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사람은 다 타고난 전생대로, 곧 운명대로 산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화 <삼공본풀이>는 민담의 반운명론을 운명론으로 뒤집은 것인가?

     

     

                                                                        ▲연극으로도 공연되고 있는 가믄장아기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또 있다. 왜냐하면 민담의 이야기 구조가 신화 내에서 그대로 유지되면서 가믄장아기는 민담 주인공의 경로를 따라 집을 나가 천한 마퉁이를 만나 잘 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가믄장아기가 민담의 구조를 따르면서 몸으로 드러내는 반운명론적 사고와 모든 게 ‘전상’이라고 하는 신화적 발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삼공본풀이>의 이야기 구조를 달걀에 비기자면 반운명론이라는 노른자를 운명론이라는 흰자가 감싸고 있는 셈이다. 이 형식상의 모순은 민담을 받아들여 무속신화로 창안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어쩔 수 없는 상처인가, 아니면 운명에 대한 새로운 직관의 소산인가?

     

    개인의 운명이란 철학과 종교, 그리고 문학의 오래된 주제지만 정해진 답은 없는 것 같다. 조선 후기 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인간의 복을 하늘이 정한 복과 사람이 만들어가는 복으로 명쾌하게 가름한 바 있다. 타고난 운명과 만들어가는 운명, 이 두 개의 운명론은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서로를 밀고 당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삼공본풀이>는 그게 바로 운명이고 전생이라고 풀이한다. 운명에 맞서는 것이야말로 운명의 진면목이라는 것이 <삼공본풀이>가 노래하는 운명론이다.

     

    나는 <삼공본풀이>를 읽고 들을 때마다 <삼공본풀이>를 만들어 낸 제주도 심방들의 ‘전상’(운명)에 대한 통찰에 놀라곤 한다. 민담의 반운명론을 받아들여 운명의 여신을 빚어낸 그들의 정신 안에는 성속(聖俗)의 관계에 대한 혜안이 빛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세속(世俗)을 살아가는 인간의 운명이란 신성(神聖)의 손바닥 안에서 뛰노는 손오공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세속적 실천이 성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 운명을 결정론적으로 사유하는 그리스 신화의 운명의 여신 모이라(Moira)의 형상에서는 쉽게 만나기 어려운 얼굴이다. 운명이 궁금해 점집 문이라도 두드리고 싶은 이들에게 우리 운명의 여신 가믄장아기를 만나보라고 말하고 싶다.

     

     

    **윗 글은 책『우리신화의 수수께끼』(조현설 지음. 한겨례출판(주))에서 발췌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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