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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회] 신라의 미소, 누구의 얼굴인가?
    조승미 / 2012-02-14 05:15:43
  • 긴 겨울방학이 끝나간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빈둥거리며 보낸 시간에 대해 후회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번 겨울에는 딸아이와 함께 분명하게 완수했다고 자부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그림퍼즐 맞추기. 작년부터 구석에 묵혀놓고 내내 찜찜해 하던 것을 이번에는 한번 끝내 보자고 꺼내어 드디어 완성을 본 것이다.

    처음에는 시간도 아깝고 그거 완성해서 뭐하나 싶어 영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딸내미가 혼자 끙끙거리는 것이 안쓰러워 좀 도와주다 보니, 슬슬 오기도 발동하고 하나씩 그림이 만들어지는 재미도 쏠쏠하여 급기야는 이틀간 식음을 전폐하고 퍼즐을 손에서 놓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퍼즐 조각 하나를 온전히 제자리에 맞추기 위해서는 부분과 전체에 대한 인식작용을 쉼 없이 반복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체험하게 해주었다.

     

    첫째는 모든 조각은 자기 자리가 분명하게 있다는 점. 비슷하게 생겼다고 억지로 우기며 놓아서는 결코 전체를 완성할 수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지만, 난 몇 번이나 비슷한 조각을 놓고 우김질을 해서 딸아이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둘째는 부분과 전체가 갖는 관계의 미묘함이다. 전체 그림에 대한 인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분에 강하게 적용할 경우, 맞는 그림 찾기가 더 어려웠다. 즉 부분은 부분끼리 관계맺는 방식이 있어서, 미세한 구조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나라도 제대로 조각을 맞출 수 있었다.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경우도 발생한다. 어려운 문제는 잠시 보류해 두는 것이 좋다. 다른 쉬운 곳을 맞추어 가다보면, 아까 그 자리에 어떤 것이 맞는지 갑자기 명료하게 알게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그 자리의 조각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일 경우가 많았다. 너무 평범하거나 반대로 너무 이상하게 보여서 그 자리에 맞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인식의 선입견이 현실판단을 얼마나 방해하는지 여실히 목격하는 학습효과가 있었다.

     

    ‘신라의 미소’라는 퍼즐 조각

     

    퍼즐작품을 하나 완성하고 나니 자신감이 좀 생겼다. 그리하여 이참에 오랫동안 묵혀놓은 또 다른 퍼즐조각 같은 문제를 풀어볼까 하고 꺼내어 본다. ‘신라의 미소’로 널리 알려져 있는 얼굴무늬 기와조각이다.

     


    ▲경주 영묘사지 얼굴무늬 수막새

     

     

    공식명칭은 경주 영묘사지(靈廟寺址) 인면문 원와당(人面文圓瓦當).

    유물을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은 별로 없어도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하게 기억되어 있을 것이다. 신라 천년역사 행사나 경주관광의 대표 이미지로 많이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이것을 기념품으로 사서 내 방 벽에 오랫동안 걸어 두었는데, 십수년 뒤 어느 날 우연히 바라보다가 “그런데 이 얼굴은 도대체 누구지?”라고 의문이 생겼다. 불교학을 공부하게 되면서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막연히 익숙했던 그 얼굴이 낯설어지고 그 정체가 궁금해진 미스터리 퍼즐조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책상 서랍 속에서 먼지묻은 그 조각을 다시 꺼내어 보게 된 것은 그 뒤로 다시 십수년이 지난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이것의 정체를 한번 낱낱이 파헤쳐 보자고 달려들다 보니, 여기에는 점점 더 복잡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마구 얽혀있음을 보게 된다. 이쯤되면 퍼즐그림 맞추기에 오기가 발동하는 단계로 접어든 것 같다.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선덕여왕과 영묘사

     

    우선, 이 조각은 선덕여왕 4년(632)에 세워진 영묘사(靈廟寺)라는 절에서 출토되었다. 정확하게는 영묘사라는 이름이 조각에 새겨진 것이고, 위치는 신라 최초의 절 흥륜사지로 추정된 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출토된 위치가 흥륜사지인지, 영묘사지인지에 대한 논쟁이 분분한데, 일단 이 조각이 영묘사 유물이라는 것에 이견은 없다.)

    그러면 영묘사는 어떤 절인가. 선덕여왕은 즉위하자 곧바로 분황사와 영묘사를 직접 건립하였다. 특히 영묘사는 신문왕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영묘사성전(靈廟寺成典)’이라는 관청까지 두어 관리했던 특별한 왕실의례의 장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영묘사 남(南)에서 오성제(五星祭)를 거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영묘사가 본래 성신(星神)과 같은 재래신앙과 깊은 연관이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채상식, ‘신라통일기 성전사원의 구조와 기능’)

    또한, 백제 군사가 여근곡에 잠입해 있다는 사실을 선덕여왕이 알고 그들을 생포하게 했던 것도 바로 이 영묘사 못에서 울고 있던 개구리 덕분이었다고 하니, 이런 일화를 통해서도 이 절이 국가와 깊은 관련을 갖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영묘사 건립과정 또한 독특한 점이 많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이 절을 창건할 때 큰 연못이 있었는데, 두두리(豆豆里 도깨비) 무리가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워 전각을 세울 수 있었다는 속설을 전하고 있다. 귀신 혹은 귀신 신앙의 공동체가 사찰 건립에 동참한 모습은 선덕여왕 이전 진평왕대에 흥륜사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은 영묘사가 단지 불교의 사찰이었다기 보다, 국가적 차원의 주요 의례사원으로 창건된 것이기 때문 아니었나 추측하게 한다.

    영묘사 창건에는 실로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다고 <삼국유사>에서 전하는데, 이때 성안의 모든 남녀들은 이 절의 장육존상을 조성하기 위해 진흙을 져다 나르는 노동에 대규모로 참여하고, 노동요로서 ‘풍요(風謠)’라는 향가가 유행하기도 했다 한다. 그런데 이 과정은 국가의 권위에 의한 강제적 노역이기보다는 좀 더 자발적인 분위기가 강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사찰과 선덕여왕 사후에 조성된 사천왕사 건축물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불교예술가이자 승려인 양지가 매우 대중적인 인기를 받았기 때문이다. 양지의 석장(錫杖) 끝에 포대를 걸어두면 저절로 지팡이가 이집 저집 날아다니면서 시주물이 가득가득 차서 돌아왔다고 한다.

     

    선덕여왕 즉위 초기의 이런 분위기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선덕여왕 후대의 여러 사건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다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즉, 자장율사가 구룡을 몰아내어 통도사를 건립하거나, 여왕의 치병을 위해 법척과 여우를 찔러 죽이고 대신 승려 밀본이 등장한 것 등이 그것이다. 영묘사를 건립했던 신라민중들은 기존의 신앙과 불교를 모두 포용하여 평화와 풍요를 기원했는지 모른다. 그 무렵 신라는 영토를 비약적으로 확장한 진흥왕대 이래로 끝없는 전쟁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신앙 전통이 다른 공동체 일원들도 영묘사 건립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은 이런 범국가적 염원에 모두 하나의 마음이 되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영묘사 얼굴무늬 기와가 이런 편안한 미소를 갖게 된 것은 그 시절 신라인들의 이런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계급과 종교의 갈등을 넘어 가난과 두려움을 함께 이기고, 인간세상의 본래 평화로움을 회복하고자 하는 바램 말이다.

     

    영묘사의 지귀설화를 검토하다

     

    그런데 영묘사와 선덕여왕의 관계에 있어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소위 ‘지귀(志鬼)’설화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영묘사의 종교적 갈등을 대표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내용은 이러하다. 선덕여왕을 흠모한 지귀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하루는 영묘사에서 선덕여왕을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어 여왕을 직접 만나지 못하자, 아쉬운 마음에 그만 가슴에서 불이 나서 (心火) 이 절의 탑이 타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미리 예언한 한 승려에 의해 절의 주요 건물은 새끼줄로 보호되어 화재의 재난을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대중적으로는 선덕여왕의 러브스토리로 소개되기도 하고, 혹은 그 시대 종교적 갈등을 암시하는 일화로 설명되기도 하는데, 문헌자료를 좀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이 일을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 지귀설화는 불교문헌인 <대지도론>에 소개된 한 설화를 모티브로 한 것임이 지적되었다. 그리고 영묘사 화재사건은 선덕여왕대보다 오히려 후대인 문무왕대에 빈번했던 것으로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엄기영, ‘지귀 설화의 형성 배경과 역사적 의미’)

    즉, 후대 영묘사 화재사건과 남자의 상사병을 소재로 한 불교문헌의 한 설화가 선덕여왕에게 투영되고 재구성되어 오랫동안 회자되어 왔다고 추정된다. 그러니까 선덕여왕대의 영묘사 스캔들 -사랑과 종교 갈등의 사건-은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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