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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회] 한글과 조선의 여성들, 그리고 원앙부인
    조승미 / 2011-12-20 04:32:05
  • 딸아이와 함께 열혈 시청했던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이번 주 종영을 앞두고 있다. 대왕 세종에서 인간 ‘이도’로 변화시켜 욕쟁이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도 재미있었지만, 한글 창제를 둘러싼 정치적 이슈를 비교적 섬세하게 그려서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얻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 불편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한글창제 핵심참모들이다.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나이브한 이야기가 명백하게 폐기된 것은 반가웠지만, 그 대신 병으로 요절했던 세자와 몇 명의 궁녀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했다는 설정은 비역사적인 것이라 실망스럽기만 하다.

     

     

    드라마 주인공인 천재 궁녀 대신, 사학계에서는 천재 공주의 활약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종의 친딸이자 세조의 누나이기도 한 정의공주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핵심주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불교 승려 신미대사(信眉大師, 1403~1480)다. 세종은 죽기 직전 문종에게 신미대사에게 시호를 내리라고 했을 정도로 그를 중시했다고 한다.

     

     

    숨겨진 한글 창제 주역은 신미대사와 정의공주

     

     

    즉 한글은 인도 고전어인 범어에 능숙한 승려가 기초하고, 변음(變音)과 토착어 문제를 유일하게 풀어내었던 정의공주 같은 여성 학자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었다.

    승려와 공주의 공헌은 당시 한글의 권위를 떨어뜨릴까 봐 드러낼 수 없어 묻혀야 했다 하는데, 오늘날의 드라마에서조차 여전히 언급도 되지 않은 채 묻히고 있는 것은 안타까움을 넘어 절망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역사는 늘 이렇게 왜곡된 그림으로 우리를 짓누르고 마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한글과 관련한 중요한 메시지 하나를 전달하고 있다고 본다. 작가가 가장 공들여서 말하고 있는 것이 이게 아닌가 싶은데, 바로 ‘한글’이 민중으로 하여금 생각을 표출하게 만드는 힘을 준다는 것이다.

    밀본으로 상징되는 소수 엘리트 정치주의자들은 이것이 사대부의 독점적 위치를 흔드는 역병같은 게 될 거라며 불온시했다. 물론 통치자 세종이 백성을 사랑해서 이 힘을 사대부에게서 빼앗아 민중에게 갖다준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왕권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한글정치를 기획한 것뿐이었다.

     

     

    아무튼 한글 반포로 인해 당시 조선 사회 시스템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로 연산군 대에 오면 한글 상소문이 넘쳐나서 임금이 격노했다고 하니, 정치적인 면에서도 그 변화를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리고 한글은 특히 민중의 수평적인 네트워크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마치 최근 우리사회의 소셜네트워크가 점점 막강한 힘을 형성하며 기득권층에 도전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최초로 한글이 쓰인 그림 <안락국태자변상도>

     

     

    이런 맥락에서 이번에 함께 살펴볼 유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최초로 한글이 쓰인 그림, <안락국태자전변상도(安樂國太子傳變相圖)>다.

    그림에 한글이 쓰여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바로 그림을 설명하기 위해 한글이 그림 속에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전체 그림은 세로 1m, 가로 50cm 정도로 요즘 달력 크기라고 보면 되겠는데, 여기에 전체 20여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니 그 내용이 적잖이 복잡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한글설명까지 시도한 이런 파격적인 그림이 제작되었던 것일까?

     

     

                                                                  ▲안락국태자전변상도 安樂國太子傳變相圖

                                         (출처:http://news.korean.go.kr/online/see/hangulstory/hangulstory.jsp?idx=16&)

     


     

    이 변상도는 불교 탱화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각 장면 그림의 사이로 흰줄들이 보이는

    것이 한글설명이다. 조금 확대해서 보면 한글이 뚜렷이 보인다. 탱화에 한글설명이 들어있는 경우는 요즘에도 거의 볼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조선 전기에 이런 실험적인 작품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변상도의 일부분을 확대한 이미지

     

    자세히 보면 한자가 전혀 쓰이지 않은 한글전용문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장면 사이사이에 빼곡하게 설명을 달아놓은 것으로 보아 한글사용자들에게 이 그림의 내용을 전달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강희정, 「학술조선 전기 불교와 여성의 역할 :불교미술의 조성기를 중심으로」『아시아여성연구』, 2002.).

     

     

    그런데 누가 이런 그림을 만든 것일까? 남아 있는 화기(畵記)에 의하면 조선 선조대 비구니 혜인과 혜월이 왕실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면서 제작하였다고 전한다. 즉 왕실여성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비구니들이 왕실여성의 후원을 받아 만든 ‘여성들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한글이 여성들 간의 커뮤니케이션 도구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이 그림이 선조대에 최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전의 그림이 낡아서 다시 제작했다는 기록에 의하면, 한글이 반포될 즈음에 이런 그림이 시도되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오직 한국에만 있는 이야기

     

     

    이 그림이 주목되는 이유는 이 뿐만이 아니다. <안락국태자경>이라고 하는 내용 자체도 우리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주제다. ‘경(經)’이라고는 했지만, 이것은 오직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세종 당대에 발표된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에도 이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었고, 후에 이것을 종합한 『월인석보』에 보다 자세하게 그 내용이 소개되었다.

     

     

    <안락국태자경>은 한국에서 이처럼 다양한 장르로 전개된 옛 이야기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신화다. 우리 종교문화의 심오한 연원을 이 이야기가 간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조흥륜, 「안락국전연구-원앙부인본풀이」『샤머니즘연구』).

    <안락국태자경>은 한문본 5종, 한글본 9종, 무속의 신가 4종(평안북도 신가 신선세텬님청배, 경남김해 신가 악양국왕자노래, 동해안 신가 오구대왕풀이, 제주도 신가 이공본풀이), 그리고 앞의 변상도를 포함하여 현재 총 19종이 전해지고 있다.

     

     

    안락국전이 어떤 이야기이기에 한글이 반포되자마자 텍스트에 채택되었고, 이후에도 민중들 사이에서 확대 재생산되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일까? 『월인석보』에 수록된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범마라국 임정사(林淨寺)에 광유성인(光有聖人)이 중생을 교화하고 있었는데, 서천국(西天國)에 사라수대왕이 왕비 원앙부인과 함께 400여의 소국을 잘 다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제자인 비구 승렬바라문을 보내 찻물을 기를 채녀(婇女)를 빌려 오라고 하였다. 사라수대왕은 승렬바라문에게 팔채녀(八婇女)를 보내 주었다.

    3년 뒤 광유성인은 유나(維那) 즉, 절의 규율을 맡은 책임자를 시키려고 사라수대왕을 직접 오라고 한다. 사라수대왕은 나라를 동생에게 맡기고 서천국을 떠나 왕비 원앙부인과 함께 죽림국으로 간다.

    그런데 만삭이 된 원앙부인이 걷지를 못해 그곳 자현장자 집에 금 2000근을 받고 종으로 팔려 남게 되었다. 원앙부인은 사라수대왕에게 왕생게(往生偈)를 알려 주고,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안락국(安樂國)으로, 딸을 낳으면 효양(孝養)이라 하라는 대왕의 부탁을 듣는다. 원앙부인은 장자의 집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 안락국이 7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찾으므로, 범마라국 임정사 광유성인이 계신 곳에 가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 준다.

    안락국은 처음에 도망을 가다가 계집종에게 붙잡힌다. 다시 장자의 집에서 도망하여 임정사를 찾아 가는 길에 팔채녀를 만나 원앙부인이 알려준 왕생게를 듣는다.

    그 근거로 아버지 사라수대왕을 만나 이름인 '안락국'과 '왕생게'를 통해 부자임을 확인하고 붙잡고 운다. 사라수대왕은 안락국에게 남편과 아들을 잃고 더욱 슬퍼할 원앙부인을 생각하여 빨리 돌아가라 한다.

    죽림국에 도달하여 안락국은 목동의 슬픈 노랫소리를 듣고는, 원앙부인이 장자에게 세 동강 내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안락국태자가 원앙부인의 뼈를 이어 놓고 울며 살아나도록 합장하여 게를 지어 부르니, 극락세계로부터 48용선(龍船)이 진여대해에 떠 안락국 태자 앞에 와서 그중의 보살이 부모가 벌써 서방에 가서 부처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안락국 태자는 그 말을 듣고 사자좌에 올라 허공을 타고 극락세계로 갔다.

     

     

    포용하며 생명력 지켜온 불교와 무속

     

     

    아버지를 찾는 아들의 스토리는 주몽신화에서 그 원형이 발견된다(조흥륜의 연구 참조). 하지만 대체적인 주제는 불교의 정토왕생사상을 충실하게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안락국’이라는 이름도 정토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원앙부인의 이름 역시 이 이야기의 주요 모티브인 왕생게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왕생게가 한문으로 ‘원왕생원왕생(願往生願往生)’에서 시작되는데, 이것이 원왕새, 원앙새가 되어 원앙부인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문헌에는 사라수대왕이 원앙부인을 원왕새라고 부른 예가 있어 더욱 이런 유추가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전형적인 불교설화이기만 했다면 이처럼 광범위한 이본과 장르로 발전했을 수 있었을까? 다른 본의 <안락국태자전>에는 원앙부인의 수난이 더욱 자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종으로 팔려가 고생한 이야기와 함께 자현장자가 동침을 요구하면서 받게 되는 수난이 소상하게 묘사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꽃’을 소재로 했던 점이다. 특히 경주 기림사의 유래를 담은 사적기에는 원왕부인이 사라수대왕과 꽃밭을 수리하기 위해 떠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사라수대왕은 임정사에서 꽃밭에 물을 길어 나르는 일을 하며 왕생게 노래를 한다. 그리고 원앙부인은 안락국이 얻어온 다섯 종의 꽃을 통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한다.

     

     

    여러 버전의 <안락국태자전>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꽃이 『월인석보』에서 생략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변상도에서는 꽃이 다시 그림으로 등장하고 있는 점이다. 이야기에서는 생략되었지만, 그림으로라도 그 중요한 상징을 지울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라수대왕과 안락국이 만나 서로 안고 울고 있는 것임을 설명하는 부분.

                                              그 뒤로 보석꽃나무가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제주도 무가의 이공본풀이에서는 ‘안락국’이 ‘한락궁이’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그가 꽃으로 복수를 벌이기도 하고 어머니를 살리기도 하는 등 각색이 되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이공(二公)이 ‘꽃뿌리’라고 한다.

     

     


    우리에게 꽃은 무엇이었던가? 바리데기, 자청비가 사람을 살려낸 것이 바로 꽃이었고, 우리설화 속에서 석가와 미륵이 경쟁했던 것도 바로 꽃 피우기였다.

    우리에게 꽃은 그냥 꽃이 아닌 생명의 본원이며, 꽃밭은 생명의 본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몸이 찢어지는 수난을 겪고서 꽃으로 되살아난 원앙부인은 샤머니즘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한 우리 본연의 여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래동화로 출판된 이공본풀이. 꽃으로 어머니를 살려낸 한락궁이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출처: http://blog.daum.net/bombompub/16737306)
     

     

    그런데 <안락국태자경>을 둘러싼 학계의 논쟁이 매우 분분하다. 불교의 설화가 무가에 영향을 준 것인지, 무가의 원형이 불교 설화에 반영된 것인지가 그 주요 논점이다.

    불교의 성격을 강조한 입장은 무가의 특징을 배제하고 싶어 하고, 무가의 원형을 강조하는 입장은 불교적 배경을 너무 쉽게 생략하는 것 같다. 불교와 무속이 어떤 관계를 맺으며 전개되어 왔는지 좀 더 정밀한 연구가 필요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학자들은 이 둘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려 하지만, 오히려 민중들이 이 둘을 서로 포용하면서 이야기의 생명력을 지켜갔던 것 같다. 원앙부인을 살려낸 꽃, 그리고 그림과 한글로 그 이야기가 더 넓게 재현되기를 바란 조선의 여성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로 이들의 것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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