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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회] 제주에선 나무, 돌, 바위가 신이다
    이프 / 2011-11-22 02: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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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신화의 고유성1 
     



    문화는 자연환경에 대한 이해의 정신적, 물질적 표현이다. 자연적 조건과 신화의 형성 그리고 담론으로서의 문화는, 각 문화마다 그것의 보편성과 고유성을 가지게 하면서,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제주도의 자연환경은 제주도의 문화를 읽어내는 가장 중심적이고 기본적인 단초가 된다. 제주도 신앙이 다른 지역과 차이를 보여주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이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세계의 많은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제주신화 역시도 신화의 보편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제주지역만의 고유한 몇 가지 특성을 보여준다.





    1. “정에 어신 정수남이 처럼 굴지 말라” -민중의 삶, 일상과 함께 하는 신들





    우선 제주신화는 어느 신화에도 비길 수 없을 만큼, 인간의 삶과 친밀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리스신화처럼 엄청난 돈을 벌어다 주는 문화적 상품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신 제주신화는 제주사람들의 일상적 삶 속에 아주 가까이 살아 숨 쉬고 있어 주목할 만한 입지를 가지는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나라에 가장 흔한 욕 중의 하나는 ‘개새끼’이다. 그러나 그 흔한 욕이 제주에서 사용된 것은 대중매체가 보급된 후의,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동안 대물림되던 제주에서의 일상적인 욕들은 제주신화에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들이었다.

    제주의 어머니들은 자녀들에게 ‘노일저대구일의 딸’ 처럼 궁뎅이를 빼쭉대며 뽄(멋)만 내면서 나돌아다니지 말라고, ‘정에 어신 정수남이’같이 생각 없이 굴거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흘그생이’같이 흘긋거리지 말라고 늘 가르쳐 왔다.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것은 ‘쇠(소)잡아먹을’ 간새(게으름)였고, 가장 치명적인 욕 중의 하나는 ‘쇠(소)도둑놈의 집안’이었다.





    신을 표상할 때도 신비한 신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후광을 입히는 일은 없다.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 사람의 두개골로 된 술잔을 들고 있는 무시무시한 모습도 아니다. 팔이 여럿이거나, 온 몸이 눈으로 뒤덮이거나, 머리가 여러 개인 신의 모습도 아니다. 엄청난 형태로 신을 모시고, 조각이나 그림으로 우상화, 신비화한 경우도 거의 없다.





    지배, 지혜, 복수, 관능, 질투 등의 개념을 신에게 부여하여 인간의 모든 심성들이 찬양되고, 신과 같은 동일함을 얻으려 했던 그리스와도 다르다. 언제 어디서든 늘 경외되는 대상으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신화의 제우스처럼, 많은 신들을 대표하는 신격도 없다.





    마을에 있는 나무, 큰 돌,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바위가 신이 되었다. 수확이 끝나거나 새해가 열릴 때면 아이들에게 빔을 입히듯, 나무를 신의 몸으로 삼아 거기에 물색을 걸어 고운 옷을 입혔고 지전과 소지를 걸어 풍요로운 농사를 빌었다.  



     

       ▲와흘당의 지전 물색. 나무 가지 끝에 단골들(주민들) 손으로 곱게 꼬아 널은 지전과 물색들.
    과도하게 치장하지 않으면서 단아한 멋을 놓치지 않는다.




    제주의 신들은 굳이 나라를 건국하지 않아도 엄청난 힘을 보여주지 않아도 또 지혜롭지 않아도 신이 될 수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오지도 않는다. 알에서 태어나지도 않고, 오히려 주로 땅에서 솟아난다.





    제주에서 땅은 남다른, 더욱 중요한 곳이었다.

    그 귀한 물도 땅에서 솟아난다. 비가 오면 물이 모두 땅속으로 흘러들어 고도가 낮아져야 흘러나온다. 오름과 오름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걸어 다니다가 저편에서 갑자기 뭔가 쑥- 솟아나오는 모양으로 다른 사람과 마주쳤다. 바람을 막아주고 담과 집을 지어주는 재료들도 땅에서 나온다. 곡식, 물, 사람, 흙과 돌, 모든 소중한 것들이 땅에서 솟아나오니 신들도 땅에서 솟아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일 게다. 





    중요한 것은 21세기인 바로 오늘까지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제주에서는 해마다 입춘날이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입춘굿을 하며, 한 해의 풍농을 기원한다. 음력 정월에는 인간의 명절과 같은 신과세제, 7월 장마가 끝난 뒤에는 장마가 끝난 뒤 곰팡이를 쓸어내는  청소 제의인 마불림제, 10월에는 추수감사제에 해당하는 신만곡대제(新萬穀大祭) 등, 일정한 때가 되면 마을의 본향당에서는 하루 종일 굿을 한다.

    아이들은 마을의 신이 모셔진 당 입구에 모여 공을 차고, 한 구석에는 점심 준비가 한창이다. 마을을 떠나 외국에 가 있던 자손들까지도 잠시 돌아와 마을의 당에 모여 기도를 하고 얘기꽃을 피운다. 





    당을 오가는데, 남녀노소 빈부귀천은 없다. 언제나 당에 가  보면 조금 전 다녀간 듯, 싱싱한 사과가 뒹굴고 있고, 누가 아파서 다녀갔는지 계란껍질이 흩어져 있다. 제주에는 고온다습한 풍토적 영향으로 피부병이 많았고 사람들은 당에 가서 삶은 계란을 올리고 기원을 했다. 미끈한 계란처럼 탐스럽고 매끈한 피부가 되도록 기원하며 올린 제물이었다.

    제우스에게, 일본 천황의 직계로 인식되는 천조대신에게, 그 무시무시한 인도의 시바신에게, 알라신에게, 21세기의 오늘에도 여전히 그러고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제주의 신들은 언제나, 아주 가까이 있다.

     



    ▲제주섬의 용천수. 필자의 어린 시절인 70년대만 해도 물을 얻는 일은 고통스런 일이었다. 많은 아이들이 학교를 파하면 맨 먼저 ‘물 항(물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일을 했다. 물이 귀한 제주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노는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위 왼쪽 . 故 리석 고영일 선생의 작품으로 70년대 밀물 때의 물통을 찍었다.

    위 오른쪽 . 구좌읍 세화리의 물통. 제주섬을 빙둘러 해안선과 만나는 조간대에는 이러한 용천수들이 즐비했다. 마을은 대부분 이 용천수를 중심으로 설촌되었다.

    아래 왼쪽 . 조천읍 조천리의 용천수. 남탕으로 쓰였다.

    아래 오른쪽 . 조천읍 북촌리의 용천수. 주민들이 정성스레 가꾸었고 용도에 따라 각기 시설을 달리했다.

     



     

     

    ▲왼쪽 . 구좌읍 송당마을의 당굿. 당굿은 마을의 대사다.

    오른쪽 . 2009년 음력 정월 초 나흘, 와흘당의 당굿. 당에 모인 마을의 부녀들은 오랜만에 이야기꽃을 피운다. 사진을 찍은 이 날, 마을의 어떤 부녀가 새로 시집 온 며느리를 당에 데리고 와서 절을 시키고, 마을의 풍습과 당예절 등을 가르치고 있었다.

     



     




                                                                                    ▲여러 마을의 당굿. 
                                                                             왼쪽 위 . 음력 정월 초 열사흘에 열리는 송당 본향당 신과세제. 
                                                                             왼쪽 아래. 그 다음 날에 열리는 송당당의 11번째 아들인 조천읍 와흘당의 신과세제. 
                                                                             오른쪽. 음력 2월 14일, 제주시 건입동 칠머리당 영등굿 중 요왕맞이 제차의 장면.


     

     2. ‘일만팔천 신들의 고향’- 척박한 ‘뜬땅’에 사는 사람들이 가지는 소망과 위로





    ‘일만 팔천 신들의 고향’이라고 불려지는 제주도는 무속신앙이 특히 성행한 지역이다. 이처럼 제주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무속이 성행한 것은 자연적 조건으로 인한 생활고도 한 요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제주도의 토양은 대부분 화산회토이다. 곳곳에 화산암반의 노두가 나와 있어 경지는 잘게 나누어졌다. 제주사람들이 ‘뜬땅’이라 부르는, 돌만 가득하고 함수율이 낮은 이 화산회토는 척박함의 상징이었고 부양력이 논농사보다 낮은 밭농사를 하게 했다. 고온다습한 기후로 더욱 빨리 성장하는 잡초와 척박한 땅은 쉴 새 없는 노동과 다량의 거름을 필요로 했다.

     

     

     ▲마농밭의 경작. 제주시 애월읍 중산간의 작지왓(잔돌들이 들어찬 밭이라는 제주어)에 
    촌로가 마늘을 심고 있다. 세계 어디에서 이런 밭, 이런 농사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척박한 땅에 인구부양력이 낮은 밭농사와 빈번한 자연재해, 그리고 섬이라는 조건 속에서 부(富)에 대한 기본적 추구는 제주도의 자연조건에 맞는 수렵, 목축과 어업의 성행을 가져왔다. 많은 자연재해는 곡식의 수확에 지장을 주었고 수확에 대한 불안은 해산물의 채취와 판매를 위해서, 저승길과도 같은 까마득한 바다로 자맥질하게 했다.





    이런 불리한 자연환경 속에서 제주사람들은 ‘통시’ 구조를 이용한 거름의 생산이라는 리싸이클링의 지혜, 덕판배를 만드는 과학성, 억척같은 부지런함과 절약정신과 도전성을 키워냈다. 이와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신을 통하여 위로와 안정을 얻고 살아가는 힘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제주도가 ‘일만팔천 신들의 고향’이 된 것은  이런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려는 정신의 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제주바다의 진정한 주인 해녀
                                                                            왼쪽. 故 만농 홍정표 선생 사진으로 70년대 해녀들의 집단 입수 모습.
                                                                            오른쪽. 강정효. 90년대 구좌읍 해녀들의 미역해경 때 집단 입수 장면.





     

    ▲제주섬의 돗통시. 비위생적인 전근대문화의 상징이었던 제주의 돗통시. 통시 속에 모아진 사람의 인분과 음식쓰레기, 잡초들은 돼지들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훌륭한 거름이 되어 척박한 땅을 살려냈다.(위)

    덕판배. V형의 선체를 만들어 거친 제주해협의 바다 물길을 갈라 치고, 암초가 많은 제주 해안에 배를 대기 위해 덕판을 덧댄 과학적인 배.(아래)




    3.화산섬이라는 자연환경- 생산형태를 따라가는 당





    제주는 환해의 화산섬이다. 한라산은 바다에서부터 완만한 평원을 만들어 내면서 솟아 있다. 이러한 환경은 산간에는 반농반수렵, 중산간에는 반농반목축, 해안에는 반농반어업의 생산형태를 이루게 했고 농경문화와 수렵문화 그리고 해양문화의 특성을 복합적으로 가지게 했다.   





    이러한 생산형태는 신의 직능별, 그리고 당의 공간적 분포와도 일치하여 나타난다. 즉 산간에서 중산간 그리고 해안으로 내려오면서 산신, 농경신, 해신이 분포한다. 사실 당의 시작과 당의 분리, 신의 직능과 같은 신화의 구조들이 이처럼 지역의 생산형태, 생활문화 환경과 밀접하게 나타나며 유지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4. ‘돌랭이’, 소규모의 밭농사 지역- 마을 공동체가 중심인 당





     제주도의 신앙은 마을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는 마을당(본향당) 신앙이 중심을 이룬다. 이는 사당이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한반도부와는 확연히 다른 특징이다.



     

    ▲상명리 느지리 케인틈 할망당. 한림읍 상명리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마을의 본향당이다. 제주에는 마을마다 마을당인 본향당이 있다.


     

     

    한반도부의 논농사 중심의 생산형태는 대토지 소유가 고착화되면서, 대규모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이는 과거 민족, 종족, 부락 중심의 공동체의식을 사라지게 하고 대신 배타적인 혈연공동체로서의 속성을 강화시켰다.

    결국 이것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한 사람이 중심이 되어 다른 혈족과의 물꼬싸움에서 이기고, 혈족 내의 구성원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하는 가부장제와, 반상의 구별, 서자의 차별,  여성 차별 등의 혈통 선별체제로 구체화되었다. 이 가문중심주의는 유교의 형식주의와 결합되면서 조상을 위한 제사와,  효를 절대가치로 표방하는 규범주의로 체질화되어 갔다. 흥부와 바리데기는 그런 지배질서의 이야기다.





    따라서 신앙의 면에서도 배타적인 일족신의 신앙 모습인 사당이 더욱 성행했다. 집을 지으려면 반드시 사당을 먼저 세워야 했고 사당을 설치하지 않는 사대부는 심지어 문책을 당하기도 했다. 서민들도 이를 따라, 가난한 사람들도 대청 모퉁이나 적당한 곳에 사당을 세웠다.

    물론 마을의 산신당이 있기도 하였으나, 이의 제의 역시도 계층별로 이질화되어, 마을의 지도자격이라 할 수 있는 양반들은 참여하지 않고 서민들만 참여함으로써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는 체제로서 기능하는 데 분명한 한계를 가졌다.





    제주도의 밭농사 지역은 논농사 지역과는 달리 경작지가 한 마을 안에서도 화산암반의 분포와 지대의 높낮이, 자갈의 혼합도, 물의 투수상태가 달라진다. 그래서 비교적 동일한 지역 내에 있어도 밭 위치가 조금만 달라지면 진압시기, 제초시기 그리고 파종시기 및 황숙기도 달라진다.

    그래서 막연히 때를 기다리기보다는 어떤 밭이 가지는 개성에 따라 ‘수눌어가며 그 밭에 가장 알맞은 때에’, 재빨리 농사일을 처리해야 했다. 이런 자립에의 필요가 공동체의 협업 속에서 강한 공동체의식을 만들어 내었다.

    반면 한라산 무주공야의 용암평원은 자신이 노력만 하면 자기 소유가 될 수 있었고, 조각조각 분산된 토지는 대토지의 소유를 막아 공동체 내의 갈등을 상대적으로 줄였다.





    평등한 개성의 구현과 공동체의식의 요구는 신앙의 면에서도 제주도를 매우 특별한 지역으로 만들어 놓았다. 사당은 심지어 마을의 당으로 바꿔지기도 하였으며, 마을의 형성과 함께 시작되는 본향당은 마을의 중심이면서, 누구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제의에 참여하는 진정한 공동체의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조각보를 닮은 제주의 밭들. 구좌읍 김녕리 일대의 경작지를 찍은 항공사진. 이렇게 조각조각난 토지는
    소가족의 개체적 삶을 살아가게 했고, 제 때에 수눌어가며 일을 해야 하는 척박한 땅은 공동체의식을 강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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