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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회] 선묘의 저 깊은 뿌리는 무엇인가?
    조승미 / 2011-11-15 04:11:24

  • 얼마 전 딸아이와 공예 전시장에 다녀왔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가을 아침, 가까운 거리도 아닌 청주까지 한달음에 달려갈 정도로 우리 모녀는 요즘 공예에 필(feel)이 꽂혀있다. 어려서부터 손으로 뭔가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나를 닮아, 내 딸도 뭐든지 직접 해 보려는 의지가 막강하다. 그리하여 갖가지 공예 체험실을 다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전시실을 둘러 볼 수 있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빛나는 수많은 공예품이 가득했다.

    그러던 중 한 전시실에서 내 눈을 확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하얀 나무가 천장에 매달려 있는 작품이었는데, 아름다운 조명이 집중적으로 비추어진 곳은 다름 아닌 나무의 뿌리였다. 마치 사람들에게 뿌리를 내보이기 위해 나무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린 듯한 느낌의 작품이었다. (사진을 찍을 수 없게 해서 그 모습을 소개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 

     


                                             ▲비슷한 이미지의 나무뿌리 그림. (출처:http://www.blogger-index.com)

     

    익숙한 형태가 아니라서였을까? 공중에 떠 있는 나무의 뿌리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더구나 어두운 전시실 한 켠에서 신비로운 조명을 받고 있어서인지 영적인 기운까지 내품는 것처럼 느껴졌다. 혼자 넋을 놓고 서서 한참을 바라보니 문득, 나무가 위로 들려 올려진 것이 아니라, 내가 전등을 들고 땅 속으로 내려가 그 뿌리를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높이의 시선에서 뿌리를 바라보는 색다른 경험은 생각보다 큰 감동을 주었다.

    뿌리의 재조명!

    글자 그대로 뿌리에 ‘조명’을 비춤으로 해서 시각적으로 강력한 메시지를 일깨운 것 같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무성한 나무 가지의 모습이 실은 모두 뿌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다시금 기억하게 했다. 또한 이미지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하였다. ‘스토리story’가 오랜 시간을 흐르게 하는 힘을 갖는다면, ‘이미지image’는 순간의 마음을 깨우는 번개와 같은 힘을 갖는 것인지 모른다.

    뿌리의 이미지를 통해 깨어난 영적인 마음을 부여안고 돌아와, 다시 스토리의 여행을 이어 가보기로 한다. 선묘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선묘의 뿌리는 무엇인가?



    여러 개의 뿌리가 선묘라고 하는 하나의 열매를 맺어



    지난 글에서는 선묘(善妙)가 용(龍)이 되어 의상대사를 따르고 부석사의 수호신이 된 사연을 소개했었다. 선묘는 의상의 신라 귀국과 부석사 창건이라는 역사적인 일을 통해 느닷없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몇 가지 면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우선, 여성형 용의 존재도 거의 유례가 없는 경우이고, 두 번째로는 당나라에서 신라로 와서 다시 일본으로 전파되는 등 매우 국제적인 성격을 보이는 것도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선묘는 여러 가지 토착신앙이 복합적으로 결부된 점이 특이하다.

    선묘는 하나의 여신으로 태어났지만, 그녀와 결부된 설화나 신앙문화들은 모두 여러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여러 개의 뿌리가 선묘라고 하는 하나의 열매를 맺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선묘의 뿌리를 하나씩 더듬어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선묘는 의상이 신라로 귀국할 때는 풍랑으로부터 항해자를 보호하는 바다의 수호여신의 모습을 보였다. 이런 형태는 의상 당시의 신앙이라기보다는 해상활동이 활발했던 후대 장보고의 시절에 형성된 (혹은 확산된) 여신신앙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그래서 선묘의 탄생 역시 이 시절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의상의 낙산사가 중창된 것도 이 무렵이라고 한다. 의상과 연관된 관음과 선묘의 설화가 총체적으로 이때 만들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상 당시에 해안가 동굴에서 관음을 친견하거나 선묘설화가 탄생했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선묘는 이어서 신라의 여러 토착신앙과 연결된 형태로 나타났다. 부석사 창건설화에서도 언급했듯이, 선묘는 커다란 돌을 떨어뜨리는 것을 통해 사찰의 수호신으로서의 위용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물을 관장하는 용(龍)이 비나 번개를 통해 큰 돌을 떨어뜨릴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진 신격으로 신앙되었음을 말한다.

    한편, 그때 떨어졌다고 전해지는 큰 돌, 부석(浮石)은 그 자체가 신앙대상이 되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전설의 돌이기 때문에 보존된 측면도 있겠지만, 큰 돌 자체가 신성시되어 왔던 신앙전통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부석사의 옛 명칭은 선달사(善達寺)였는데, 이것은 이 돌의 형태(선 돌)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추정되며, 그만큼 이 돌이 그 사찰을 오랫동안 대표하는 상징물이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선묘는 다시 용의 형태로 만들어져서 부석사 경내 주요공간에 배치되기도 했다. 소위 전설의 석룡(石龍)이 그것인데, 머리 부분은 무량수전의 아미타불 좌대 아래에 위치해 있고, 꼬리는 전각 앞마당 석등 부분까지 이어져 있다고 전한다. 전체 길이 10m 정도로 최근 <역사스페셜>에서 탐사기구로 이 석물의 존재를 확인하기도 했다. 사찰 조성에 있어서 이 같은 유례가 없는 것을 보아 부석사 지하의 석룡이 선묘설화를 반영한 것임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부석사 지하에 묻혀 있다는 석룡사진
     

    한편으로 선묘는 우물신앙과도 결부되어 있었다. 부석사 동쪽에는 선묘정(善妙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시대 어느 해 가뭄이 들어 이 선묘정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 기록이 전해진다. 우물이란 어떤 곳인가? 인간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되는 물을 얻는 생활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용이 살고 있다는 신화의 공간이기도 했다. 가뭄은 과거 최고의 자연재난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 고난을 맞아 용신에게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신앙과 그 의례가 조선조까지 이어졌음을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이것이 불교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사찰 내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었음을 알 수 있다.

    우물은 더 고대로 올라가면 신라의 시조들, 알영부인과 박혁거세가 탄생했던 곳으로서, 오랫동안 제사가 모셔지면서 신성시되었던 곳이었다.



    우리 땅에서 선묘는 이렇듯 큰 돌에 대한 신앙, 용신앙, 우물신앙 등과 연결되어 부석사 내에서 이어져 오고 있었다. 어쩌면 기존의 신앙문화가 선묘설화를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선묘와 중국 관음설화의 주인공인 묘선공주의 관계



    그런데 여전히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 ‘선묘'라는 이 여신의 이름이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하는 것이다. 문헌상에서는 어찌 중국의 <송고승전>에서만 그 이름이 한번 등장하고 말았는지, 선묘 자체의 뿌리는 무엇인지 미스터리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탐색을 시도한 연구가 있다. 선묘가 중국의 관음설화의 주인공인 묘선공주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한 것이 그것이다. (조영록, 동아시아 불교교류사 연구-남종선의 도입과 관음설화의 전개, 동국대출판부)

    재미있는 것은 ‘선묘(善妙)’라는 이름이 묘선(妙善)의 이름을 뒤집은 형태라는 점인데,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는 면이다. 역사적인 논증 내용은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묘선공주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때는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머나먼 과거, 장소 역시 어느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라의 이야기이다. 시공간이 불분명하다는 것이 왠지 오래된 신화임을 암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실제 이 이야기가 알려진 계기는 당나라 초기 남산율종(南山律宗)의 도선(道宣, 597-667)이라는 승려가 천신으로부터 얻어들은 것을 제자가 기록했다고 한다. 신화를 뿌리로 한 것이 분명하다.



    어느 나라의 왕, 장왕(庄王)은 세 딸을 두었다. 많은 신화에서 그렇듯 주인공은 역시 막내딸이다. 막내공주의 이름이 묘선(妙善). 다른 두 딸은 아버지 말씀대로 시집을 갔으나, 막내 묘선은 뜻을 어기고 향산(香山)에 입산수도하여 대비(大悲)보살 즉, 관세음보살이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을 병에 걸리자, 묘선공주는 수안(手眼) 즉 손과 눈을 떼주어 아버지를 살려내었다고 한다.

     

     

                                                              ▲묘선공주 일대기를 표현한 중국 사찰의 한 그림
     

     

    스토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손과 눈을 떼주었다는 것은 불교적인 각색인 것으로 보인다. 관세음보살이 천수천안이므로 그 내용을 설화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후대에는 내용이 더 보충되기도 하였는데, 장왕의 이름도 묘선의 묘(妙)를 부가하여 묘장왕이 되기도 하였고, 다른 딸들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한 희생을 거절했다는 것도 부가되었다. 묘선이 소식을 듣고 손과 눈을 잘라 보내니 아버지가 살아나고, 나중에 쾌유하여 부녀가 상봉을 하는데 묘선이 손과 눈이 없어 아버지가 탄식하다가 다시 완전한 모습으로 되살아났다는 해피한 결말버전이 널리 유포되었다.



    중국에 관음신앙이 대중화되면서 관세음보살의 전생이 중국의 한 여성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발생한 것이다. 관음의 여신화 과정에서 묘선공주 설화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한 여성이 도를 닦아 보살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당시 사회적으로 널리 유포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향산사에서 이 이야기를 들었던 한 관료는 비석을 세워 이것을 비문으로 기록하게 하였던 것이다. 훗날 여러 문헌으로 재탄생하여 묘선설화는 민간에 더욱 깊숙이 알려져 내려 왔다.

     

     

     

                                                                       ▲향산사의 묘선 대비보살 비문


     

    묘선설화와 바리데기



    그런데 묘선공주 설화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스토리가 아니던가? 그렇다. 바로 우리의 무조(巫祖) 바리데기 신화와 매우 비슷한 구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중국 대혜사(大慧寺)<관음대사전변상(觀音大士傳變相)>묘선공주도

     

    묘선설화와 바리데기 신화의 유사성을 가장 먼저 지적한 사람은 한 서양의 한국학자였다.  

    (Clark W. Sorensen, 1988, 「Woman and the Problem of Filial Piety In Traditional China and Korea」, 『한국학의 과제와 전망』)

    사실 그의 논문은 두 스토리의 차이점에 보다 주안점을 두면서 이것이 중국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를 반영함을 논증하는 것이었다. 그는 왜 한국의 바리데기는 결혼을 해서 비로소 효를 이루고, 중국의 묘선은 결혼을 거부한 형태로 아버지를 살리는가의 질문에서 시작하여 두 나라 가족문화의 차이를 흥미롭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더 관심이 있는 것은 두 여신 신화의 유사성이다. 두 신화는 모두 아들이 없는 한 나라의 왕의 막내딸이 주인공이며, 이들은 모두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을 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들이 아버지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간주되며, 이들의 결단 혹은 모진 고난을 통해 결국 아버지를 살린다는 결말을 갖고 있다. 효를 주제로 하면서 동시에 여성의 희생이 극단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점도 공통적이다. 

    (소렌슨은 두 신화가 모두 죽음의 의례와 관련이 있다고 했는데 이 의견에는 좀 동의하기 어려운 듯하다. 바리데기는 분명 그런 성격이 있지만, 묘선은 그녀가 관음보살이 되었다고 해도, 이 설화에서 관음은 사후세계인 아미타 정토와 특히 관련된 면을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두 신화가 모두 유사한 젠더 갈등과 구조적 모순을 담고 있는 면도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두 여신의 이야기가 같은 뿌리의 신화를 반영할 수도 있는 가능성에 있지 않을까? 두 나라의 사회문화 구조가 유사하여 우연히 비슷한 신화를 양산해 냈다고 하기 보다는, 보다 오래 전의 하나의 신화적 원형이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원형의 여신신화도 여성주인공의 희생을 그렸는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부계전승의 갈등상황을 말하는 후대의 각색버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야기가 너무 멀리 그리고 너무 심각하게 비약되었지만, 선묘의 뿌리 탐색은 이처럼 많은 이야기와 만나는 일이 되었다. 선묘는 당시 여러 토착신앙을 하나의 설화로 묶을 수 있게 했던 새로운 캐릭터 같은 역할을 한 것 같다. 하지만 신생 여신 선묘의 뿌리는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던 여신 조상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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