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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회] 미노아 크레타는 공동협력사회의 역사적 모델
    김신명숙 / 2011-10-25 01:21:01

  • 고니아는 바닷가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었다. 보존상태가 매우 좋아 마을의 구성이 어떠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한다. 2만5천 평방미터의 유적지에는 3천5백년전 미노아인들이 걸어 다녔던 돌로 포장된 골목길이며 70개 정도의 집터들, 마을 공동의 신전, 작은 규모의 성소(흔히 ‘궁전’이라고 하는) 등이 수천년의 세월을 견뎌낸 흔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추정 인구는 4천명 정도.

    “자, 이게 실제 미노아 마을길이에요”

    앞장 서 걷던 크리스트는 눈 앞에 이어져 있는 좁은 돌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을을 빙 둘러싸며, 혹은 내부에서 구획을 가르며 이어져 있는 정다운 돌길은 마차는 다닐 수 없으나 당나귀는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넓이였다. 길에 하수시설도 잘 돼 있다는데 크리스트에 의하면 고니아의 마을 모습은 현재 크레타의 산골마을들과 별로 다를 게 없다고 한다.

    집들은 2층 정도의 작은 규모로 밀집해 있었다는데 현재는 지하나 1층 밑부분만 남아 있어 전체적인 구조가 어땠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단다. 하지만 미노아 인들이 남겨놓은 집 모형들이 있어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는 있다.



    이게 무려 4천년 전 사람들이 살았던 집?



    우리는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에서 보았던 작은 미노아 집 모형을 떠올렸다. 진흙으로 만들어진 2층구조의 그 모형은 창문과 발코니, 계단과 큰 기둥이 있는 거실 등을 갖춘 멋진 모습이었다. 거의 4천년전 사람들이 살았던 집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미노아 집들에 대한 정보는 크노소스에서 발견된 작은 모형조각들 (BC 17세기)로부터도 얻을 수 있다. 2층 혹은 3층 구조로 된 단순한 모양의 집들이 대체로 지붕위에 작은 방을 얹고 있는데 그 방은 아마도 여름에 더위를 피하기 위한 침실로 사용됐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미노아 집 모형. 왼편 아래에 진열된 것은 집 모형조각들(위). 확대해서 본 집 모형조각들(아래) 
      

                                 


    고니아의 집들은 많은 경우 길에서 몇 개의 계단을 올라가 입구로 들어가게 돼 있으며 골조는 나무로 하고 벽 아래쪽은 돌, 위는 흙벽돌로 쌓았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이 주로 종사했던 일은 농업 어업 가축사육 수공업 등이었으며 목수와 도예공, 대장장이 등의 작업장도 발굴됐다. 와인 압착기나 올리브기름 압착기, 직조기 부품들, 요리도구, 각종 그릇과 용기들 같은 일상생활의 중요한 용품들도 발굴됐다.

    수천년의 세월을 느끼며 돌길을 따라 올라간 우리가 멈춘 곳은 마을의 가장 크고 화려한 건물, 즉 흔히 궁전이라고 부르는 성소(상당히 작은 크노소스나 파이스토스라고 생각하면 됨)였다. 성소는 언덕 꼭대기,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서쪽에는 돌이 깔린 작은 뜰이 있고 남쪽에는 꽤 큰 야외뜰이 있는데 그 뜰과 성소가 만나는 곳에 L자형의 3층으로 된 넓은 계단이 남아 있었다. 분명히 크노소스의 극장터를 생각나게 하는 구조였다.

    야외뜰은 의례용 장소나 마을 시장터로 사용됐을 것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성소 지붕에서 떨어졌을 게 분명한 돌로 된 ‘성스럽게 하는 뿔’이 나왔다고 한다. 또 성소에서 청동 양날도끼를 비롯한 의례용품들과 큰 저장용기들도 발굴됐다. 성소 남쪽 벽에는 양날도끼 상징이 새겨져 있어 이곳이 미노아 마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었다.


     

      
     
    ▲고니아 성소 유적터(좌)와 복원도(우)


     

    성소를 둘러 본 우리는 야외뜰 한쪽 편에 있는 작은 직사각형의 케르노스 돌 주위에 모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살았던 미노아인들을 생각하며 케르노스에 물을 부은 후 가지고 온 견과류와 과일 등으로 장식하고 간단한 리츄얼을 했다.



    생명의 근원을 축복할 때

    우리도 축복받는다네

     

     

                                                                          ▲우리가 케르노스 돌에 꾸민 제단
     


    간단한 리듬의 노래를 반복해 부르며 우리는 성소 북쪽에 떨어져 있는 마을 공동의 신전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꽤 이름이 있는 유적지여서 그런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성소 남쪽 벽이 있는 구역의 한 길모퉁이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숭배대상을 만나게 됐다. 바로 ‘성스런 돌’이었다.



    “이 돌은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어요”



    산 모양의 정원석같이 생긴 꽤 큰 그 돌은 돌길 한 켠에 의도적으로 세워져 있었는데 옆에 세워진 안내문에 의하면 미노아 시대 인장들(seals)에 그같은 돌 숭배를 묘사한 장면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근동에서처럼 이런 돌이 신의 재현물로서 숭배된 것같다는 설명이었다. 크리스트는 우리들에게 그 돌을 만져보라고 했다.
    “이 돌은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어요. 치유의 힘이 있는 돌
    (healing stone)이니 한번 만져보세요"

    안내판에 소개된 인장의 그림을 보니 풍만한 젊은 여자가 무릎을 꿇은 채 상체를 성스런 돌에 기대고 있었다. 마치 엄마 품에 기대는 아이처럼.

    하긴 돌이든 나무든 강물이든 달이든 자연이 주는 위로와 치유의 힘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신성한 치유의 돌(좌) 안내판에 그려진 인장 그림(우)
     
     ▲돌벽에 새겨진 양날도끼 상징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했을 거라는 신전은 생각보다 많이 작았다. 보통 방 하나 정도의 크기였고 남쪽 벽에 벤치 모양의 돌로 된 제단이 있었다. 그런데 이 신전은 엄격히 말하면 미노아 시대가 아니라 미케네인이 크레타를 정복한 후(1400-1200 BC)에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미케네인들이 여신 숭배를 비롯한 미노아 사회의 문화를 받아들였으므로 신전에서 미노아 여신을 느끼는 것이 그리 어색할 건 없었다.

    이 신전에서는 몸에 뱀이 감긴 채 두 팔을 들고 서 있는 여신상 3개(크노소스 뱀 여신상에 비하면 기술과 예술성이 크게 떨어지는), 공물을 놓는 테이블, 뱀 장식과 황소뿔이 붙어 있는 램프 받침대 3개 등이 발굴됐다고 한다. 해리엇 보이드는 이 신전의 발굴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1901년 고니아에서 신전이 발굴되자 엄청난 관심이 쏟아졌다. 그때까지 훼손되지 않은 채 발굴된 미노아 혹은 미케네 신전이 없었기 때문이다....신전 한 구석에서는 다수의 숭배물들(cult objects)이 나왔다. 거친 진흙으로 만든, 예술적 기예라고는 없는 조악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들은 위대한 여신(Great Goddess)이 크노소스 궁에서와 같이 고니아의 신전에서도 숭배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신상들은 뱀에 감겨 있는 모습이었고 비둘기상과 성스럽게 하는 뿔, 의례용 단지들도 있었다. 양날도끼가 장식된 토기조각들도 출토됐다”

     



    ▲신전  전경
     
     
      
    ▲신전에서 발굴된 뱀 여신상(좌)과 램프 받침대(우)


     

    가부장제의 지배욕에 물들기 전 쾌활함과 강인함으로 빛나는 남성



    나는 신전 앞에서 미노아인들이 이곳에 와 여신상을 보며 의례를 올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때까지 본 프레스코 화들과 유물들을 토대로.

    예쁜 띠를 두른 검고 긴 머리에 길고 화려한 치마를 입고 가슴을 자랑스레 강조한 여성과 아직 가부장제의 지배욕에 물들기 전 쾌활함과 강인함으로 빛나는 남성. 지금과는 질적으로 달랐을 여남관계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섹슈얼리티를 자유롭고 건강하게 발산하면서 신전 앞에서 그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그려보는 일은 흥미로웠다.

     

     

                                                              ▲이집트에 간 미노아 무역상들(좌)과 미노아 여인들
     


    수천년전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높은 수준을 이룩한 미노아 예술이 보여주는 미노아인들의 삶은 아름답고 활기에 차 있으며, 풍요로운 삶을 선사해주는 자연에 대한 사랑과 감사로 충만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평화롭다. 미노아 그림들은 다채로운 자연의 아름다움과 일상적인 삶의 기쁨을 주로 묘사할 뿐 단 한 장면도 전쟁을 묘사하거나 전쟁에 승리한 왕을 찬양하거나 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바로 이 점이 미노아 문명이 동시대 다른 문명들-이집트 문명이나 바빌로니아 문명 등-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이다. 다른 문명들에서 이시스나 이난나 등 위대한 여신들이 힘을 잃어가던 것과 반대로 여신이 계속 중심적 신으로 숭배되었다는 점과 함께. 

    리안 아이슬러는 『성배와 칼』에서 미노아 시대 크레타에서 자신이 이상적으로 제시하는 ‘공동협력사회 모델partnership model of society'의 역사적 사례를 본다.



    “크레타에서는 권력이 물리적인 힘을 휘두르거나 위협을 가해 공포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남성지배자인 엘리트에게 복종을 강요하기보다는 모성의 책임감과 동일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이것이 공동협력사회를 특징짓는 권력의 정의다. 이 사회에서는 여성 그리고 여성과 결부된 특성을 평가절하하지 않는다. 이런 영향으로 크레타는 사회적 기술적 진보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진화할 수 있었다”



    신전을 마지막으로 고니아 유적지에서 나온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어촌마을 모클로스(Mochlos)였다. 다시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는 것인데 처음 가보는 어촌마을인데다 ‘조용한 곳’이라는 설명에 기대감이 더욱 부풀어 올랐다.

    크레타의 어촌은 내게 어떤 모습을 펼쳐 보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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