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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회] 가부장 종교의 폭력성, 알려져야 한다
    이프 / 2011-10-18 04:09:26

  • 매트는 그 해 봄 묵묵히 나를 옷가게까지 운전해서 데려다 주곤 했다. 여름이 되자 매트가 자기가 일하는 도서관의 복사실에서 학생직원을 뽑는다고 말해 주었다. 자기가 복사실 고용자에게 이미 내 말을 해 두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옷가게 일을 그만두고 도서관 복사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클레몬트 도서관은 인근 6개의 단과대학 학생들과 신학교 학생들이 붐비는 매우 크고 안락한 장소였다. 이 도서관에 한국 유학생으로는 내가 처음으로 고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2-3년 지나자 다른 부서에서 고용된 다른 한국인 학생들도 보게 되었다.



    나는 가능하면 많은 시간을 할당받으려고 열심히 일했다. 많아야 주당 20시간을 넘지 않는 시간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학기에는 도서관의 다른 부서에서도 일하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복사실 일을 그만두고 또 다른 부서를 찾아서 계속 일을 하였다. 그 후부터 나는 항상 도서관의 두 부서에서 일함으로써 항상 거의 20시간을 꽉 채워서 일했다. 이렇게 도서관 일은 내가 졸업을 할 때까지 아니 졸업을 한 이후 6개월 정도 계속되었다. 


     

    도서관의 일은 내가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는 동안 더 좋을 수 없는 부업이었다. 내가 일하는 부서는 주로 밤 시간에 도서관 사무실에 있으면서 문제가 있다는 제보를 받으면 그것에 대처하고 정기적으로 도서관을 순회하는 일을 맡은 곳이었다. 혼자 일하게 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하는 데 써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그런 일이었다. 옷가게에 비하면 이것은 천국의 일이었다!

     


    거기다가 보통 자정 혹은 새벽 1시까지 일을 하기 때문에 저녁시간을 공부에 활용할 수 있었다. 도서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아닌가? 거의 저녁마다 내 마음은 조용히 춤을 추고 있었다. 책으로 꽉 찬 공간에서 나는 내 박사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내 정신은 깊은 밤 도서관의 환한 불빛 아래서 되살아나고, 나는 수많은 책을 읽고 논문을 썼다. 그리고 연구에 필요한 도움을 누구에게서 어떻게 받는지도 모두 알게 되었다. 그렇게 7년이 지나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는 대학원 공부하는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도 수업교재로 쓰이는 책을 산 적이 거의 없다. 대학교재는 보통 근교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주는 제도를 이용했고, 연구관련 책은 도서관간 대출제도를 이용해서 미국과 캐나다 도서관 어느 구석에 꽂혀있더라도 내 손안으로 가져오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필요한 부분은 복사를 해서 사용했다.

     

     

     



    나의 노력과 장학금과 도움의 손길로 살았다



    첫 3년 동안 한국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3년간은 여름방학, 겨울방학 때도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공부했다. 여름방학 때는 도서관 이외에도 더 일거리를 찾았다. 내가 찾은 또 다른 일은 큰 쇼핑몰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손수레 가게였다. 거기서 악세사리 등 잡다한 것을 팔았는데 주인은 암만 봐도 내가 그 일을 잘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그런 고생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다. 그것은 내가 상상도 안 해 본 일이었다.



    올해 여름까지 지난 14년 간 나는 미용실에 두 번 정도 갔다. 그리고 옷은 보통 남이 버린 옷을 주워서 입거나 중고가게에서 샀다. 뭐 이런 일들은 나에게 특별한 게 아니었다. 메리놀 수녀로 살면서 나는 동료들과 서로 머리를 잘라 주었고, 기부로 들어오는 옷을 골라 입으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나는 내가 사회적인 관례를 거슬러서도 얼마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는지 내 정신을 시험하고 있었다. 비록 수녀회는 떠났지만 외적인 형태를 떠나서 내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다시 한 번 더 실현해 보고 싶은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것들은 천주교 수녀로 살면서 다 해보았는데, 머리는 완전히 밀어보지 못했다. 머리를 깎는 일은 꼭 불자가 되어야 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 매트도 종종 머리를 빡빡 깎곤 했었기에 어느 날 나도 머리를 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매트가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해서, 나는 즉시 그에게 내 머리를 깎게 했다. 그때는 겨울이라서 모자를 많이 쓰고 다녔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 크게 띄지는 않았지만, 나를 알아보는 학과 학생들도 별말 없이 지나갔다. 그만큼 미국사회는 개인적인 공간이 넓어서 편했다!   

     

     

     



    두 번째 해에는 학교에서 장학금이라고 조금 돈이 나왔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학생들에게 나오는 보조금이었다. 그래서 등록금을 줄이려고 더 적은 수의 과목을 신청했다. 원래 유학생들은 부분등록이 가능하지 않았으나, 나는 석사학위 예정자로 지정되니 그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진짜 운은 그 다음해 봄, 나의 수호천사 백만장자 기부가 마아고 골드스미스를 통해서 전액 장학금을 받은 것이었다. 그해 미국 대통령 부시가 부자들에게 감세 혜택을 주자, 마아고는 그것을 나에게 주기를 원했고 학교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나에게 전액 장학금을 주었다.



    그렇게 나는 유학생활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많은 학비와 생활비를 다 충당할 수 없었다. 나를 재정적으로 도와주신 또 한분이 계신데, 그것은 한국에 계신 한 천주교 신부님이었다. 이분은 나에게 희망을 거신 듯 나를 도와주셨다. 그분이 처음에 내가 얼마나 뼛속깊이 천주교 변절자인가 이해를 하셨는지 알 길이 없다. 그 분은 내가 여성운동이 반그리스도적이라고 부르짖은 메리 데일리의 『하나님 아버지를 넘어서』의 번역자라는 것을 아시고 나를 도와 주셨다. 사실 곧 바로 번역한 『교회와 제 2의 성』이 출판사를 쉽게 찾은 것도 이분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나는 클레몬트 대학원에서 기독교는 물론 가부장종교를 송두리째 비판하는 급진적 여성주의를 공부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나는 그분이 기대했을지도 모를 일, 즉 직접적으로 천주교 여성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결과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다 갚지 못할 빚을 졌다. 하지만 내가 빚을 졌다는 사실이 내 입을 막지는 못한다.



    그들은 공범자이다

     

     

    사실 올해 옛날 천주교 대학생회 신앙생활을 하던 시절 나를 선배언니라고 부르며 따랐던 사람이 나를 “천주교 변절자”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근 20년 만에 만났는데 내가 더 이상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그 사실이 그 친구에게 가장 돋보인 것 같다.

    표준국어 대사전에서 변절자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았다. “절개나 지조를 지키지 않고 그 마음을 바꾼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무엇에 절개나 지조를 지켜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한 약속은 무효이다. 나는 애초부터 나 자신에게 절개와 지조를 지키길 원했다.

     


    그런데 그 절개나 지조가 지켜야 할 가치가 없음을 알고서도 계속 맹서를 하고 사는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들은 공범자이다.

    내가 기독교에서 손을 씻은 일은 여신과 여성을 살해하고 짓밟고 선 가부장 종교에 대한 너무나 당연한 행위였다. 나는 공범자가 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기독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불행하게도 아직도 한국사회에 가부장종교의 폭력성이 폭로되지 않았다. 가부장종교는 아직도 피로 물든 발톱을 감추고 일그러진 얼굴로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다. 여신을 강간하고 살해한 아버지신과 아들의 품으로 오라고. 거기엔 평화도, 사랑도, 행복도 없다.



    제도 종교의 옷을 입고 억눌린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삶의 근거지가 무너지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성직자, 승려, 목회자들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선행이 제도 종교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태양을 가리고 일 년에 몇 번 전기불을 주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서 태양을 가린 종교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통회할지어다.  
    사람들은 불의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재벌이 얼마간 사회에다 기부를 하면서 선심을 쓰면 위선자라고 지적할 줄은 알아도, 가부장적 종교가 모든 사람들에게서 태양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도 무지하다. 가부장제는 우리 하늘에서 물러나라! 

     
     

     



    내 졸업식은 나에게는 생존과 번영의 축하식이었다. 졸업장 그 자체보다 나의 급진적 여성주의를 지적으로 추구하는 여정이 한 단락 맺어졌다는 사실에서, 또 일 년치 학비만 가지고 유학왔던 내가 기적과 같이 석박사 과정을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에서 나는 감사하고 기뻐하였다. 나는 그때 이미 학계에서는 유일한 마고연구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단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마고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도 내 생활의 구차함은 계속되었지만 그것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중도에서 포기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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