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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회] 한국인들은 언제 종교를 넘어 영성을 찾을 수 있을까?
    이프 / 2011-10-11 03:46:09

  • 우리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가 ‘어떻게 생계를 해결하면서 하고 싶은 일들을 했는가’ 일 것이다. 내가 대학원 공부를 마치는 동안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였는가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 전후의 이야기에 비하면 비교적 단순하다. 여기서부터 어떻게 나의 꿈을 성취하면서 먹고 사는 일이 가능했는가를 풀어보기로 하자.



    내가 입학하던 해 클레몬트 대학원의 학비는 하버드 대학 학비보다 더 비쌌다. 그런데 클레몬트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요구하는 서류는 입학신청서 이외에 일 년치 학비를 증명하는 은행계좌였다. 나는 정확히 1년치 학비만 가지고 있었다. 수녀원을 나온 후 과천에 살면서 영어강사를 해서 저금한 3천만 원, 그것이 1년치 학비였고 (생활비는 포함되지 않았다) 또  나의 전재산이었다.



    나는 그때 남에게 손 벌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선택해 온 길, 그리고 내가 선택하는 길에 대한 책임감 때문었다. 가부장제가 싫다고 거부하면서, 급진적 여성주의자의 길을 가고자 하는 내가 남에게 의지한다는 일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은 물론 가족들 아무에게도 더 이상 신세를 지는 것이 싫었다.



    나는 1년 뒤의 학비를 걱정하지 않았다. 아니, 첫 1년 동안의 생활비도 걱정하지 않았다. 명확한 것은 내가 한국여성으로서 문화적, 역사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종교여성학을 공부할 기회가 왔다는 것뿐이었다. 내가 유학을 시작하기 위한 완벽한 준비가 갖추어졌던 것이다! 일 년을 내다 볼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등을 기댈 사람도 없었고 신도 찾지 않았다. 그리고 현금으로 딱 100불만 지갑에 넣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던 것이다.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인종차별주의 백인사회에서 유학생이 되는 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유학비도 없이 막연한 마음으로 유학을 떠나도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유학비가 있어도 미국이나 서양에 유학하려는 사람들은 사전에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점들이 많다. 영어가 미숙하면 불행으로 들어가는 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영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백인중심의 문화권에서 인종차별을 이겨야 하고, 교수들의 압력을 이겨야 하고, 또 외로움을 이길 힘이 있어야 한다. 영어를 잘해도 외부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늘 소외와 차별의 대상이 된다. 

     


    일단 미국이라는 나라는 백인이 아닌 이상 방문자들을 거지, 하급인간 취급한다. 미국 대사관에서 인터뷰를 받을 때 그리고 미국 공항에 입국해서 절차를 밟을 때마다 나는 매우 혹독한 인종차별주의를 경험하곤 했다. 거기다가 이제 대다수의 공항직원들은 흑인 등의 유색인종들이다. 이제는 이들이 백인나라의 말단 업무를 처리하면서 백인들 행세를 한다. 경멸과 거만함, 그리고 불친절이 그들의 타인종에 대한 태도이다.



    인종차별을 증오범죄로 인정하는 미국에서 이런 행위는 증거를 잡을 수 없이 교묘하게 간접적으로 일어난다. 클레몬트는 백인들의 도시이다. 거기에는 인종차별주의적 풍토가 공기 중에 서려있다. 은행, 우체국, 식당, 상점 어디를 가도 종업원들이 주는 멸시와 불친절함의 눈길과 말투를 피할 수가 없다. 나는 그런 곳에서 사람들과 접촉할 때마다 감당하기 어려운 불쾌함을 느끼곤 했다. 

     

     

                                                   ▲백인우월주의를 반대하는 아시아여성 (출처:reappropriate.com)
     


    멕시코인들의 타동네로 이사를 하고 나니, 그 전에 백인차별주의 압력이 얼마나 심했는지 더 알 수 있다. 그런 사람들, 그런 장소, 사건을 가급적이면 피해서 사는 것이 상책이다. 지금은 또 대처 방법을 많이 터득해서 그런 일을 당해도 직접적으로 크게 마음이 많이 상하지 않는다. 바로 나한테 일이 생기면 직접 싸워서 해결한다. 학계나 교직에서 일어나는 일은 정치적으로 싸운다.



    미국이 붕괴한다는 소문은 이제 비밀이 아니다. 미국 뿐 아니라 타자를 자기가 정복해서 복종시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나라, 집단, 조직들은 모두 붕괴할 것이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지도적 역량이 없기 때문이다. 겸손한 사람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자연과 타인을 존중하여 더 큰 행복과 발전을 꾀하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그 질서를 찾아서 지금 이 세계가 요동을 치고 있지 않은가?



    물론 한국인이 미국으로 와서 누리는 자유도 있다. 일상생활에서 남녀구별이 덜한 문화 속에서 특히 여성들이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남자들도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화장을 안 하고 옷을 잘 차려 입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곳이다. 공동체의 중력이 약하니 사람들은 친구와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개인관계를 성숙시키는 언어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다. 실용주의적 사고와 상식이 통한다.



    나는 백인들이 구성원의 80%를 차지하는 메리놀회의 수녀로 살면서 이런 좋은 점들을 경험하였고 일부는 나의 것으로 삼았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미국사회에 대한 특별한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크게 실망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이루고자 했던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에 유학생활에 적응하고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박사학위 공부는 나에게 마고를 발견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유학의 길은 나의 운명이었다.



    돈이 없으면 불법자가 되는 유학생 신분으로 생존하기



    아무튼 나는 가난한 유학생의 신분으로 미국으로 유학 왔다. 가져온 돈으로 한 학기 등록금을 내고, 약간 남은 돈으로 생활비에 썼다. 내 기숙사 아파트는 혼자 쓰기에 사치스러운 곳 이었다. 큰 침실과 욕실, 큰 거실과 식사 공간, 부엌이 다 갖추어진 20평 정도의 크기였다.

     


    나는 바로 몇 해 전까지 필리핀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었다. 물론 수녀원이라는 큰 집에서 살았지만, 내 마음은 늘 가난한 사람들 속에 있었다. 20평 정도의 공간에서는 필리핀 빈민 4-50명이 살 수 있다! 그러니 내 기숙사 아파트가 어찌 사치가 아니겠는가? 사실 나는 한 1-2년 동안 내 아파트의 욕실 물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필리핀에서는 식수가 없어서 간단한 목욕 때에도 물을 아껴 써야 했다. 내가 방문한 빈민가 가족들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래서 고안한 생각이 방세를 나누어 낼 학생을 한명 들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매트가 그 적격자로 나타난 것이다. 매트도 그 해 내가 사는 것보다 더 작은 대학원 기숙사의 독방으로 옮겨왔다. 그의 방은 나의 거처보다 더 허름했다. 겨우 침대 하나 책상 하나 들어갈 작은 공간이었고, 화장실은 옆방 학생과 공동으로 쓰고 건물 거주자들이 공동으로 쓰는 부엌을 쓰고 있었다.



    매트는 그해 겨울 자기 친한 친구와 같이 새로운 집으로 들어가 살 것인지 내 아파트로 올 것인지를 망설였지만 결국 내 아파트를 선택해 주었다. 이렇게 나와 매트의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방세 뿐 아니라 모든 경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매트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헌 차가 있었고,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학과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그런 매트가 있었다.



    유학생은 법적으로 학교 밖에서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한 학기가 지나도 나에게 교내에서 일할 마땅한 일자리가 생기지 않았다. 이것은 거의 모든 유학생들이 겪는 고초이다. 돈이 없으면 불법자가 되는 것이 유학생의 처지이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그 해 겨울 백만장자 기부가 마아고 골드스미스를 만나서 그녀가 부쳐 준 매월 200불 정도 도움을 받은 것이 내 수입의 전부였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출처:blog.naver.com)  



    옷가게 점원으로 일하다

     


    학교 밖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곧 한국신문에서 일자리 광고를 찾았다. 한국 옷가게에서 점원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갔더니, 주인이 곧 일하러 오라고 했다. 일주일에 많아야 18-20시간 정도였지만, 매일 몇 시간씩 앉지도 못하고 서서 일하는 것이 육체적으로 매우 피곤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돈을 벌려고 육체적인 노동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나는 그 일에서 월급만 받아 온 것이 아니었다. 주인과 관리인, 점원 등이 한국여성들이었는데, 그들을 통해서 한국 이민자들의 삶을 알 수 있었다. 생존을 위해 주 6일,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일하고, 집과 일터, 교회, 헬스클럽 같은 공간에서만 이동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은 정신적으로 매우 고갈되어 있었다. 반 정신이상자로 보인 사람도 있었다.



    거기다가 그들의 타인종에 대한 편견이 보통 수준을 넘었다. 한국인 1세 이민자들은 보통  자영업을 하는데 보통 흑인이나 멕시코인들을 고객으로 한다. 한국인 주인이나 관리자들은 이 사람들을 경멸하고 잠재적인 도둑처럼 생각한다.



    이민자 한국인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흑인이 많은 학교로 보내기를 꺼려하며 또 자녀가 흑인과 사귀는 것을 공공연하게 반대한다고 한다. 많은 한국 이민자들이 자신들이 얼마나 백인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백인들이 차별하는 인종인들을 대놓고 차별한다.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몇 명 만났는데 모두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신자가 아닌 것을 알면 늘 전도하려고 시도한다.

    아, 언제 한국인들은 종교를 넘어서서 영성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종교는 나에게도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종교는 인생을 바쳐서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나는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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