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문화원에서 인터뷰 중인 필자와 민숙기 선생님
강수정: 그 일을 얼마나 오래 하셨어요?
민숙기: 3년 정도? 그 때 남편을 만나 첫아이를 가졌는데, 시부모님께서 '몸도 무거운데 일을 그만두는게 어떠냐' 고 권고 하셨습니다. 정말 그만두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그만두었지요.
강수정: 아! 많이 안타까웠겠어요.
민숙기: 지금도 텔레비전 같은 데서 사회복지 분야를 대표하는 여성이 토론 패널로 나오는 것을 보면 부럽고, 나도 그 때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지요.
강수정: 그럼 그 뒤로 다른 직업은 갖지 않으셨나요?
민숙기: 남편이 외교관이어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게 되었지요. 외교관 부인은 돈 버는 일은 금지되어 있어요. 봉사만 가능했죠. 그래서 아이들 학교에 가서 한국을 알리는 특강을 하기도 하고 다른 봉사도 했어요.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했어요. 한국은 제게 종교 같은 거예요. 남편과 주말에 아이들 데리고 가서 한국 홍보 자료 우송작업 같은 것을 하곤 했는데 한 번도 지치거나 싫다는 생각, 해본적 없어요.
강수정: 어느어느 나라에 살아보셨어요?
민숙기: 필리핀, 캐나다, 뉴질랜드, 싱가포르, 미국, 그리고 한국에 살아봤죠.
강수정: 인터뷰 주제에서 좀 벗어나지만,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어디였나요?
민숙기: 뉴질랜드가 참 살기 좋았어요. 사람들이 인정 많고 교양 있어요. 처음 뉴질랜드에 도착해 아파트로 이사 들어갔는데 짐 정리도 못해 엉망인 상태에서 갑자기 초인종이 울리더라구요.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나라에서 말이죠. 나는 지저분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대꾸도 하지 않았는데, 좀 있으니 또 벨이 울리는 거예요. 나가보니 어떤 아줌마가 옆집에 산다면서 이사하는 날은 요리도 못하고 굶는 경우가 많은데 뭐를 먹는지 몰라 케이크를 만들었다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케이크를 한 판 가지고 온 거예요. 그 친구는 뉴질랜드 사는 5년 동안 저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됐죠.
강수정: 참 인정 많은 분이네요.
민숙기: 아직도 연락하는 뉴질랜드 친구들이 많아요. 뉴질랜드를 떠날 때 아들이 중학교 졸업이 일년 남아서 기숙사에 보내고 우리는 먼저 나오려고 했는데 제 친구 세 명이 아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겠다고 나서더라구요. 정말 감동이었죠. 결국 기숙사로 보냈지만요.
▲필자(왼쪽)와 민숙기선생님(오른쪽)
다시 스무 살이 된다면…
강수정: 무보수 봉사를 오랫동안 하시면서 그만두고 싶거나 상처 받은 적은 없었나요?
민숙기: 한 번 있었어요. 3년 전 브라이언 공원 근처 ‘뉴욕 국립도서관’에서 자료를 입력하는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가서 일을 배우는데 제가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를 하기 때문에 미등록 되어있던 오래된 책을 등록했었지요. 책 한 권 입력하는데 서른 가지 정도 목록을 찾아 입력해야 해요. 그 때 제가 뉴욕 문화원 도서관에서 10년 일하고 은퇴했을 때인데도 ‘과연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 의심이 들더라구요. 모든 것이 전산화된 새로운 시스템에 겁이 났던 거죠.
강수정: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민숙기: 처음엔 겁났지만, 열심히 배우고 하다 보니 익숙해지더라구요. 거기서도4년 정도 봉사하다가 등록 사무실이 퀸즈 쪽으로 이사 가는 바람에 그만두게 되었지요. 무릎관절이 좋지 않아 그쪽 지하철 역 층계를 오르고 내리기 힘들더라구요.
강수정: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가실 수 있다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런 생각 해 보셨어요?
민숙기: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제가 다시 젊어질 수 있다면, 전문 분야를 가질 것 같아요. 그게 참 후회가 되어요, 그 때 양친회를 그만두었던 것이. 지금 다시 그 상황이 된다면 절대로 나의 분야, 전문성을 놓치지 않을 것 같아요.
강수정: <이프>의 여성독자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민숙기: 자꾸 반복이 되는데, 자신의 전문분야를 찾아서 끈을 놓지 말라고 말하고 싶네요. 아이들 키우는 동안에는 일 좀 줄이거나 쉬더라도 복귀할 수 있는 끈은 유지하라고요. 저는 오십대 중반까지 외교관 부인이라는 자리 때문에 직업을 가지지 못하다가 남편이 인도네시아로 발령받아 먼저 가서 자리 잡는 동안 심장마비로 돌아가고서 비로소 직장을 잡게 되었지요.
강수정: 한참 일하실 나이인데 …
자원봉사로 아름다운 노년을 마무리
민숙기: 남편을 그렇게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갔어요. 미술관 성인 교육분야에서 일자리를 주어서 한3년 일하다가 아이들이미국에 있어 다시 미국에 오게 되었지요. 그때 문화원에서 오십대 후반인 제게 도서관 대출업무를 맡겨 주었고 한 10년 정도 일했어요. 그리고 그만두고 나서도 지금까지 일주일에 한 두번씩 나와 봉사하고 있습니다. 늘 일손이 모자라 쩔쩔매는 것을 내가 아니까 오지요. 뉴욕문화원이 내가 어려울 때 아무 자격도 없는 나이든 사람을 고용해준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도 되고. 이젠 일할 곳이 있다는 것이 좋아서 합니다.
강수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는 언제부터 봉사하셨어요?
민숙기: 한 5년 된 것 같아요. 한국인이나 일본인을 안내하는 일, 가끔 한국어 안내장 같은 것을 제작할 때 제가 번역하기도 해요.
강수정: 그럼 화요일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은 문화원에서 자원봉사 하시는 거네요?
민숙기: 예, 화요일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구경 오세요. 제가 입장권 뺏지 드릴게요. 돈 안내셔도 돼요.
강수정: 다음 특별전 있을 때 꼭 가겠습니다. 오늘 말씀 들으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건강하게 오랫동안 즐겁게 봉사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선생님의 귀한 경험과 말씀을 보약 삼아 선생님처럼 봉사 활동에서 롱런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민숙기: 롱런하시유!
▲메트로 폴리탄 뮤지엄에서 자원봉사하고 계시는 민숙기선생님
자원봉사를 삶의 보람으로 여기며 열심히 하면서도 자신의 전문 분야를 꼭 가지라고 당부하시는 민숙기 선생님. 1932년 일제시대에 태어나 고착화된 성 역할을 따라 산 세대지만, 이 나라 저 나라를 경험하며 인터뷰에서 다 여쭙지 못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셨을 것이다.
오십대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13년간 풀 타임 직장을 다녔고 은퇴하고도 일정을 짜서 자원봉사를 하며 아름다운 노년을 즐기는 선생님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다. 물론 그 분은 서른 살에 아들 네 명 딸린 가난한 청상과부가 된 내 시어머니에 비하면 출발부터 많이 달랐다. 허나 젊은 여성에게 남편이 잘 나가더라도 ‘너의 전문분야를 가져라’고 거듭 충고했다. ‘고학력 전업주부’가 늘어나고 있는 요즘 의미 있는 메시지가 아닐까?
-장소를 내어 주신 뉴욕 '한국문화원'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인터뷰에 동행해서 사진을 예쁘게 찍어주신 룸메이트 박현미님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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