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전 전세계를 놀라게 하며 페미니스트 운동을 태동시킨 미스아메리카 반대시위는 어떻게 시작이 된 걸까?
‘나쁜 페미니스트’의 저자로 우리 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록산 게이가 스미소니언 매거진에 미스아메리카 반대시위와 페미니스트운동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
록산 게이의 글 “50년전, 시위자들은 미스아메리카 경연대회를 점거하고 페미니스트운동으로 세계를 전률시켰다.
(Fifty Years Ago, Protesters Took on the Miss America Pageant and Electrified the Feminist Movement)”를 소개한다.
번역 유숙열
50년전,
시위자들은 미스아메리카 경연대회를 점거하고
페미니스트운동으로 세계를 전률시켰다
Fifty Years Ago,
Protesters Took on the Miss America Pageant and Electrified the Feminist Movement
미스아메리카 경연대회는 진보적인 행사인 적이 결코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50년 전인 1968년 그것은 페미니스트 혁명을 촉발시켰다.
여성들이 최초의 미스아메리카 반대시위를 조직하며 그들은 여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여성혐오적 태도에 반기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총체적으로 여성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이었다.
1968년 폭동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는 귀절로 유명해진
래디컬 페미니스트 캐롤 하니시의 아이디어였다.
그 해 여름 열리게 되는 미인대회를 시위로 방해함으로써 ”이제 막 태동한 여성해방운동을 공공에 알리게 될 한 방편“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미스아메리카 경연대회도 마케팅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미스아메리카 경연대회는 노동절 바로 다음 아틀란틱시티에서 신문들이 그들의 판매부수를 늘리고
휴양지 경제계가 장사가 되는 여름시즌을 확장해볼려는 계산에서 1921년에 시작되었다.
전국의 신문들은 젊은 여성들의 사진으로 예선을 열어 심사하고
예선통과자들이 아틀란틱시티로 와서 미스 아메리카 경연대회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젊은 여성들이 그들의 외모만으로 평가받는건 아니라는 이유인지 1938년 재능경쟁이 도입되었지만
이 작은 진보도 또 다른 퇴보와 함께 왔다.
같은 해에 미스아메리카 대회당국은 지원자격을 18-28세의 독신 미혼여성으로 한정지었다.
하니시와 그 외 다른 반대시위 조직가들에게 미스아메리카대회는 분명한 목표였다.
8월 22일 뉴욕래디컬우먼은 ‘모든 정치적 분파의 여성들’을 대회당일인 9월 7일 대회가 열리는 아틀란틱시티 보드웍으로 초대한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그들은 “우리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영역에서 여성들을 억압하는 이미지인 미스아메리카의 이미지에 항의할 것”이라고 썼다.
시위는 ‘자유쓰레기통’을 제공해 여성들의 육체적 억압의 상징인
“브라, 거들, 머리롤러, 가짜 속눈썹, 가발, 코스모폴리탄, 레이디스홈저널, 패밀리서클 등 예선을 다룬 잡지 등”을 던져 넣을 것이다.
조직가들은 또한 미인대회 스폰서기업들의 상품 불매운동을 동시에 제안했다.
남성기자들의 인터뷰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까지도 이 시위의 사랑스러운 디테일로 남았다.
시위자들은 또한 그들이 왜 시위를 하는지 10가지 이유가 세세한 설명으로 들어있는,
여성선언서라고 부를수도 있는, 그런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가지 주장은 “젊은 여성을 폄하하는 생각없는-젖통-소녀의 상징”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유색여성이 당선된 적이 단 한번도 없었고 흑인여성들을 위한 경연대회도 없기 때문에 인종차별에 대한 것이었다.
“진정한 미스아메리카-아메리칸 인디언이 당선된 적도 없었다.”고 그들은 썼다.
또한 그들은 군산복합체와 군대내의 오락용 마스코트로 쓰이는 미스아메리카의 역할을 비판했다.
그들은 또 후원기업의 소비주의적 본성과 여성의 가치를 오로지 미의 기준으로만 재는 것을 비판하며
“노 모어 미스아메리카(NO MORE MISS AMERICA)”를 선언했다.
그들은 남자의 참가를 금지한다는 것을 포함하여 시위의 세부사항을 담은 시위 허가를 받다.
9월 7일 오후 미스아메리카대회가 열리고 있는 컨벤션센터 밖
아틀란틱시티 보드웍에 는 수백명의 여성들이 몰려 “모든 여성은 아름답다(All Women Are Beautiful)”,
“동물퍼레이드는 인간에 대한 모욕이다”,
“플레이보이 장식품이 되지 말라!”,
“화장이 억압의 상처를 감출수 있는가?” 등등의 귀절이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시위자들은 게릴라전술을 쓰기도 했다.
한 여성은 아이와 냄비, 프라이팬 등을 들고 보드웍을 대걸레질하는 소극을 공연함으로써
여성의 일이 얼마나 끝나지 않는 일인지를 풍자했다.
저명한 흑인 활동가이자 변호사였던 플로 케네디는 “미의 기준으로 여성이 노예화되고 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을 미스아메리카 꼭두각시에 사슬로 묶었다.
‘자유쓰레기통’은 저명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시위에서 그 역할에 대한 논평이 여성해방운동에 대한 엄청난 오해-시위에서 브래지어를 불태웠다는-의 시발이 되었다.
그것은 너무도 강력한 이미지였다: 분노한 페미니스트들이 가슴을 조이지 않고 자유롭게, 그들 자신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브래지어에 불을 지른다.
그러나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실상 공식관리인들은 보드웍이 나무로 되어있기 떄문에 인화성이 높아 쓰레기통을 태우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 신화는 뉴욕포스트기자 린지 반 갤더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는 시위가 시작되기전 미리 쓴 기사에서 시위자들이 징병카드를 태운 것과 같이 브라를 불태울지도 모른다고 암시했다.
다른 포스트기자들이 그 아이디어를 사실로 보도해버린 후에
저명 컬럼니스트 아트 부크월드가 그 신화를 전국적으로 퍼뜨렸다.
“이 시위의 마지막 가장 비극적인 일은 시위 여성 몇몇이 그들의 브래지어를 공공연하게 불태우는 것으로 일어났다.”고 그는 썼다.
그는 “만약 보통의 평범한 미국 여성이 그녀의 미용제품들을 포기한다면
그녀는 불쌍한 이웃 소년같이 될 것이고 미국남성들이 그녀와 어쩔 이유도 없어질 것이다.”고 한껏 즐기며 여성혐오를 계속했다.
단 몇 문장 만으로 부크월드는 미인대회 반대시위의 긴급한 필요성을 간결하게 묘사한 것이다.
실제 미스아메리카대회가 열리는 저녁,
캐롤 하니시를 포함한 시위자들 일부는 대회장으로 숨어들어가
‘여성해방’이라고 쓴 배너를 펼치고 ‘여성해방!’, ‘노 모어 미스아메리카!’ 등의 구호를 외쳤다.
방송으로 생중계되던 중에 벌어진 그들의 행동은 급성장하는 여성해방운동에 측정할 수 없는 홍보효과를 주었다.
9월 8일 자정, 아틀란틱시티 리츠칼튼에서 몇블록 떨어진 곳에서 미스블랙아메리카 경연대회가 열렸다.
흑인들은 만약 미스아메리카 경연대회가 흑인여성들과 흑인들의 아름다움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미인대회를 스스로 만드리라 결정했다.
흑인기업가 J. 모리스 앤더슨은 미스아메리카가 되고싶다는 딸들의 소망을 듣고
그의 자녀들의 야망이 인종차별주의에 좌절당하지 않도록 미스블랙아메리카대회를 만들었다.
1968년 미스블랙아메리카 수상자인 산드라 윌리암스는
“나는 내 타이틀로 흑인여성들도 역시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했다.
오프라 윈프리는 1971년 미스테네시대표로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이 대회는 미국에서 유색여성을 위한 가장 오래된 미인대회이다.
1968 시위가 미스아메리카대회의 본질에 많은 변화를 초래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은 주류사회에 페미니즘을 소개함으로써 여성의 권리와 해방에 대한 전국적인 대화와 토론을 확장시켰다.
여성의 투표권에 한정되었던 제1물결 페미니즘은 19세기 말에 시작됐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제 ‘68 시위를 보다 넓은 제2물결 페미니즘의 시작으로 본다.
페미니스트들이 늘 그래왔듯, 시위자들도 끈질기게 그들 자신을 비판했다.
1968년 11월 캐롤 하니시는
“전체미인대회 시위중 우리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우리의 안티여성주의였다... 미스아메리카와 모든 아름다운 여성들을 결과적으로 우리와 같이 고통받는 우리의 자매들이 아니라 우리의 적으로 몰았다”라고 썼다.
역사는 순환적이다.
여성들은 여전히 제한적인 미의 기준을 갖고 있다.
확실히 아름다움에 대한 문화적 정의는 근래들어 많이 확장됐다.
그러나 충분히 확장되지 못했다.
백인여성은 여전히 미의 이상형으로 떠받들려지고 있다.
미스아메리카 경연대회에서 여전히 여성들은 수영복과 하이힐을 신고 퍼레이드를 벌여야 한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2002년 영화 미스아메리카에서
“수영복 경쟁은 아마도 미인대회의 가장 정직한 부분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정말로 몸에 관한 것이고 여성을 대상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역사는 순환적이다.
1968년 시위를 돌아보며 우리는 다시 여성들에 의해 움직이는 문화의 또 다른 의미심장한 순간을 보고 있다.
트럼프대통령이 취임하고 수백만의 여성들과 그들의 연대 집단들이 미국의 수도와 전세계의 도시들에서 여성의 권리와 모든 소외된 사람들의 권리를 위한 인권행진을 벌였다.
그들은 1968년 시위자들이 찾고자했던 같은 권리를 위해 행진했다.
1년후 우리는 더 많은 여성들이 직장에서의 성추행과 성폭력을 폭로하면서 심판의 한가운데 놓여지게 됐다.
그리고 남성들은 사상 처음으로 그들 행동의 진정한 결과를 마주하게 되었다.
1968년과 오늘 사이의 연결조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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