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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회]왜 예스가 노를 의미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유숙렬 / 2015-05-21 09:36:06
  • -WHY YES CAN MEAN NO

     

    흔히 남성들한테 여성의 노(no)는 예스(Yes)를 의미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가하면 데이트강간이라는 말도 있고 아내강간이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섹스와 강간 사이에는 복잡한 회색지대가 존재한다. CMC포럼에서는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공연을 계기로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기고문을 게재했다. 조단 보실예박의 기고문 “왜 예스가 노를 의미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Why Yes Can Mean No)"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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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허락하는 것이 섹시한 것”이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물론 거기에는 포인트가 없다. 그건 마치 강간을 범죄라고 말하지 않고 대신 그냥 좋지 않은 섹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허락은 의무사항”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에게 섹스는 허락을 받아야하는 것이고 다른 모든 것은 강간이라고 상기시키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 내가 있었다. 파티가 끝난 후 남자 기숙사에서 그리고 “괜찮아?(Is this ok?)" 만약 우리가 이 문제를 법률적으로 다뤘다면 나는 ‘예스(yes)'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강제도 없었고 폭력적인 위협도 없었으며, 만취(글쎄, 어쨌든 아주 많이는 아니었다)상태도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예스를 말하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 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속으로는 ’노(No)'를 말하고 싶어 하면서 왜 ‘예스’라고 말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는지 누가 나에게 예스를 말하도록 가르쳤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종류의 페미니즘은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버자이너 모놀로그에서도 나오지 않고 지저벨 같은 페미니스트 매체도 쓰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페미니즘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려면 그것은 내가 상처받을 때 나를 혼자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페미니스트 동료들과의 대화 속에서 맘 속으로는 노를 의미했지만 예스라고 말했던 그 날 밤에 대해서 내린 결론이다.

     

                                                                                  ▲왜 예스가 노인지
     

    당신이 누구냐에 따라 내 말은 우습게 들릴 수도 있다: 어떤 바보가 노를 의미하면서 예스라고 말하나? 성적인 관계가 아니라 어떤 관계에서도 정직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정직하게 나에게 그것은 훨씬 더 많은 이야기와 문제들이 있다.

     

    다섯 살에 친척들은 내가 웅크리고 도망가더라도 내 뺨에 뽀뽀를 하곤 했다. 연약한 12살의 나이에 나는 학교에서 내 브래지어끈과 넓적다리가 남학생들의 시선을 끌기 때문에 교도소에 보내져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16세에 내 남자친구는 대부분의 소녀들이 그걸 좋아한다고 말하며 나는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마침내 스무살의 나이에 이르러 파티가 끝나고 누군가의 방에 있는 나에게 ‘노(no)’는 겁나고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이 사건은 독특한 것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토론하면서 우리는 그 경험을 “강간문화에 의해 강간당하다(raped by rape culture)"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우리는 ‘노’를 말하고 싶었지만 우리를 기른 문화의 힘과 파워에 의해 모두 비자발적으로 ‘예스’를 말하고 만 것을 묘사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누군가의 방에 가버렸다는 책임감, 좋은 친구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감정, 외로움, 아무도 나에게 관심 갖지 않을거라는 걱정, 내가 ‘노’라고 해도 그들은 멈추지 않을거라는 두려움, 알콜의 영향, 관계가 재미있어지리라는 기대 등 등이 있을 수도 있다.

     

    나에게나 또는 나와 같은 수많은 다른 여성들에게도 허락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예스가 언제나 예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여전히 “그렇지만 그녀는 ‘no'라고 말하지 않았어요”와 싸우고 있거나 혹은 강간이 늦은 밤 골목길에서나 일어난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강간은 허락받지 않은 상태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허락은 어린 시절 우리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파트너들로부터 무슨 소리를 들었는가 부터 시작된다. 나는 아직 확실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나는 혼자서 그 답을 찾지 못한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노’를 말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만약 당신이 ‘no'를 찾기 원한다면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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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덧글(6)

  • hjh1984 [2015-08-31]
  • 기성의 사회문화 구조에서 여성이 자기 본심을 솔직히 드러내기 어렵다는 글쓴이의 주장은 반쪽짜리 진실에 불과하지만, 나머지 반쪽을 덧붙이면 제법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즉 기성의 사회문화 구조에서 자기 본심을 솔직히 드러내기 어려운 것은 비단 여성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성이 자기 본심을 숨기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존 웨인 증후군(John Wayne Syndrome)’입니다. ‘존 웨인 증후군’이란 진정한 남성은 고통과 슬픔, 두려움을 참고 견딜 줄 알아야 한다는 성별 이데올로기로 인해, 어떤 상황에서도 나약함과 소심함, 의존성 같은 인간적인 결점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남성들의 태도를 뜻합니다. “괜찮아?”라는 질문에 솔직하게 “노”라 답할 수 없는 것은 남성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지요.
  • hjh1984 [2015-08-31]
  • 글쓴이가 말한 감정들, 즉 이미 관계를 시작했다는 책임감, 좋은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감정, 외로움,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 내가 솔직히 말해도 달라지는 게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등은 남녀관계를 맺을 때 남녀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성(異性)에게 선택받지 못한 채 결혼 및 연애시장에서 도태되는 것은 남녀 누구나 꺼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이 연약하고 수동적인 여성상을 원하기 때문에 여성은 원치 않는 상황에서도 “예스”라 답해야 하듯이, 여성이 강하고 능동적인 남성상을 바라기 때문에 남성은 힘에 벅찬 상황에서도 “예스”라 답해야 합니다. 이처럼 남녀가 자기 본심을 솔직히 드러낼 수 없는 데에는 다른 한쪽 성(性)의 욕망과 필요가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기성의 사회문화 구조에서 남성은 전통적인 여성상을 통해 성욕 또는 애욕을 채우기를 원하고, 여성은 전통적인 남성상을 통해 물욕 또는 안전욕구를 충족시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 성의 욕망과 필요에 부응할 때에만 남녀는 비로소 남성 또는 여성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 hjh1984 [2015-08-31]
  • 기성의 사회문화 구조에서의 남녀관계는 남녀 모두의 욕망과 필요가 반영된 상호관계였고, 따라서 남녀 모두 사회와 다른 한쪽 성이 기대하는 모습 외에 다른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컨대 다른 한쪽 성의 “예스”라는 대답의 이면에 숨어있는 기성의 사회문화 구조의 메커니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남녀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 hjh1984 [2015-08-31]
  • 성(性)해방을 지향하는 젠더(gender) 연구자의 입장에서 글쓴이의 주장은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굳이 성관계와 관련해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글쓴이의 저의(底意)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간은 허락받지 않은 상태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 말하는 글쓴이가 진정 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설마 남성이 여성의 동의 아래 성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마음먹으면 이를 강간으로 규정할 수 있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것일까요? 만약 그것이 글쓴이의 저의라면, 글쓴이는 병적(病的)인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거의 모든 남녀관계를 어그러뜨리려 작정한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 hjh1984 [2015-08-31]
  • 앞서 말한 대로, 기성의 사회문화 구조에서 남녀 모두는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에 얽매여 자기 본심을 솔직히 드러낼 수 없습니다. 물론 젠더 연구자의 입장에서 이런 부자유스러운 현실을 지적하며, 장기적으로 이를 바로잡을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남녀 모두가 상대의 욕망과 필요에 얽매여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쪽 성의 본심을 읽어내지 못한 책임을 다른 한쪽 성에게 묻는다면, 어떤 남녀도 안심하고 다른 성과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됩니다. 글쓴이의 논리대로라면, 평소 “괜찮아?”라는 아내의 질문에 “예스”라 답한 남편이 과로(過勞)로 세상을 떠나거나 심각한 우울증에 걸렸을 때,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물으며 그녀를 비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성에게 남성다움을 강요하는 성별 이데올로기, 이로 인한 ‘존 웨인 증후군’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지요. 더욱이 강간은 형사법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는 범죄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여성이 “예스”라 답한 뒤 맺은 성관계를 강간이라 자의적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는 주장은 남성을 상대로 ‘마녀사냥’을 벌이겠다는 뜻입니다.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없고, 또 받아들여져서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이지요.
  • hjh1984 [2015-08-31]
  • 남녀의 솔직함을 가로막는 기성의 사회문화 구조의 메커니즘을 지적한 윗글은 인상적이지만, 여느 ‘절름발이 페미니스트’처럼 글쓴이도 여성의 부자유에만 초점을 맞춘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또한 무엇보다 엄격히 규정돼야 하는 강간 같은 범죄의 정의(定義)를 자의적으로 규정지음으로써 남성을 해코지하려 드는 글쓴이의 병적인 피해의식은 젠더 연구자로서 개탄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름발이 페미니스트’로서 글쓴이가 보여준 병적인 피해의식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소모적인 남녀갈등의 주된 원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억지 주장을 적절히 걸러냄으로써 젠더 문제와 관련된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침체된 이곳 게시판이 되살아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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