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프의 부활, 그리고 페미니즘의 대반격!
-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고백, 1997-2017, 김서영 외 21
무엇보다 먼저,“김서영 외 21명의 용감한 페미니스트 고백자들에게 박수, 감사와 지지를 보낸다.
이 책은 1997-2017년 동안 이프를 중심으로 한“대한민국”페미니즘의 흐름, 잠적, 그리고 부활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특이한 것은 “고백”이라는 돌발적인 형식을 택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페미니즘 운동의 현장에서 나온 생생한 활동가들의 증언, 아니 그보다 더 힘 드는“고백”을 통하여 거대한 화제인 페미니즘에 깊이 접근하려는 시도이다.
각자의 고백을 통하여 어떻게 필자들은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정체성을 가지기까지 어떤 경험을 하였으며,
또 그 정체성은 어떻게 힘이 되는가를 보여준다.
언제나 그렇지만 해결보다는 물음이 더 많은 페미니즘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며,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외침이며 동시에 자신과 가족, 또 자신들의 공동체가 경험한 승리, 환희의 합창이다.
“침묵을 강요 받았던 존재가 입을 떼는 순간 세상은 크게 놀랄 것이다”는 홍승은의 말대로
이 책은 지금 대한민국을 놀라게 하고 있다, 촛불혁명과 함께, 또한 봇물처럼 터져 가부장제도들의 근간을 흔들어대고 있는 “#미투”, “#위드유”와 함께.
이 책은 두 가지 전략이 잘 쓰여진 것 같다.
고백이라는 형식과 페미니즘의 다양성이다.
그런데 책 제목 속의 “대한민국”이란 단어는 페미니스트에게 무엇인지가 석연치 않은 의문을 남긴다.
첫째, 고백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택했다,
“한 여자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실을 말하면 세상이 박살 나 버릴 수 있다”는
미국 작가 Muriel Rukeyser (1913-1980) 가 했던 말처럼. 여성의 고백은 핵폭탄급 힘을 가지고 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미투운동에 맥없이 나자빠지는 가해자들을 보라. 예언처럼 들려 오싹하다.)
왜 그럴까? Leigh Gilmore의 저서, Autobiographics: A Feminist Theory of Women’s Self-Representation 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먼저, 자신에 대해 스스로 하는 묘사(self-representation), 즉 고백은 정치적인 작업으로,
“진실, 정체성, 힘”을 얻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Gilmore가 말하는 여성의 고백에 있는 진실은 무엇인가?
그는 진실이라는 것은 누군가에서 그 진실을 인정받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현재 진행중인 #미투 에 대한 안현진의 고백은, 사실상 살아남기 위하여 페미니스트가 될 수 밖에 없는 동시대의 상황을 보여준다.
왜 가부장은 여성의 고백을 두려워하는가?
여성들이 자신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스스로 하는—“고백”을 하게 되면
자신과 집안의 추잡한 이야기(미국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더러운 빨래감 (dirty laundry)”이 나오게 되고
그것은 바로 동네방네, 나아가서 한 나라의 더러운 모습이 다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도 속의 지배층—남녀 모두--은 억압받아 분노가 차 오른 여성들의 입을 막는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여성들 스스로 자기 검열의 덫에 걸려 버린다는 것이다.
나 혼자 감당하면, 혹은 내 가슴에 묻고 무덤까지 가 버리면, 나 빼고 모두 편안해 질 수 있으니,
차라리 입 다물어 버리는 게 낫다는 슬픈 지혜를 가지게 된다.
이프에 대한 조직 속의 갈등에 대한 경험까지 나누어 준, 박미라,
또 “사실 그 당시 페미니즘은 아니 대한민국 페미니스트들은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었다”는 조박선영의 글이 이 맥락에서 빛난다.
페미니스트가 꿈꾸고 외치는 자매들의 유대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닌 것은
가부장적 통제화 감시 속에서 여성들 스스로 서로를 경계하도록 길 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 속의 분열, 정신분열, 자매 사이의 분열, 이념의 분열, 세대의 분열 --까지 넘어 이프의 부활이 찬란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안현진이 말하고 있는 “고백의 동력” 그리고 “고백을 통해 무너질 것”에 대한 예언이 적중한 것이다.
거기에 정신병동까지 거쳐“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누님처럼, 아니 할머니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는 유숙열의 고백은
대한민국 페미니스트 1 세대들이 할미 세대에 도달하여 조심스레 또 지혜롭게 헤쳐나가리라는 연륜이 주는 자신감이기도 하다.
특히 가부장적 폭력의 끝판 왕인 성폭력에 대해서 피해자인 여성들의 고백은 엄청 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 속에서는 많은 작가들이 성폭력을 당한 경험을 나누는 것은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안형진, 이세아). 가
부장제도에 뿌리 둔 성폭력. 진보적인 정치, 예술, 문화계 속에도 성폭력가해자들이 판을 치고 있음을 #미투 운동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여성의 해방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진보주의 진영에 대한 공격의 빌미가 되는 아이러니까지 나오고 있으니. . .
이런 와중에 “여성의 성욕이 가부장제를 위협하는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고, 클리토리스가 주는 성적 즐거움을 찬미하는 홍승희의 고백 또한 인상적이다.
이 “강력한 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기를 바란다.
다양성
책의 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필자들은 “당당히 페미니스트”라 외치는 여성들부터,
“변방의 페미니스트,” 혹은 “어쩌다 페미니스트”까지, 페미니스트라는 공통적인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공통분모 속의 다양성이 이 책의 중심이고 힘이기도 하다,
이프 편집실에서 사이버 공간, 그리고 지리산까지 물리적 공간과 또한 시공을 거쳐 첫 세대부터 현재 부상하고 있는 젊은 세대까지,
연령과 경험의 다양성이다. 메갈리아에 대한 논란에 대해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예나, 국지혜의 도움으로 이해가 된 것도 고마운 일이다.
다양성에 머리가 팽팽 돌았다.
“헬페미” “꼴페미,” “직업페미니스트” “영영페,” “뉴페,” “기혼여성페미니스트,” “꿘충페미,” “배부른 페미니즘,” “뼈페미,” . . .심지어 “나쁜. 페미니스트”까지.
정말 멋지다. 이 모든 다양성은 페미니즘이“여성도 인간이라는 단순한 생각 (Feminism is a notion that women are human too”),
“페미니즘은 별거 아니다. 결국 사람 사는 얘기이고 그것을 특히 여자들의 입장에서 하는 얘기”(유숙열)가 왜 이다지도 어려운가에 대한 수많은 질문이기도하다.
이 질문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에 대한 하나의 선언문, 혹은 신 들린 넋두리이다, “오, 하찮은 가부장제여/끝까지 나는 너를 조롱하겠다/확확/ 찢어발겨도 시원찮은/ 껍데기 이데올로기여” (유지현)
그러면 이 “껍데기 이데올로기”—가부장제도--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
“남자들은 왜 하나도 바뀌지 않고 있는가?” (최나로)“여성운동은 무엇을 했는가?” (박지아)
이런 물음은 아마도 다음에 이어지는 대화가 될 것 같다. 고백이 먼저다.
이 책은 전략서도 아니고 이 문제에 대해 집중적인 공부나 토론이기보다는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수용하며 역량을 강화하는 첫 디딤돌이다.
그러나 고은광순은 늘 해 온 것처럼 해결책을 제안 한다.
즉 “학생운동, 여성운동, 평화운동, 동학운동. . . 그것은 다르지 않다. . . . 그러나 무시하고 경멸하고 증오할 필요는 없다.
젊은 페미니스틀에게 명상을 강력 추천한다. 명상수행을 하면 더 이상 분노와 슬픔에 잠기지 않게 된다”는 말도 귀중한 지혜이다.
“개개인 성찰없는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는 없다”(박미라)의 말 또한 의미심장하다.
너무 화 내고 싸우기만 하다 보면 지친다. 숨을 고르고 재충전해서 스마트하게 싸워야 이긴다.
막강한 가부장제와 싸우다 지쳐, 1960년대부터 미국과 유럽 페미니스트 일부는 여성영성을 대안으로 택했다.
가부장제의 뿌리는 “하느님이 아버지”가 된, 즉 영성이 가부장화 된 데 있다는 깨달음에서
나와 “하느님이 어머니”인 동시에 지구 자체인- 여신으로 섬긴 고대인들의 믿음을 재조명하여 영성 성평등을 포함한 사회 정의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고,
여성영성이야말로 말로 큰 그림 속에서 보면 가부장제에 대한 최대의 비폭력 저항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개인적=정치적”이라는 데서 머문 페미니스트들의 의식을 넓혀, 여성영성은 개인적=정치적=우주적 (the personal=the political=the cosmic)인 단계로 밀어주었다.
그래서 명상과 의례가 이 저항의 강력한 도구로 쓰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 방식 또한 논란이다. 싸우기가 무서워 산으로 도망 가 숨어서 명상이나 의례, 혹은 기도, 춤으로 대신한다고 보여진다.
분노를 숨기고 삭이도록 강요받아 온 여성들이 이 분노를 바로 명상수행으로 잠기도록 하는 것에 대한 반감과 저항이 있을 수 있다.
아무튼 가부장제가 다양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시대에 저항 또한 다양할 수 밖에 없다.
분노하고 또 살아남기 위해 명상도 하고. . .
마지막으로 한 가지 나를 곤혹스럽게 한 것은 책 제목 속 “대한민국”이라는 단어이다.
페미니스트에겐 국가가 무슨 의미일까? 페미니스트 책에 왜 한 국가의 이름이 버젓이 들어가야만 하는가?
물론 필자들은 남한/한국 이라는 정치적이고 지리적인 공간에 살고 있긴 하다. 그러나 한국이 분단 된 이 상황에서 굳이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것은 한 국가,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 아니면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은 저항을 나타내는 것일까. 페미니스트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이 질문부터 했어야 했다.
덧붙여
대한민국 페미니즘에 대해서 나는 문외한이기도 하다.
왜냐면, “. . .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어찌 보면 가장 잘 나가는 문화의 계급 훈장” (김진옥)
혹은 “주홍글씨“(고은광순) 같은, 여성학이 거의 없고 또 고급스런 학문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던 1970년대에 대한민국을 떠나 왔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말에 고국을 쫓기다시피 떠나야 했다. (지방대학 촌년이 유신 반대 데모 주동으로 제적).
그리고 오십이 넘어 다시 미국에서 대학으로 들어가 영문학을 하면서 미국 내 소수민족 여성들의 글 덕분에 여성학에 대한 열정에 사로 잡혀,
2000년 대 초반에 대학원 여성학과에 들어 가 공부하게 되었으니 사실 미국의 페미니즘을 공부하게 된 셈이다. 그 사이 항시 대한민국의 페미니즘이 늘 궁금했었다. .
곳곳에서 여러 세대를 걸쳐 치열하게 부대끼며 그 속에서 고백이라는 엄청난 핵폭탄 급 무기를 들고 나서는 대한민국 페미니스트들을 보니
이제 진짜 페미니스트 운동 2 라운드가 시작 되는 모양이다.
그 동안의 경험과 쌓아 온 역량과 고백의 힘으로 연대하여 즐겁게 놀고 웃으면서 뒤집어 버리는--지혜로운 대반격!이 시작되고 있다.
이번에는 이길 것 같은 즐거운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