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재단이프
  • 이프북스
  • 대표 유숙열
  • 사업자번호 782-63-00276
  • 서울 은평구 연서로71
  • 살림이5층
  • 팩스fax : 02-3157-1508
  • E-mail :
  • ifbooks@naver.com
  • Copy Right ifbooks
  • All Right Reserved
  • HOME > IF NEWS > 문화/생활
  • [오토바이타는 여교수] 운전배우기 2
    최고관리자 / 2016-01-05 14:30:27
  • 이지훈 교수의 <오토바이타는여교수>는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이프웹진에 연재되었던 글로 2015년 사이트개편 당시 분실된 데이타를 복구해 재연재하는 글입니다.

    카테고리가 아직 복구되지 않아 임시로 <문화난장북리뷰>로 업데이트되는 아래의 글은 2011년 12월에 연재되었습니다.

    --------------------------------------------------------------------------------------------------------------------------



    소아를 사랑하는 사람


    근래에 어린이를 상대로 한 충격적 성범죄가 우리를 놀라게 했고 분노케했다. 이름난 들어도 악마처럼 느껴지는 그 남자들.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약한 어린 소아에게 성적 폭력을 행사하고 그 파렴치한 짓도 모자라서 살인까지 저지른 남자들. 소아성애자라고 할 때 우리는 이런 변태적 범죄를 떠올리게 된다. 왜 요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 갑자기 이런 범죄가 드러났을까? 힘없는 나약한 대상을 상대로 한 점에서 마찬가지인 장애인 성추행이나 성폭력도 그렇다. 이전에는 이런 범죄가 없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은폐되어 있다가 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지금에야 나타났을까?



    질문을 던져 놓고서도 쉽사리 대답할 수가 없다. 별 지식이나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소아 성애는 영어로 Pedophilia라고 하는데, Pedo는 어린아이를 말하고 Philia는 사랑한다라는 뜻이다. 원래는 변태적 의미는 없다. 그러면 소아성애는 몇 살부터 몇 살 까지가 해당될까? 사전적 정의는 13세 이하의 소아, 즉 전(前)사춘기에 이른 여아에게 특별히 성적 흥미를 가질 때 소아성애라고 한다. 여기에는 성인남성뿐만 아니라 18세나 19세의 청소년들이 자기보다 5세 정도 어린 여자에게 성적흥미를 가질 때도 해당된다.



    보고에 의하면 이 관심이 계속 어린 소아에게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소아성애자의 특징이다. 만일 그 대상이 나이가 들어 성숙한 여자로 변하면 그의 성적 흥미나 판타지는 없어지고, 다시 어린 소아에게로 향하게 된다. 일종의 정신장애이다. 성인 여성에게는 두려워서 접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대신 소아를 상대로 하는 것이다. 소아 성애자의 또 다른 특징은 자신이 어렸을 때 당했던 경험을 커서 반복한다는 것이다. 불쌍하게도 그 경험을 당할 때 그 나이로 성장이 멈춰버리고 신체는 어른이 되지만 몸 속의 아이는 그대로 아이로 남아 있어서 자신을 아이로 착각하고 어린 소녀, 즉 자기 나이 또래의 소아에게 성적 접근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른이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이상행동으로 보이고 소아성추행이 된다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이 악순환적 고리는 되풀이 된다. 정신분석의들의 전문가적 견해이긴 하지만, 과연 그럴까 싶기도 하다.



    <운전배우기 - 그 은밀한 기억>의 남자 주인공 펙은 소아성애자일까? 그는 27세 차이가 나는 소녀를 사랑한다. 얼마 전 가수 이주노가 결혼 발표를 하면서 상대 여자와 23세 차이이고 장인과는 4세 차이라고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런데 만일 이주노가 그 여자를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랑했다면? 10세 때 부터라든가 말이다. 그러면 그는 소아 성애자일까? 아니라는 대답이 떠오른다. 상대가 어리긴 했지만 일편단심 사랑했고 성장하기를 기다렸고, (13년 동안이나), 마침내 성인이 되자 청혼을 한다. 이건 소아성애자의 변태적 사랑이 아니라 그냥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가 된다.








    펙은 그렇게 릴빗을 사랑한다. 태어난 순간, 그 아기를 보고, 그 아기를 손에 안아본 그 순간부터 사랑한다. 릴빗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며, 이야기를 해주고, 뭔가를 가르쳐주고, 또 운전을 가르쳐 주고, 대학에 가라고 꿈을 심어주고 하면서 말이다. 절대 다른 여자애를 돌아보거나, 릴빗에게 강압적으로 어떻게 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릴빗이 크기를 기다린다. 그렇게 사랑한 소녀를 대학에 보내는 것은 어쩌면 자기 품에서 떠나 보내는 것이다. 아기 고양이는 어른 고양이가 되고 더 이상 펙의 도움이 필요없게 되는데 그걸 알면서도 펙은 릴빗을 떠나 보낸다. 그리고 그녀의 빈자리를 괴로워한다.




    그의 사랑은 이런 사랑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둘의 관계이다. 그들은 한 가족이다. 정말? 이렇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가족이라니? 설마 아빠와 딸은 아니겠지? 물론 부녀지간은 아니다. 그러나 거의 부녀지간이다. 영어로는 Uncle Peck이지만 우리말로 옮기면 관계는 더욱 확실해 진다. 영어 “엉클”은 참 편한 말이다. 가족 간에도 쓰는 말이지만 멀고 가까운 건 나타나지 않는다. 먼 10촌 친척 아저씨도 엉클이다. 또 옆집 아저씨도 엉클이다. 아는 아저씨는 다 엉클이다. 그만큼 엉클이라고 불릴 때 두 사람의 관계는 우리말로 불리 때보다 덜 직접적이다. 그런데 우리말로 하면 정확하게 관계가 드러난다. 엉클 펙은 이모부다. 그는 엄마의 여동생과 결혼한 남자다. 까딱 잘못하면 근친애(incest)까지 될 수도 있다. 물론 이 말도 어디까지를 근친애라고 볼 것인지 애매하지만 말이다. 예를 들면 <햄릿>에서 햄릿의 어머니 거투루드는 남편 왕이 죽자 시동생과 결혼한다. 남편이 죽었으니 합법적인 결혼이지만 그들은 가족이었다. 만일 펙이 자기 아내와 이혼한다면 그는 싱글이 되고 조카릴빗과 결혼한다면 그들의 결혼은 합법적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 가족은 그대로 존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두 사람이 가족 내 받아들여지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모부는 조카를 사랑하고 조카는 이를 알지만 가족이라는 이 테두리를 지워버릴 수 없다. 펙은 용감하게 이 테두리를 벗어나려고 시도하여 릴빗과 인생을 함께 가기를 원하지만 릴빗은 이에 응할 수 없다. 그녀의 선택은 사랑이 아니라 가족이다.



    처음 읽었을 때 이 가족 코드의 무거움에 나도 압박당했다. 릴빗의 가족은 도시저소득층으로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고 굉장히 거칠고 가부장적이다. 성에 대한 농담도 거르지 않고 그대로 노출하고 어린 릴빗이 제 2차 성징을 보이며 가슴이 커지자 그에 대해서도 농담을 서슴치 않는다. 거칠고 상스러운 가족이며 어린 릴빗이나 펙에게 상처를 준다. 그래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의존하고 펙의 성추행이 계속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를 제공해 준다. 사실 가족 전부가 암묵적으로 공모한 셈이다. 펙의 아내인 이모는 둘의 관계를 알고 있다.



    이런 가족이기 때문에 릴빗이 성장한 후에도 지속적인 압박감을 행사하고 그녀는 이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선을 넘어서지 못하고 그 안에 주저앉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릴빗의 또 다른 고민이 점차 이해되었다. 펙을 사랑을 받아들이면 엄마와 이모와의 관계는 깨어지게 되고 자신의 근원을 부정해야만 된다. 평강공주와 같은 상황이랄까? 호동 왕자와의 사랑을 위해서 조국, 아버지, 형제자매를 다 배신해야한다. 데스데모나 역시 오셀로를 선택할 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으며 그걸 감수해야한다. 또 한 사람, 사랑에 눈먼 메데아. 그녀 역시 제이슨과의 사랑을 위해서 조국, 아버지, 형제 자매 모두를 버린다. 이 여자들은 모두 사랑을 선택하고 자신의 운명의 길을 좇아간다.



    그런데 릴빗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릴빗은 가족을 선택하고 펙으로부터 도주해 버린다. 그녀의 선택은 결국 펙을 죽음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펙은 릴빗으로 인해 음주했지만 또 릴빗으로 인해 다시 술을 마시게 되어 결국 7년 후 죽게 된다. 어쩌면 길고 긴 자살 행위인 셈이다.



    펙은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어린 릴빗에게,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가슴을 더듬는 성추행을 한 매우 파렴치한 인물임에 틀림없지만 그 이후에는 릴빗에게 절대 자기 통제를 한다.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며 자동차라는 기계, 길, 그리고 자신을 통제하며 안전 운행을 하듯이 말이다. 7년이란 시간 동안, 릴빗이 18세가 되기 까지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 그동안 그는 다정다감한 이모부이며 연인이다. 그의 과거 역시 미스테리에 쌓여있다. 알콜 중독의 소지가 있었고, 전쟁 중이나 성장 중에 어떤 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제시되지 않는다. 마지막에 릴빗은 차마 물어보지 못한 질문을 던진다. 펙이 죽고난 후에. 이모부에겐 누가 그랬느냐고? 그게 몇 살 때였냐고? 자기처럼 열 한 살이였느냐고. . . 매우 가슴 아픈 질문이다. 이 질문으로 비로소 그녀는 펙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그것도 나약하고 상처받은 인간으로 이해한다. 이 이해는 용서로 이어지며 펙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릴빗이 자신의 상처를 객관적으로 응시하며 벗어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는 자기에게 상처를 준 인물을 이렇게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



    릴빗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그들 사이에 깊은 인간적 교감, 이해,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강요한 그런 관계였다면 지속되지도 않았을 뿐 더러 우리가 신문에서 가끔 보게 되는 그런 (복수)치정극으로 치달았을 지도 모른다. 원하지 않는 관계는 즉시 단절시키는 것이 지혜라는 생각이 들지만 소유욕에 눈이 멀면 이런 통속적 복수치정극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작가는 두 사람의 영웅적(?) 인내심을 보여준다. 릴빗은 눈물을 참고 펙을 떠나고, 펙은 그런 릴빗을 고이 보낸다. 자신이 죽을 지언정 말이다.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생각난다.



    메릴 스트립은 잠시 그곳을 방문한 사진 작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를 혼자 떠나 보낸다. 영화의 장면 중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탄 차가 신호대에서 앞에 서고, 바로 뒤에 남편과 함께 메릴 스트립이 탄 차가 서서, 빨간 불에서 한 참 두 차가 서 있을 때, 여주인공의 오른 손이 떨리면서 우측 문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이 있다. 그녀는 울음을 삼키고 있고 손은 심하게 떨린다. 손잡이를 잡고 비틀어 문을 열고 뛰어나가면 바로 앞 차에 탈 수 있다. 시간도 거리도 충분하다. 물론 마음은 이미 그 차에 타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떨리는 손은 힘없이 그 문의 손잡이를 놓는다. . . 신호는 바뀌고 차는 출발해 각자 갈길을 간다. 영화 중의 백미의 장면이다. 아, 그녀의 선택은 가족이었다.



    릴빗의 마음도 이와 닮지 않았을까? 펙을 두고 떠났기 때문에 대학에서 방황하고 퇴학당하고 술을 마시고 야간운전을 질주하며 어렵게 어렵게 그 아픔을 이겨내는 것이다. 아마 어린 시절의 추행을 이겨내는 것 보다는 이 분리의 고통이 더 컷을 수도 있다.




    감정적으로도 형상화 작업이 무척 어려운 작품임을 나도 고백해야 겠다. 그러나 열심히 그려내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 . 대학로에서 여러분을 만나 겸손히 평가를 기다리는 수 밖에 . . .

덧글 작성하기 -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덧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