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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회]하모니카 부는 남자
    정박미경 / 2014-07-08 05:05:09
  • “아짐, 잘 살고 계셔? 바깥양반 돌아가시고 살기 영 팍팍하다더니 듣기 안 같고 편안해 보여서 좋구마잉”

    “나야 잘 살지요. 바뻐서 먼저 가븐 사람 생각하믄 워쩌것소. 그나 우리 스승님을 만나니 요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구마.”

    “그리 반가우믄 손 한번 잡아보입시더”

    “오매 스승님. 손이 아니라 다른 거라도 다 잡아보입시더.”

     

    일흔을 훌쩍 넘긴 남자와 일흔 가까운 여자는 이렇게 덥썩 손을 잡았다. 웃음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두 사람의 얼굴에 흘러내렸다. 반갑고 고맙고 애틋하고 시린 마음들이 오고갔다. 그리고 애접꿍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때 그 시절, 열다섯 소녀의 그 마음과 무엇이 다르리. 지그시 바라보는 그 눈빛은 몇날이고 계속 애접꿍의 마음에 남아있다. 예순여덟 살에 참석한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애접꿍은 그렇게 첫사랑과 조우했다.

     

    손 한번 잡아보입시더

     

    애접꿍은 해방 이듬해에 태어났다. 다섯 살 때 겪은 한국전쟁은, 물론 애접꿍의 기억에 별로 남아있지 않다. 다만, 인민군인지 군인인지 모를 사람들에 의해 마을 장정들이 한꺼번에 처형당해 마을에는 젊거나 늙은 과부들이 많았고, 다섯 형제의 제삿날이 같은 집이 있었다는 것 정도가 어렴풋이 떠올려진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직후이지만 애접꿍의 유년시절은 행복했다. 끼니를 때우기 힘들어 뒷산 풀을 뜯어 풀죽을 쑤어먹어야 했던 적도 있고, 농사일을 거들고 줄줄이 달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바쁠 때도 있었지만, 솜씨 좋은 목수 아버지를 둔 덕에 지독한 가난은 겪지 않아도 되었다.

     

    애접꿍의 아버지는 그 동네에서 드물게 깨인 분이었다. 다 자란 딸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까막눈으로 만든 부모가 많았던 시절에, 애접꿍의 아버지는 일찌감치 애접꿍을 소학교에 보냈고 덩달아 학교에 보내지 않은 친척들을 설득해 까막눈 딸들이 한글이라도 깨치게 했다. 그러나 그 깨인 아버지도 소학교를 마친 딸을 상급학교에 진학시키지는 못했다. 애접꿍의 아래로 여섯이나 더 되는 동생들이며, 애접꿍 바로 아래 장남과 차남을 교육시키는 것이 먼저였던 것이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일을 거들고 있었던 애접꿍에게 배움은 늘 목말랐다. 소학교 시절에도 누구보다 공부에 열심이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배우려고 한다는 칭찬을 달고 살았고, 군대표로 주판대회에 나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동네의 이름을 드날리기도 했다. 천이백 사십오 더하기 이천구백이십 빼기 사백오 더하기 구백이십칠의 답을, 열 살 남짓의 애접꿍은 자기보다 서너살 나이 많은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며 야무지게 셈해갔던 것이다.

     

    나 공부해도 될까요?

     

    ‘똑부러진다’는 칭찬에 날개를 달아 나날이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었던 그이기에 학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지만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었다. 그러다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동네 청년들이 야학을 연다는 것이다. ‘4에이치구락부 운동’이 애접꿍의 마을에까지 당도한 것이다.

     

    여기서 잠깐, ‘4에이치구락부 운동’에 대해 살펴보자. 4H란 'Head' 'Heart' 'Hand' 'Health'로, 지덕노체로 번역된다. “해방 직후 무지무지한 가난을 떨치고자 미국의 4H 운동을 도입, 농촌의 부흥과 청소년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심어 주었던 청소년 운동”으로 1970년대 "잘 살아 보세" 새마을 운동이 벌어지기 이전에 농촌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던 계몽운동이란다. 1947년 전후 경기도 미군정관 ‘찰스 에이엔더슨’이라는 대령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하며, 주로 마을 청년들을 중심이 되어 4H 단체(구락부, Group)를 조직하고,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을 수행해나갔다. 물론 이 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할 수가 있겠으나 애접꿍이 기억하는 4에이치구락부 운동은 배움의 연장선이라는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그 4에이치구락부 운동의 핵심에 바로 그가 있었다. 애접꿍의 첫사랑인 와룡이다. 마을회관 앞에 마련한 작은 천막에 거적대기를 깔고 앉아 호롱불에 의지하여 A B C를 배우던 그 시절은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호롱불 밑 안그래도 시커먼 얼굴에 그림자까지 겹쳐진 와룡이, 그러나 공부에 대한 열정은 이 세상 누구보다 가득했던 그의 손짓 발짓까지 애접꿍은 기억해낼 수 있다.

     

    와룡이는 애접꿍보다 다섯 살 많은 마을 청년으로, 독학으로 고등공부까지 마친 수재 중의 수재였다. 가난하기 이를데 없는 집 큰아들로 태어나 글자를 깨치기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그는 공부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신조로 삼았고 실천했다. 늘 책을 읽었고 자신이 터득한 것을 어린 학생들과 나누었다. 누가 더 잘 살고 못살고를 따지기가 어불성설인 가난한 촌동네에서 그의 공부욕심은 꺼질 줄을 몰랐다.

     

    그런 그가 4에이치구락부 운동을 주도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공부를 가르칠 장소를 물색하고 아이들을 모으고 아이의 부모를 찾아가 설득하고 가르치는 모든 일을 와룡이는 지극정성으로 해냈다. 평소 공부머리로는 최고이며 성실하기까지 한 와룡이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은 마을 어른들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동네 야학은 성황리에 열렸다.

     

    그러나 최고로 열심인 선생님을 앞에 두고도 학생들은 최고로 열심일 수가 없었다. 학생들은 너무나 바빴던 것이다. 새벽녘부터 해질녁까지 논 두마지기에 모를 심느라 허리가 펴지지 않은 일구, 일곱 식구의 빨래를 해대느라 손에 물집이 잡혀버린 순심이, 갓 낳은 송아지와 어미소의 여물에 쓸 풀을 베느라 온 몸이 풀색이 되어버린 갑식이 등속이 와룡이의 학생들이니 오죽하겠는가. 농사일에 설거지에 빨래에 아기돌보기까지 모든 집안일을 끝내고야 배우러 올 수 있었던 이들은 “아임 어 보이, 유아 러 걸”을 몇 번 복창하기도 전에 머리가 기울어져 간다. 고단한 삶 속의 배움이라니.

     

    그럴 때마다 와룡이는 아이들의 잠을 깨우느라 노래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재미있는 소설 이야기를 해주었다. 간혹 하모니카를 간드러지게 불어주기도 했다. 와룡이의 하모니카 부는 솜씨는 지상의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을 괜시리 울렸다 웃겼다 할 수 있으니 마술피리일 수밖에.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마술피리

     

    특히나 야학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고단한 몸을 뉘일 즈음, 마을 우물 뒤에 배경처럼 서있는 야산의 중턱 바위에서 들려오는 와룡이의 하모니카 소리는 애접꿍 뿐만 아니라 마을 처녀들의 가슴을 쥐어짰다. 그 소리를 더 가까이서 듣지 않으면 잠들 수 없을 것 같은 처녀들이 하나 둘 물 길러 간다는 핑계로 항아리를 이고 나오기 시작한다. 애접꿍 또한 아닌 밤중에 물항아리를 퍽이나 이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몸은 우물로 향하면서 눈은 야산의 바위에 턱 걸터앉아 있는 와룡이의 모습을 쫓으면서 동네 처녀들은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목마른 귀신들처럼 우물가만 배회했더랬다.

     

    난생 처음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을 느끼게 한 와룡이, 애접꿍에게 와룡이는 어떤 존재였을까? 왜 그가 그렇게 좋았던 것일까? 와룡이가 애접꿍의 가능성을 봐준 첫 외간남자였기 때문 아닐까? 먹고 사는데 급급했던 가난한 촌동네에서 그의 학식과 열정, 목표의식 모두 아우라처럼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멋진 아우라를 가진 남자가 애접꿍의 눈을 열어주고 ‘앞날’이라는 것을 생각하도록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애접꿍은 와룡이를 통해 함께 공부하는 즐거움과 배움의 설렘을 느꼈고, 그가 꿈꾸는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고 싶은 열정을 설레임으로 받아들였으리라.

     

    결혼 후의 삶이 고단할수록 와룡이와 함께 공부했던 그 밤들이 떠올려지곤 했다. 한때는 나도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그 공부로 무엇을 하고 무엇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막연히 멋진 인생을 살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멋들어지게 날 수 있는 날개를 갖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날개를 갖고 싶었다

     

    와룡이도 애접꿍을 마음에 두었을까? 그건 확인할 수 없었다. 애접꿍의 설레임은 결국 애접꿍의 이른 결혼으로 개화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 남겨졌기 때문이다. 그 다음해 애접꿍은 도시 부잣집의 유일한 ‘상속자’인 동갑내기 남편과 결혼하면서 고향을 떠났다. 와룡이 역시 옆 동네 부잣집 딸과 결혼하여 탄탄대로를 걸었다.

     

    소문에 의하면 와룡이의 장인 될 어른이 일찍부터 와룡이의 사람됨과 능력을 눈여겨보고서 정략적인 결혼을 추진했다 한다. 와룡이는 이후 이 도시의 유명한 00 건설회사를 직접 세우고 중견회사로 키워냈다. 지난날의 공부가 그의 성공적인 삶의 토대가 되었음은 물론이리라. “역시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애접꿍의 지론은 결국 첫사랑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애접꿍의 인생에 와룡이가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 하겠다.

     

    그로부터 오십년이 훌쩍 흐른 세월 뒤 동창회에서 만난 첫사랑은 투병의 와중이었다. 간암 말기에서 죽다 살아난 스승님은 그러나 청년 시절 그 눈빛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좋아한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우물가만 배회하며 하모니카 소리를 듣던 애접꿍은 이제야 에둘러 그 마음을 표현한다.

     

    “스승님이 있었응께 내가 에이비씨라도 튀었응께요. 에이비씨를 써먹던 못해도 그걸 배웠다는 그 자체가 저한테는 힘이 되었응께요. 그 힘이 살아가는 내내 힘이 되더랑께요. 감사하고 감사해요 스승님.” 우리의 스승님은 예의 그 다부진 입술에 미소만 띠고 있었다. 애접꿍의 손을 꼭 잡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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