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재단이프
  • 이프북스
  • 대표 유숙열
  • 사업자번호 782-63-00276
  • 서울 은평구 연서로71
  • 살림이5층
  • 팩스fax : 02-3157-1508
  • E-mail :
  • ifbooks@naver.com
  • Copy Right ifbooks
  • All Right Reserved
  • HOME > IF NEWS > 문화/생활
  • [26회]조선 필화사건의 주인공 - 이옥봉
    최선경 / 2014-02-03 05:35:27
  • 경복궁 서쪽에 있는 서촌에 가면 효자동이란 동네가 있다. 서울의 북촌과 더불어 요즘 뜨는 동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효자동이 된 유래에는 조선 중기에 살았던 조원(1544~1595)이란 선비와 그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가 얽혀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조원은 임금을 수행하기위해 떠났고 그 아내와 4명의 아들들은 따로 피난을 가다가 왜군을 만난 것이다. 어머니의 목숨을 구하려다가 칼에 맞아 첫째와 둘째 아들 희정, 희철이 사망했다고 한다. 전쟁 후 조정에서는 쌍홍문을 내려 이들 효자의 효심을 기렸다. 당시 조선에서는 여자에게는 열녀, 남자에게는 효자, 충신이라는 정문(旌門)을 내려 상을 주었고 이것은 삼강행실도 등을 통해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백성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했다. 정문이란 조정에서 나무판에 효자, 충신임을 알려주는 글씨를 써서 내리면 붉은 문(紅門)을 세워 그 안에 편액을 걸어두었다. 홍문은 주로 마을 앞 어귀에 세워져 마을의 자랑이 되었다. 『동국여지비고』에는 “이 두 사람으로 인해 마을을 ‘쌍효자 거리’라고 부른다”고 하였고 그것이 효자동의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청와대 가는 옆길에 쌍홍문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고 경복고등학교 교정에는 조원의 호 ‘운강(雲江)’이 쓰여진 운강대 각자가 있다. 조원과 그 아들들만 기록되어 있지만 여성사를 하는 사람에게는 ‘조원’하면 생각나는 여성인물이 바로 ‘이옥봉’이다. 운강 조원의 소실이었던 이옥봉은 허난설헌 만큼 중국에까지 알려진 유명 시인이었다. 

    조원의 소실이 되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내고 옥천군수를 역임했던 이봉에게는 서녀 옥봉이 있었다. 옥봉은 그녀의 호이고 이름은 ‘원’이다. 전주 이씨라서 왕족의 후예라는 자존감이 강했다. 비록 서녀였지만 어릴 때부터 글과 문장이 뛰어나 이봉은 딸을 특별히 사랑했던 듯하다. 옥봉이 아마도 10대 중반이었을 텐데, 그녀는 어차피 양반의 소실로 시집가야 한다면 자신이 선택하고 싶다고 하여 찾은 남자가 바로 조원이다.

    당시 조원은 남명 조식(1501~1572)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20대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사간원의 정언을 지냈으며, 시와 문장이 뛰어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홍문관과 사헌부와 더불어 사간원은 언론관에 해당하는 삼사의 요직이었으니, 조원의 강직한 성품과 문장에 뛰어났던 점이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당시 조원은 이미 혼인을 한 상태였는데, 옥봉의 아버지가 찾아가 자신의 딸을 첩으로 들일 것을 요청하자, 당연히 그 즉시 거절을 당한다. 그러자 이봉이 찾아가 설득한 사람은 다름 아닌, 조원의 장인이었다. 장인어른까지 찾아와 조원에게 첩을 들일 것을 권하자 조원은 옥봉을 소실로 맞아들이게 된다. 조원의 장인인 이준민(1524~1590)은 첩을 거부하는 것이 “장부답지 않은 처사”라고 하며 사위에게 첩을 들이게 하였으니, 지금의 상식으로는 참으로 이해가 안되는 모습이다. 아버지 이봉의 입장에서는 조원의 소실이 되는 것이 딸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으리라.

     

    이후 옥봉은 삼척부사로 부임하는 조원을 따라 함께 지내며 몇 년 동안 행복한 나날을 보낸 듯하다. 삼척으로 가는 길에 영월에서 노산군 단종을 생각하며 지은 ‘영월도중(寧越道中)’이라는 시가 있다.

     

    성문 밖 닷새길을 사흘에 넘으니                                五日長干三日越

    슬픈 노래 부르다 끊긴 노릉엔 구름만 둥실                 哀詞吟斷魯陵雲

    이 몸 역시 왕손의 딸                                              妾身亦是王孫女

    이곳 두견새 소리 차마 듣지 못 하겠네                      此地鵑聲不忍聞

       

    필화사건으로 쫓겨나는 여인

     

    그러나 행복한 시간도 잠깐, 옥봉이 우연히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 쓴 글이 계기가 되어 쫓겨나는 사건이 벌어진다.

    옥봉과 알고지낸 이웃집 여인이 백정이었던 자신의 남편이 억울하게 소도둑으로 몰려 관아에 잡혀갔으니, 조원에게 소장을 써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옥봉이 생각컨데 남편이 해줄 것 같지 않으니, 자신이 대신하여 시 한편을 써 주었다. 그런데 그것이 사대부 관리들의 감탄을 자아낼 만큼 뛰어났던 것이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爲人訟寃)>

     

    세숫대야를 거울삼고                          洗面盆爲鏡

    물을 기름 삼아 머리를 빗으니              梳頭水作油

    첩의 몸 직녀가 아닐 지온데,                妾身非織女

    님인들 어찌 견우이리오.                     郞豈是牽牛

     

    견우와 직녀에 비유하여 ‘거울이 없어 세숫대야를 거울삼고 기름이 없어 물을 기름처럼 사용할 정도로 도저히 직녀일 수 없는 비천한 여인인데, 어찌 자신의 남편이 소를 모는 견우일 수 있겠냐’는 것이다. 즉 남편은 소를 훔쳐간 도둑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있다. 남편을 구해달라는 구구절절한 탄원서가 아니라 비유와 은유로 응축된 시 한편으로 관리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당연히 관아에서는 누가 쓴 시인지를 캐물었을 것이고 그것이 조원의 소실인 옥봉이라는 것이 알려진다. 덕분에 그 남편은 풀려나게 되었다. 관리들은 조원을 찾아와 옥봉의 시를 칭찬하려 한 것인데, 오히려 조원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화를 내며 옥봉을 내쫓았던 것이다. 여자가 사사로이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여 나랏일에 관여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자네는 지금까지 나와 여러 해 동안 지내면서 실수하는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어찌 백정의 처를 위해 시를 지어주어 감옥의 죄수를 풀어주게 하여 남의 이목을 번거롭게 하는가? 그 죄가 커서 어쩔 수 없으니 즉시 자네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게!”

       

    그래도 그립다. “돌길이 모래가 되도록 넋이라도 그대 곁을 찾아가리”

     

    쫓겨나간 옥봉은 이후에도 수없이 잘못을 용서하는 편지와 시를 보낸 듯하다. 하지만 조원은 냉혹하게도 그 뒤로 다시는 옥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그녀가 지은 가슴 절절한 시가 ‘몽혼(夢魂)‘이다. 꿈속의 넋이 얼마나 많이 오갔으면 길가의 돌이 다 모래가 되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사랑의 시로 본다면 최고의 애절한 시가 아닐까 한다.

     

    요사이 안부를 묻노니 어떠하신지요?              近來安否問如何

    달 밝은 창가에서 이내 몸 한이 많습니다.        月白紗窓妾恨多

    꿈속 넋으로 하여금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若使夢魂行有跡

    문 앞의 돌길 이미 모래가 되었을 것을.            門前石路已成沙

     

    하지만 그 배경을 알고 나면 굳이 자신을 내친 조원에게 그토록 매달릴 필요가 있었을까? 지금까지 당당했던 옥봉의 이미지가 갑자기 구차해지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시 만큼은 뛰어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당시 조선사회 현실을 이해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그것도 소실 신분인 여자가 남편에게서 내쳐지면 앞으로의 살길은 절망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으로 목숨을 끊다. 옥봉에 관한 괴소문

     

    이러한 옥봉의 애절한 사연은 당시에도 꽤 알려진 듯하다. 그러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조원은 관리로서 선조 임금의 피난길을 수행하느라 한양을 떠났다. 그 사이 옥봉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전쟁 중 사망 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녀의 한이 얼마나 컸으면 그녀의 죽음에 관해 이수광(1563~1638)의 [지봉유설]에는 신기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수광의 지봉유설

       

    중국 동해안에서 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몸에 한지가 둘둘 싸여 있었고 그것을 열어보니 옥봉의 시가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그로인해 옥봉의 시가 중국에서 출판되어 유명해졌다고 한다. 확인할 길 없는 황당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만큼 당시 옥봉에 관한 흉흉한 소문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대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는 한양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이는 조원에게는 불리한 여론으로 발전한 듯싶다.

     

    조원에게서 내쳐진 옥봉의 시를 수십년 후에 조원의 후손이 엮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조원의 후손인 조경망(1629~1694)이 1704년(숙종 30)에 편집한 [가림세고(嘉林世稿)]는 운강 조원과 그 아들 조희일, 손자 조석형의 글을 묶은 것인데, 여기에 옥봉의 시 32편을 부록으로 엮었다. 뒤늦게 왜 옥봉을 복권이라도 하듯 조원의 문집에 함께 엮었을까? 뒷부분에 옥봉의 행장을 기록하였는데 말미에 “우리 선조의 관대함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옥봉의 재주가 승함을 미워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하며 마치 조원의 선택을 변호하듯이 썼다. 이는 옥봉의 뛰어남을 수용하지 못한 조원의 옹졸함을 비판하는 여론이 당대에도 있어왔고 더욱이 옥봉의 시가 중국에서도 이름을 날리니, 이를 무마하기 위해 후손이 기록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다행히 우리는 잃어버릴 뻔 했던 뛰어난 여성시인을 한명 더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의 시는 모두 사적인 영역에서 쓰여진 것들이다. 기생들의 시나 여성 문인들의 시가 모두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관청의 판결을 좌지우지하는 공적인 문서로 쓰였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사례가 옥봉의 경우이다. 옥봉은 과연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고 싶은 의도가 있었을까? 억울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재주를 이용한 것이 남용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정도를 가지고 부인을 내치기까지 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처사인지, 그럼에도 그러한 남자를 못 잊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옥봉의 필화사건은 오늘날에도 여러가지 논란거리를 남긴다. 


     




     

    글 최선경
덧글 작성하기 -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덧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