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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회]수덕사에서 만나는 신여성 3
    최선경 / 2014-01-20 08:22:38
  • -나혜석, 수덕사에 가다 / 글 김소원

     

    나혜석은 기독교의 은혜를 입은 여성이다. 나혜석뿐 아니라 대부분의 신여성은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다. 신여성들은 기독교의 세례 속에서 전통에서 조금씩 벗어났고, 벗어나려고 했다. 기독교의 세례 속에서 근대에 눈떴고, 근대를 싹틔운 서구를 동경했다. 그녀는 1920년에 한 결혼식도 웨딩드레스를 입고 교회에서 할 정도였다.

    그렇게 기독교의 세례를 받은 여성들이 수덕사에 모였다. 김일엽은 이미 스님이 되어 있었고, 나혜석은 스님이 될까 생각하였다. 실제로 나혜석이 승복을 입은 사진이 공개되었고, 나혜석의 조카인 나영균이 쓴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을 보면 승복을 입고 자기 집에 찾아온 고모 나혜석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스님이 되지는 않았다. 수덕사의 만공 스님이 나혜석은 중이 될 수 없는 인물이다, 하였다는 말도 있고, 나혜석이 원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김일엽과 나혜석은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이 대상이었는데, 나혜석이 두 사람 모두 스님이 될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신여성이라고 불리던 여성이 중이 되었네, 하는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엽스님과 나혜석(출처:http://blog.naver.com/sunwoojo1/60042923613)

     

    나혜석은 소위 잘 나가는 여성이었다. 여성으로서 유학길에 올랐고, 세계 여행을 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살았던 한반도에서 이혼한 여성이 살아갈 방도는 없었다. 그것도 이혼의 사유가 불륜이었으니.

    그녀 남편 김우영은 만주 안동현 부영사 일을 마치자 일제는 노고에 답하는 응대로 유럽 여행이라는 선물을 안겼다. 그녀는 1927년 6월 부산을 출발해 1929년 3월에 돌아오는데 1927년 프랑스에서 최린(1878∼1958)을 만난다. 나혜석 부부는 여행을 같이 하기도 했지만 법률을 공부하려는 남편과 떨어져 있기도 했다. 최린은 삼일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지만 친일 명단에 오른 인물이다. 귀국한 뒤 최린과의 외도가 남편 귀에 들어갔고, 남자가 딴 남자와 놀아난 여자와 같이 산다는 주위 사람들 시선에 자유로울 수 없었던 남편은 이혼을 요구했다. 나혜석은 이혼을 거절했지만 1930년 11월에 결국 이혼하게 된다.

     

    <삼천리>에 ‘이혼고백장’을 발표하다

     

    이혼한 뒤 그녀의 궤적을 보면,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지금 이혼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누가 이혼한다고 하면 가정 폭력, 도박 같은 큰 문제가 아니라면 이혼하지 말고 대충 살라고 조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만큼 이혼 뒤의 삶이 팍팍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도 그렇고, 사회의 시선에 위축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금강산 여행도 하고, 오빠가 있던 만주 봉천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조선미술전람회, 제국미술전람회(일본 개최)에서 작품이 특선이 되거나 입선이 되면서 화가로서 빛을 내기도 했다. 1933년에서 ‘여자미술학사’를 열어 여자들에게 미술 개인지도를 해줄 의향이었으나, 수강생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여성이 미술을 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이 있었는데 여성도 미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려고 했던 점에서 여자미술학사의 일은 좀 더 연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즈음부터 나혜석의 그림은 공식석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전해에 화재로 그려놓았던 그림이 사라지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녀는 잡지에 글을 쓰면서 그 원고료로 생활비를 썼던 것 같다. 1934년에 그녀는 잡지 <삼천리>에 그 유명한 ‘이혼고백장’을 발표한다. 그 반향인지 다음해에 열었던 ‘소품전’ 전시회를 열었지만 손님이 들지 않았다.

     

    그 뒤로 그녀는 수덕사로 가서 김일엽을 만났고, 스님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수덕여관에 머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임 이응로가 나혜석을 만나러 수덕여관에 왔고 나혜석이 떠난 뒤 이응로는 수덕여관을 사들인다. 이응로 역시 유부남이었지만 박인경이라는 여성과 만나 독일로 함께 유학을 가면서 수덕여관은 그의 첫째부인이 지키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인연이, 박인경이 1947년에 나혜석을 만난 것이다. 그때 박인경은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사촌오빠가 운영하던 안양의 경성보육원에 화가가 들어와 있으니 한번 만나 보면 어떻겠냐는 연락을 받는다. 박인경이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그때까지 자기는 나혜석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당대를 풍미했던 나혜석이 10년 만에 미술학도가 이름도 모를 정도로 사라졌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그럴 수 있을까?

     

                                                                      ▲복원 전 수덕여관 모습(사진:두산백과)

     

    그녀의 그림은 1933년부터 공식석상에서 사라졌지만, 1938년 <삼천리>에 ‘해인사의 풍광’을 마지막으로 글은 계속 발표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0년도 되지 않아 미술학도도 이름을 모르는 여성이 되었다. 화가로서의 가치가 그녀의 이혼과 이혼고백서, 위자료 청구 소송이라는 사건 속에서 사회의 질타를 받으며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닐까. 전통과 근대가 혼용되어 있는 식민지 사회에서 나혜석의 급진적 행보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고, 그런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행려병자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닌지!

    자신의 이혼을 까발리지 않고, 최린에게 위자료를 요구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면 최소한 그녀가 행려병자로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혜석의 생각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나혜석의 이혼고백장 일부를 살펴보자. 그녀의 이런 생각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신지요? 우리 여성문화유산연구회에서 나혜석을 찾아 수원에 답사를 갔을 때 나혜석은 가정을 유지시키지 못한 여성인데 나혜석에 대해 왜 답사하는지 모르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또 내가 출판사에 근무할 때 어린이책으로 나혜석 인물책을 내려고 기획했는데 출판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불륜을 어린이들한테 설명하기 난감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내가 그때 이런 말을 하였나이다.

    “나는 공(최린을 말함)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남편과 이혼은 아니하렵니다.”

    그는 내 등을 뚝뚝 뚜드리며

    “과연 당신의 할 말이오. 나는 그 말에 만족하오.”

    하였사외다.

    나는 제네바에서 어느 고국 친구에게

    “다른 남자나 여자와 좋아지내면 반면으로 자기 남편이나 아내와 더 잘 지낼 수 있지요.”

    하였습니다. 그는 공명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이 있는 것은 필경 자기가 자기를 속이고 마는 것인 줄은 모르나 나는 결코 내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 즉 C를 사랑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나이다. 오히려 남편에게 정이 두터워지리라고 믿었사외다. 구미 일반 남녀 부부 사이에 이러한 공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또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중심되는 본부나 본처를 어찌 않는 범위 내의 행동은 죄도 아니요, 실수도 아니라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에나 동경 사람쯤 하더라도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이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에게 정조를 유인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 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이혼고백장’ (《경희(외)》/범우)에서 재인용


     글 김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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