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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회]수덕사에서 만나는 신여성 2
    최선경 / 2014-01-10 06:03:28
  • -나혜석, 여성으로서 화가라는 이름을 얻다 /  글 김소원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나혜석이 미술을 공부하러 일본에 간 것은 1913년이었다. 진명 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 해이다. 동경미술여자전문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고희동(1886-1965)은 1910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고, 그 뒤를 김관호(1890-1959), 김찬영(1893-1960)이 잇따랐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네 번째로 서양화를 공부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고희동은 서양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더 이상 서양화를 그리기 어렵다고 판단해 한국화로 돌아섰고, 김관호는 1916년 평양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화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지만 1928년 뒤로 붓을 놓았고, 김찬영은 김관호와 함께 미술단체 겸 연구소인 ‘소성회’를 만들기도 하였지만 일선에서 사라져 버렸다. 서양화 1세대의 이러한 행보는 고희동이 밝혔던 스케치 박스를 엿장사니 담배장사니 하고 비아냥거렸다는 그때의 서양화에 대한 인식과 맞물려 있었을 것이다.

     

                           ▲나혜석 선생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여권운동의 선구자인 정월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에 비해 나혜석은 결혼과 임신, 이혼, 세간의 풍문에도 그녀가 선택한 그림 그리기 삶을 계속 이어나갔다는 점에서 남다른 행보를 확인할 수 있다. 나혜석이 입학한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는 일본에서도 여성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유일한 학교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여성의 영역으로 생각하던 편물, 재봉, 자수 같은 분야에 몰려 있었다. 까미유 클로델이 로뎅을 처음 만났던 1881년의 파리도 여자들은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금지되어 있었으니 여성이 미술을 공부할 수 있다는 인식이 제대로 퍼져 나가기 전인 식민지의 나라에서 여성이 서양화를 한다는 것은 보통의 용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 인생에게 미감을 가장 보편적으로 주며 무형한 행복을 누리게 하는 그림을 어찌하여 그다지 천시를 하였으며 시 짓는 부인이나 글씨 쓰는 여자는 더러 있어도 채색 붓을 들어 화폭을 항하여 앉는 부인은 한 사람도 없었는가 하는 애석한 생각이 가슴에 떠돌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조선 여자는 결코 그림을 배우지 않으려 하니까 그렇지, 만일 배우고자 할진대 반드시 외국 여자 능히 따르지 못할 특점이 있는 실례를 나는 어느 고등 정도 여학교에서 도화를 교수하는 동안에 발견하였습니다.”(동아일보/ 회화와 조선 여자/ 1921. 2. 26)

     

    위 글을 보면 나혜석은 채색에 관심이 있어서 서양화를 공부하지 않았나 싶다. 나혜석은 1921년 3월에 경성일보사(조선총독부의 일어판 기관지)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이 전시는 서울에서 열린 첫 전시로 풍경, 인물, 정물 그림 70여 점을 출품하였는데 5천 명의 인파가 다녀갔다고 한다. 나혜석의 전시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는데, 그림에 대한 관심인지 나혜석에 대한 관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무희 1927~1928년, 유화, 40 x 34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이미지 갤러리 

                        (출처: 미술대사전(인명편) [네이버 지식백과] 나혜석 [羅惠錫] (미술대사전(인명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나혜석, 근대를 실천하다

     

    나혜석은 1913년 진명을 졸업할 때에도 1등으로 졸업한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고, 전시회를 열기 1년 전에 했던 결혼식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신여성1세대들의 행보는 늘 사람들 관심의 대상이었다. 신여성 가운데 자유연애를 주장하였던 급진주의자였던 김일엽, 나혜석, 김명순의 행보는 신문이나 잡지에 보도되었고,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마치 지금의 연예인에 가까운 관심을 받았던 듯하다.

     

    나혜석을 말할 때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하는 것처럼 나혜석에게는 ‘최초’라는 말이 수식어로 많이 따라붙는다. 그녀는 1918년 <여자계>에 <경희>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한다. 이 소설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근대문학’으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경희> 발표에 앞서 역시 신여성1세대인 김명순(1896~ 1951)이 1917년에 <의심의 여자>를 발표하였기에 최초는 김명순에게 양보해야 할 것이다. 사실 누가 최초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 근대작가로는 이광수를, 작품은 <무정>을 뽑고 있는데, <무정> 역시 1917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비슷한 시기에 작품이 발표되었지만, 우리들에게는 근대소설을 연 이로 이광수만 기억하고, 논하는 것이 문제이다.


    <경희>를 발표한 <여자계>는 동경에 있는 ‘일본여자유학생친목회’에서 1917년 12월에 창간한 잡지이다. <경희>는 일본으로 유학을 간 ‘경희’의 삶의 고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제 공부는 그만하면 되었으니 시집이나 가라는 아버지의 요구에 맞섰던 나혜석의 삶이 담긴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혜석은 아버지의 요구에 따르지 않은 것처럼 경희도 자기가 공부를 왜 하고, 여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한다. 결론은 아버지의 요구대로 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자아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근대라고 한다면, 나혜석은 그 근대를 일찌감치 고민하고 실천한 여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혜석의 작품 <등을 보인 나부>(연대불명&#8228;왼쪽)와 <자화상>(1928).(출처:오마이뉴스)

     

    신여성과 된장녀

     

    한동안 된장녀라는 말이 유행했다. 카페에 앉아서 원두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하는 여성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도도한 척 앉아 있지만 집에서 된장찌개를 먹고 나왔다는 비아냥거림이 포함된 용어였다.

    카페에 앉아 있는 여성을 비아냥거리는 데는 그 여성은 사치한다는 의식, 허영덩어리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 조금 틔워 보이는 여성의 행동은 늘 도마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면, 우리나라에 근대가 도입되면서 여성의 행보에 이러쿵저러쿵한 거와 다르지 않다. 전통과 근대가 부닥치던 1910년대에 우리나라에는 ‘신여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이 신여성이라는 말은 1940년대까지 쓰였으니 전통사회에서 보여주던 다른 모습의 여성들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꽤나 컸던 듯하다. 물론 여기에는 근대에 대한 찬미가 함께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이런 신여성들은 소비문화를 이끌면서 사치와 허영의 온상지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지금의 된장녀처럼 말이다. 1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여성의 상황은 그리 나아진 것 같지 않다. 나혜석은 “‘여학생을 비평하는 표준이 극히 단순하고 극히 애매하고 극히 유치’ 하다 하였다. 그리고 ‘사치를 마시오, 검박들 하시오 그리하여야 조선은 문명합니다’라는 내용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지만 ‘하등의 계급을 불문하고 검박하라 제안하는 것은 무리의 청구요, 뿐만 아니라 인류의 진화적 형태를 무시하는 형태’라고 평하였다. 사회의 부가 증대함에 따라 ‘작일의 사치품이 금일의 실용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야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다.”(《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김경일)에서 재인용) 하는 말을 남겼다.

    자신을 꾸미는 것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니까 ‘인류의 진화적 본능’이라는 것이다. 나혜석이 살았던 시대는 일제강점기였다. 우리나라는 식민지 나라였고, 그녀의 남편은 제국주의의 공무원이었다. 그녀는 삼일운동 때 옥살이를 하였고, 후대에 남편이 만주의 안동에 부영사로 있을 때 독립투사를 도와주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라의 독립운동을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보인다.

     

    그녀의 관심은 개인성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것이 그녀가 생각한 근대가 아니었을까. 화가라는 직업을 갖고 있기에 아름다움에 더 관심이 많을 수도 있는데, 인간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에 일제 편에서 절약을 외치는 자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마찬가지 이유로 민족의 해방을 위해 절약을 외치는 사람들 편에 설 수도 없었던 것이다.

    개인성을 강조한 나혜석은 지난호에서 살펴본 김일엽과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이다. 그녀의 정조관은 김일엽보다 더 급진적이었는데, ‘정조는 취미’라고 말할 정도였다. 21세기, 오늘날도 공개 지면에 정조는 취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여성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나도 못한다.

     

    그녀 앞에 붙는 ‘최초’의 수식어는 여성해방운동가에도 붙는데, 동경 유학생 잡지였던 <학지광>에 1914년에 쓴 ‘이상적 부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여성 인권론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 글에서 나혜석은 양처현모 교육을 비판하였는데 전통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하였던 가치들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가정에 종속되는 여성의 삶에 대해 늘 관심을 가졌고, 유럽 여행에서도 여성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관심을 갖고, 글을 발표하였다. 어느 인터뷰에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묻자, 여성운동을 하고 싶다 답하였다. 어찌 보면 여성의 해방이 온전한 근대가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나혜석이 지금의 여성 형편을 보면 뭐라고 할까, 좀 나아졌다고 할까, 아님 겉으로는 나아진 것 같지만 속은 크게 변화가 없다고 할까, 아마 후자가 아닐까 한다.(계속)

     

    글 김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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