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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회]숙정문을 닫아라! 음기가 강해지니~
    최선경 / 2013-11-26 02:14:26
  • 한양이 조선의 수도가 된지 600년, 수도 서울을 방어할 목적으로 조성된 성곽은 지금 서울관광의 중심이 되고 있다. 서울시는 한양도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기 위하여 지난 10월 25일~30일 “성곽도시 서울의 재발견”이라는 제목으로 한양도성주간을 진행하였다. ‘하루에 걷는 순성놀이’, ‘스토리텔링 경연대회’, ‘한양도성 달빛기행’ 등 다채로운 행사가 벌어졌다. 도성길이 수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최근의 일이 아니라 이미 조선시대에도 유행했었다. 또한 청와대 바로 뒤편에 있어 2006년에야 개방된 북악산 코스의 숙정문이 여성과 관련있다는 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조선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태조 5년(1396) 북쪽의 북악(혹은 백악), 동쪽의 낙산(혹은 타락산), 남쪽의 남산(혹은 목멱산), 서쪽의 인왕산 4개의 내사산(內四山)을 연결하여 성곽을 쌓았다. 그리고 동서남북에 큰 대문을 만들었는데, 동쪽에는 흥인문, 남쪽은 숭례문, 서쪽에는 돈의문, 북쪽에는 숙정문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음양오행과 다섯 방위에 따른 인의예지신 유교사상이 담겨있다. 북쪽은 물(水)과 지(智)에 해당되는데, 다른 이름과 달리 북대문에는 ‘지’자를 넣지 않고 숙정문(肅靖門)이라 한 것이 특이하다. 숙정이란 ‘엄격하고 바르게 잡고 단정히 한다’는 뜻이 담겨있지만, 왠지 과거 여학생들에게 많이 요구되던 ‘정숙’의 의미와 상통하는 것 같다.

     

    태종 13년(1413) 6월에 풍수가인 최양선이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정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리자, 마침내 이 문을 폐쇄하고 주변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숙정문은 원래 북악산 중턱에 있어서 평상시에도 통행이 거의 없기 때문에 문을 닫아놓아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그 의도는 다른 데에 있었다.

     

                                                                                       ▲숙정문
     

    19세기 중엽 편찬된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숙정문을 열어놓게 되면 음기(陰氣)가 번성하여 장안의 부녀자들이 놀아나게 되고, 따라서 도성의 풍기가 어지러워지기가 일쑤로 항상 문을 꼭꼭 닫아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표면상으로는 풍수상 안 좋다며 닫아놓았던 이유가 사실상 도성 안 여자들의 풍속을 단속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도 도성 안에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하고 음기를 받기 위해 북문을 열었다. 북쪽은 음양오행 중에서 물과 음에 해당되기 때문에 양(陽)에 해당하는 남쪽의 숭례문을 닫고 북쪽의 숙정문을 열어 음의 기운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명종 12년(1557) 6월 24일 전교하기를,

    “근일 가뭄이 극심해서 비를 바란지가 오래인데 비가 올 듯 하면서 오지 아니하니 매우 걱정스럽다. 기도하는 일을 거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내일 오관산 등에서 기우(祈雨)한 다음에 형편을 보아서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고 피고(皮鼓:북)를 치지 말고, 저자(시장)를 옮기는 등의 일도 거행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금년에는 무(巫)·맹(盲) 및 소동(小童)의 기우를 아직 거행하지 않았으니 또한 전례를 상고해서 아울러 거행할 것으로 예조에 이르라.” 하였다.

     

    여성의 외출을 금하고자 했던 조선 정부

     

    조선시대에는 부녀자가 나들이를 하면 장(杖) 100대에 처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법이지만, 유교적 가부장 사회에서는 그것이 상식이었다. 조선초기부터 조정에서는 사대부 여성들의 외출을 규제하려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태종 4년(1404) 예조에서 상소하였다.

    “예(禮)에 상고하면 부인이 중문(中門)을 나오면 반드시 얼굴을 가리고, 외출할 땐 가마를 타니, 이는 의혹을 없애고 미리 방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나라 풍속에 부녀자가 나들이를 하려면 평교자(平轎子)를 타는데, 종들로 하여금 사면에 부축하게 하고, 막고 가린 것이 없어서 가마꾼들과 더불어 옷깃을 접하고 어깨를 비비게 되니, 흉허물 없이 가까이하고 업신여기어 식자(識者)가 부끄럽게 여기는 바인데, 지금까지 고치지 못하였으니 어찌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까? 이제부터는 3품의 정처(正妻)는 지붕이 있는 가마(옥교자)를 타게 하고, 그 나머지는 말을 타고 평교자를 타지 못하게 하소서.”

     

    세종 13년(1431) 대사헌 신개 등이 상소하기를,

    “예에, ‘부인은 낮에 뜰에서 놀지 아니하고, 까닭 없이 중문을 나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성인의 부도(婦道)를 근엄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본조(조선)의 부녀자들은 전조(고려)의 폐풍(弊風)을 인습하여, 매양 채붕(綵棚)·나례(儺禮) 및 큰 구경거리가 있을 때마다 거리에 다투어 모여서 장막을 성하게 설비하며, 혹은 누각(樓閣)의 난간에 기대어 얼굴을 내놓고 마음대로 보면서 부끄러워함이 없사오니, 부도에 어그러짐이 있을 뿐 아니라, 사신을 영접할 때에 실례를 저지를까 지극히 걱정스럽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 부녀의 구경하는 놀이를 일절 금하고 억제하여, 폐풍을 개혁하고 부도를 바르게 하옵소서.”


    조선을 세운 유학자들은 <예기>의 가르침대로 여성의 활동 범위를 집안에만 가두어두려 하였다. 유교경전의 하나인 <예기>에는 ‘남녀가 일곱 살이 되면 자리를 함께하지 않으며, 여자가 열 살이 되면 문밖을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옷감 짜는 일을 배운다’고 하였으니, 그 이전 시대부터 이어온 자유분방한 여성들의 외출 모습이 도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태조 초부터 시작된 논쟁은 태종과 세종 대에도 계속 되었고, 마침내 성종시기에 완성된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부녀자 외출금지 조항이 만들어졌다.

     

    '부녀로서 절에 올라가는 자, 사족의 부녀로서 산간이나 물가에서 놀이 잔치를 하거나 야제(野祭), 산천 ․ 성황의 사묘제를 직접 지낸 자 등을 모두 장 100대에 처한다'고 결론지은 것이다. 이로서 여성의 자유로운 외출은 금지되었고 외출을 하려면 얼굴을 감추는 장옷이나 너울, 사방이 막힌 가마를 사용해야만 했다.

     

                                                                      ▲장옷 입은 여인(신윤복), 18세기

     

    금하고자 하나 금할 수 없는 여자들의 나들이 욕망

     

    하지만 상소문에서는 뜻밖의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조선 초기 여성들은 외출할 때, 조선시대 고위 관리들만 타고 다닌 것으로 알려진 평교자를 타고 다녔으며, 남편이 당상관 이하인 여성들은 주로 말을 타고 다녔다는 사실이다. 즉 양반 여성 대부분은 말을 타고 다녔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구경거리가 있을 때마다 거리에 장막을 치고 나와 구경을 할 정도로 매우 극성스러웠다. 세종 때 신개의 상소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채붕, 나례 등 큰 구경거리에 양반 여성들이 앞 다투어 구경을 나왔다고 한다.

     

    ‘채붕’이란 신라 진흥왕 때 팔관회에서 설치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왕이나 사신의 행차나 불교행사를 환영하거나 구경하기 위해 만든 오색 비단 장막을 늘어뜨린 장식무대를 말한다. 지위가 높은 귀족들은 그런 곳에서 행사 구경을 했던 것이다. ‘나례’란 귀신을 쫓기 위해 행해지던 풍습인데,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마귀와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지내는 의식이다. 고려 때에 민가와 궁중에서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나쁜 귀신을 쫓는 의식은 조선 왕실에서도 많이 행해졌고 국장행렬 맨 앞에 방상시가 있는 것도 그러한 풍습에서 유래하였다. 조선 유학자들이 보았을 때 불경스럽고 예의에 어긋나는 ‘놀이’란 결국 알고 보면 우리 민간에서 오랫동안 전해져 온 민속놀이이거나 공동체 놀이였던 것이다.

     

    여성의 행동을 규제하고자 했던 관리들의 거듭되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사신이나 왕의 행차를 구경하는 것, 부녀자들이 사비를 들여 불사(佛事)를 행하는 것은 결국 규제하지 못하였다. 불사는 왕비나 대비, 공주 등 왕실 여성들이 왕실의 안녕과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반대할 수 없었다. 또한 왕의 행차를 구경하러 나오겠다는데, 양반 여성이라 해서 부득이 막을 이유가 왕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양반 남성들과 왕실의 간극이었다.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양반 부녀자에게 장을 친다는 것 역시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현실과 이상적 원칙은 서로 달랐던 것이다.

     

    왕권강화와 유교국가의 기틀을 잡은 태종조차

    “나라에서 행하는 불사는 내가 이미 그만두었으나, 궁중의 부녀들이 그 아들의 수명을 연장하기를 바라서, 사재(私財)를 써서 수륙재를 행하니, 금(禁)하고자 하나 금하지 못한다.” 하였다.

     

                                                        ▲사계풍속도 중 화류유희(작자미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법으로는 금지되었으나 조선 여인들의 꽃놀이, 행차구경, 불사, 치성들이기는 계속되었다. 영조실록에도 사신의 행차를 보러 사대부집 부녀들이 길 옆에서 구경했다거나, 도성 가까이에서 굿을 하며 온종일 낭자하게 기도하는 음사(淫祀)가 많이 행해졌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도성 밖에는 도성 안에 들어올 수 없었던 사찰들이 생겨났고 신사와 성황당에 치성을 드리러 찾아오는 여성들의 왕래가 많았다. 삼청동 계곡 등 수석이 아름다운 경승지에는 나들이 나온 여성들로 넘쳐났다.

     

    금하고자 하나, 금할 수 없는 여성들의 나들이 욕망은 성곽돌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둘레가 약 18Km에 이르는 한양도성에는 특히 꽃피는 봄, 여름철에 성안 사람들이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도는 순성(巡城)놀이가 유행했다. 조선후기 한양사람들의 풍속도를 기록한 <경도잡지>에는 “도성을 한바퀴 빙 돌아서 도성 안팎의 화류(花柳)구경을 하는 것이 멋있는 놀이인데, 새벽에 출발해야 저녁 종 칠 때에 다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지금도 성곽을 하루에 도는 것이 어려운데, 당시 사람들이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에 끝내는 도성돌기가 유행할 정도였으니, 우리 민족이 노는 것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그 좁은 길을 따라 순성놀이에 나선 조선시대 풍경을 한번 상상해보라! 남녀유별과 품위를 따지는 사람에게는 천박하고 음란해 보였을 수도 있겠다.

     

    21세기 숙정문이 열렸다. 그래서일까?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음기충천한 여성의 시대가 되었다.

     

                                                                   
    ▲2013년 서울 한양도성 야경 (서울시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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