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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회]수덕사에서 만나는 신여성 1
    최선경 / 2013-11-19 02:39:41
  • *글 김소원

    지금 우리나라 온 산천이 단풍이 한참이다. 예산에 있는 수덕사도 아름다운 색깔을 뽐내는 산자락에 폭 싸여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수덕사는 비구니 사찰로 생각한다. 어쩌면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로 시작하는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수덕사 하면 떠오르는 일엽 스님이나 나혜석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덕사는 비구 사찰이고, 경허 스님, 만공 스님이 지금의 수덕사를 일구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공 스님은 무엇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불교로부터 우리나라 불교를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비구니승을 제자로 받아들이는 깨어 있는 분이기도 하다. 그 비구니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일엽 스님이다.

     

    김일엽을 만나다

     

    일엽 스님의 이름은 김일엽. 본명은 김원주이다. 일엽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일본 유학시절에 만난 이광수가 일본의 신여성작가인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의 이름에서 따 지어준 것이다.

    견성암은 수덕사 일주문을 지나 왼쪽 편에 있는 암자이다. 견성암에서 김일엽은 일엽 스님이 되어서 수도 정진하였다. 그런데 1935년에 <개벽>에서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자신을 ‘하엽(荷葉)’이라 부른다고 하였는데, 어쨌든 지금 우리에게는 일엽 스님으로 이름이 남아 있다.

     

                                                                        ▲<견성암> 일엽 스님이 정진하던 암자.

    덕숭산 자락에 있는 암자들 가운데 비구니승이 정진하는 곳이 많다. 그래서 수덕사에서 여승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김일엽은 1920년에 <신여자>를 창간하였다. 3월호, 4월호, 5월호, 6월호를 내고 폐간되고 말았는데 여성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잡지로 그 의미는 매우 크다. <신여자>를 통해 김일엽은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점, 여자 교육이 필요하다는 글을 발표하며 ‘여성’이라는 개인의 삶에 대한 글을 다수 발표하였다. 놀라운 건 이때 발표한 여성의 문제는 지금도 유효하다는 점이다.

     

    ‘신여성’이라는 말이 많이 유행하기 전에는 ‘신여자’라는 말이 더 쓰였는데 <신여자>라는 잡지 이름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23년에 개벽사에서 <신여성> 잡지가 나오면서 ‘신여성’이라는 말이 주로 쓰이게 된다. 김일엽(1896~1971)은 나혜석(1896~1948), 김명순(1896~1951), 박인덕(1897~1980) 등과 함께 우리나라 신여성 1세대였다.

    신여성 1세대는 1910년대 말에 등장해 1920년대 중반까지 주로 성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한 세대라고 볼 수 있다. 신여성의 연애와 결혼, 이혼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는데, 신여성에게 연애와 결혼은 전통적인 사회 풍습에 도전하는 실천이기도 했다. 근대는 ‘개인’의 발견이라는 가치를 담고 있기에 한반도의 근대화에 신여성이 갖는 연애관은 기존의 ‘가족’ 중심의 혼인과는 달랐기에 당시로서 대단한 실천을 감행한 셈이다.

     

    김일엽의 여성운동

     

    신여성 1세대들은 거의 이혼이라는 경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김일엽은 ‘남성편력’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정도로 남자와의 교제가 빈번했고,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했다. 결혼 사이에도 세 번의 사랑이 있었고, 그 사이에 아들도 낳았다. 그 아들도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김일엽의 열렬한 사랑에는 다음의 정조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떠나서는 정조가 없습니다. 그리고 정조는 애인에 대한 타율적인 도덕 관념이 아니고, 애인에 대한 감정과 상상력의 최고 조화한 정열인 고로 사랑을 떠나서는 정조의 존재를 타 일방에서 구할 수 없는 본능적인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애인에 대한 사랑이 식어진다 하면 동시에 정조 관념도 없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정조 관념은 연애 의식과 같이 고정한 것이 아니요, 유동하는 관념으로 항상 새로운 것입니다. (중략)

    그러므로 우리는 정조에 대한 무한한 자존심을 가지고 언제든지 처녀의 기질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처녀의 기질이라면 남자를 대하면 낯을 숙이고 말 한 마디 못하는 어리석은 태도가 아니고 정조 관념에 무한 권위, 다시 말하면 자기는 언제든지 새로운 영과 육을 가진 깨끗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감정입니다.

    (중략) 사랑 없이 함부로 육에만 빠지는 것은 절대 죄인인 줄 압니다. (중략)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요즘 떠도는 청년을 볼 것 같으면 일시 방탕 기분의 충동으로 심각히 느끼지 못하는 성적혁명을 거짓 부르짖으며 여자의 마음을 달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극히 주의해서 위선 교제를 삼갈 필요가 있습니다.

    -<부녀지광>(1924. 7) /<꽃이 지면 눈이 시려라>에서 재인용

     

    나의 가슴에 어느 구석이라도 다른 이성을 그리우는 어렴풋한 그림자도 있지 않은가. 이상의 여러 가지를 생각하여 스스로 새 상대자에게 불순한 생각이 없다면 비로소 깨끗한 정조를 가진 것이라는 떳떳한 생각을 가지고 새 상대자를 맞을 것입니다. 추호라도 불순한 생각을 가지고 새생활을 구하고, 새 상대를 구한다는 것은 새 상대자에게 불충실한 것뿐 아니라 스스로의 생활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생각해 보아 어떤 귀퉁이에서라도 불순한 무엇이 있다고 느껴질 동안은 결코 다른 이성을 접촉하려는 생각을 단념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만의 사랑으로 정조를 지킬 의무가 없습니다. 따라서 외짝 사랑이니 실연이니 하는 것으로 감상적 인생관을 가지고 자기의 존귀한 일생을 낭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새생활을 창조할 수 없는 졸렬한 사람이요, 자기 자신에게 충실치 못한 자기에게 대한 큰 죄인입니다.

    -<조선일보>(1927. 1. 8.) /<꽃이 지면 눈이 시려라>에서 재인용

     

    김일엽이 생각하는 ‘처녀성’은 지금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생각이다. 그래서 정조는 이성에 대한 성실한 마음, 사랑의 최고점이지 사랑이 식은 뒤에도 지켜야 할 것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정조’ 관념은 그동안 전통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정조’ 개념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 글을 보면, 그녀의 많은 사랑은 자기가 갖고 있는 정조관을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김일엽에 대한 이야기에서 누구를 잊지 못해서 누구를 사귀고 하는 평가가 있는데 이는 김일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평가가 아닌가 한다.

    그녀는 새로운 이성을 만남에 조금이라도 불손한 생각이 있었다면 자기 생각을 뒤집는 일이었기에 그 만남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정조가 ‘영과 육을 가진 깨끗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감정’이라고 한 데에 이르면 정조는 이미 종교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종교성은 일시 방탕의 충동으로 사랑 없이 육에 빠지는 것은 ‘절대 죄’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오늘날로 치면 ‘원나잇’을 비판하는 글로도 볼 수 있겠다.

    그녀의 여성운동은 정조관에서부터 생활에서 필요한 개조, 여성 교육에까지 많은 글을 남겼다. 특히 의복에 대해서는 나혜석하고 논쟁이 있었는데 이 논쟁을 보면, 여성에게 편리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던 신여성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김일엽은 생활의 소소한 부분에서도 자기가 그렇게 하는 까닭을 밝히는데 그것은 여성이 자각을 하고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개조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여성해방을 맞이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기고글뿐 아니라 시, 소설들도 남겼는데 그러한 글에서도 ‘개인으로서의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여자는 약한데 모성은 강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일엽은 ‘여자는 강한데 모성은 약하다’고 하였다.

     

    신여성이 스님이 되기까지

     

    위 소제목은 <개벽>(1935. 1)에 실린 ‘개벽지 회견기’에 나온 제목이다. 세간의 말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자기 의견을 밝히고, 세간의 눈치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정조관을 실천하던 여성이 어느날 사라져 버렸다. 김일엽이 1920년 <신여자>를 창간한 뒤부터 여러 글들을 발표하였는데 1933년 가을에 불교에 귀의하고 그녀의 글이 사라져 버렸다. 13년 동안 맹렬히 활동하던 여성이 잠잠하니 그녀의 소식이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었는지 개벽지에서 김일엽을 인터뷰한 것이다.

     

    인터뷰는 1934년 11월에 있었는데 이때 안국동 선학원에 머물고 있었을 때였다. 그녀는 수덕사 만공 스님을 법사로 하여 3개월씩 사원 순례를 하게 되어 있어 직지사, 금강산 서봉암, 마하연에 3개월씩 있다가 안국동으로 온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1929년 1월부터 잡지 <불교>에 문예를 비롯한 글들을 싣고 있었다. <불교>는 중앙불교회에서 만든 잡지였는데 그녀는 <여시>라는 잡지가 <불교> 건너편 방에 있어 <불교> 사원들을 알게 되어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김일엽 아버지는 목사여서 불교에 대해서는 좋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기독사상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 ‘계집애 공부시킨다고 온 동네가 비난할’ 때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어머니 역시 ‘공부만 잘 시키면 여자도 크게 된다’는 생각을 가진 여성이었다.

     

    하여간 이렇게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불교여자청년회’ 활동도 하고, 1929년에는 한자로 된 불경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번째 결혼을 하는데 이때 남편이 재가승이었다. 김일엽의 글에서 보면 남편하고의 사이는 무척 원만했다. 하지만 가정을 돌볼 수 없으니 불교에 입문하면서 이혼을 타협했다.

    기자와 인터뷰할 때에는 아직 결제를 받지 않은 때라고 하였으니 수계를 받은 스님 신분은 아니었다(수계를 받으면 외인 면회는 엄금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녀가 수덕사 견성암으로 내려간 것은 알려진 1933년이 아니고 1935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기자가 불교에 입문한 뒤 속세의 생활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데 일엽은 사람들이 어둠에서 헤매고 있다고 대답했다. 다시 여성운동에 대해 물으니, ‘일시적 순간적 구책급’으로 ‘영원한 무궁한 진리가 못 된다’고 대답한다.

    종교인으로서 속세의 일이 영원한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그나마 속세의 일이 어둠에서 헤매는 것인데 여성운동은 일시적으로 구제책은 된다니 비종교인 입장에서는 여성운동이 크게 의미있는 일로 다가온다.

     

    견성암에서 수도 정진하고, 환희대에서 열반하다

     

    견성암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원으로 1930년에 만공 스님이 세운 것이다. 선원은 선정을 닦는 도량을 말한다. 그때 만공스님은 수덕사 대웅전 위쪽 암자인 정혜사를 능인선원으로 하여 주석하면서 정진하던 곳이다. 곧 정혜사 능인선원은 비구의 선원이요, 견성암은 비구니 선원이 되겠다.

     

                                            ▲<갈림길> : 오른쪽은 능인선원으로 가는 길, ‘덕숭산 능인선원’이라 쓰여 있다.
                                                       왼쪽은 견성암으로 가는 길, ‘견성암 제일선원’이라 쓰여 있다

    위 사진에서 보듯 정혜사 가는 길은 위로 위로 가야 한다. 그런데 견성암의 원래 위치가 정혜사 동쪽 위에 있었다고 한다. 견성암이 지금의 위치로 내려온 것은 1965년인데, 수덕사 문화해설하시는 분에게 견성암이 내려온 까닭을 물으니, 비구니 암자가 비구 암자 위에 있어서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다면, 세상이 거꾸로 가는 것 아닌지……. 만공 스님이 지은 견성암은 초가집이었으나, 이곳 위치로 옮기면서 이층 인도식 건물로 바뀌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일엽 스님은 견성암이 이런 수모를 당하기 전에 주석하신 곳을 바꾸었다. 현재 견성암보다 더 아래에 있는 환희대로. 이미 60대 중반기로 접어드는 노스님이 다니기에는 쉽지 않은 거리였을 것이다. 33세에 불교를 처음 알고, 38세에 불교에 귀의한 일엽 스님은 환희대에서 1971년 76세의 나이로 열반하시게 된다. <개벽> 인터뷰에서 생명이 끝날 때까지 불교에 몸을 맡기겠다는 그 말을 끝까지 지키게 되었다.

     

                                                                         ▲<환희대> 일엽 스님이 열반하신 암자이다. 

    김일엽은 수도 득도 후에 새로운 경지를 발견하면 마음대로 생각한 것을 발표하게 될 거라고 했는데, 그녀는 1962년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인생회고집을 출판하게 된다. 이 책이 나온 뒤 많은 젊은 여성들을 구도의 길로 이끌게 했다는 이야기가 남은 책이다. 스님이 되기 전, 치열하게 자기 삶을 살았던 여성이 비구니승이 되는 또다른 실천의 삶을 산 여성을 수덕사에서 생각해 본다.

     

                                                                           ▲<청춘을 불사르고>표지

    나혜석, 수덕여관에 머물다

     

    김일엽과 같은 해에 태어난 나혜석은 김일엽보다 더 사회의 관심을 받은 여성이었다. 나혜석이 이혼을 한 뒤 김일엽이 있는 이곳 수덕사에 온 것은 1937년이었다. 그녀 나이 42세. 그녀가 머문 곳은 수덕여관이었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물자 화가 지망생과 화가들이 그녀를 찾아왔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이응로이다. 이응로는 나혜석이 수덕여관을 떠나는 1944년에 수덕여관을 사들인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최초의 여성 소설가라를 수식어를 갖고 있는 나혜석은 어떤 연유로 김일엽을 찾아 이곳에 내려왔을까?(나혜석 이야기는 다음 호에 계속)

     

                                                  ▲<수덕여관> 지금은 여관이 운영되지 않고, 수덕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글 김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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