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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회]남장여인과 함께 하는 서울여행
    최선경 / 2013-10-08 05:07:56
  • 1830년, 무려 19세기에 그것도 14세에 남장을 하고 금강산 여행을 떠났던 소녀, 금원.

    금원은 이후 기생으로 살았고 30대에는 용산 삼호정에서 소실들의 시 모임인 여성 시회까지 열었으며, <호동서락기>라는 자신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긴 의지가 강했던 여인, 조선의 흔치않은 여인입니다.

    이프의 필자인 최선경님이 지난 8월말 금원의 여행기를 소개하는 책 <호동서락을 가다>를 출판했습니다. 이어 저자와의 대화 그리고 저자와의 답사 행사를 할 예정인데요.

    아래에 책소개, 행사소개 포스터를 소개합니다. -이프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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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미지의 여인 금원을 만나다

     

    우리 역사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않고 묻혀있는 위대한 인물이 많다. 이 책의 주인공인 (김)금원도 그런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금원이라는 호 외에 성도 이름도 확인되지 않고 있는 미지의 인물이다. 열네 살 나이에 남장을 하고 혼자 금강산에 올라 ‘하늘과 땅을 한 가슴에 담을 수 있겠다’고 기개를 토할 정도로 거침없는 여인이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시 동인인 ‘삼호정시사’를 결성했고, 뛰어난 기행록 《호동서락기》를 썼다는 사실만 확인되고 있다. 이 책은 그녀가 쓴 유일한 문집인 《호동서락기》를 토대로 그녀가 다녀간 여행지를 답사하며 금원이란 인물을 추적한다. 그녀의 성과 집안에 관한 의문은 물론 잘려나간 듯 사라진 그녀의 삶 일부분들을 차근히 풀어내어 그녀의 일생을 복원한다.

     

    자유롭고 거침없는 여인 금원과 때 묻지 않은 조선의 화려 강산이

    《호동서락기》를 통해 부활한다!

     

    “호수가 있는 4군에서 시작하여 관동 금강과 팔경을 돌아 한양에 이르렀고, 또 관서에 이르렀다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으니, 이름 하여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라 한다.”

     

    조선 후기, 여성은 대문 밖을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었던 시절에 남자들만 다녀올 수 있다는 금강산을 직접 찾아가고, 관동팔경은 물론 중국 사신들의 연행로까지 다녀온 여성이 있다. 겨우 열네 살 나이에 남장을 하고 여행길에 나선 금원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금원은 당시 조선 여성으로는 드물게 부친에게 글을 배워 사서삼경 등 유교경전과 역사서를 통달했고 시문을 지을 수 있었다. 책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알았고 담장 밖 세상을 향한 열망 또한 컸다. 열네 살 때 부모의 허락을 얻어 남장을 하고 여행을 떠나 금강산과 관동팔경 등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돌아왔고, 이 과정을 1850년에 기행문으로 남겼다. 충청도 호서 지방의 호湖, 금강산과 관동팔경의 동東, 평양과 의주 등 관서지방의 서西, 서울 한양의 낙洛을 따서 책 이름을 《호동서락기》라 했다. 제목 자체가 그녀의 여행지인 셈이다.

     

    《호동서락기》는 열네 살의 유람에서 시작하지만 서른네 살에 다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쓴 회고록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장소에 따라 소녀와 중년의 느낌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 형식은 산문이 주를 이루고 중간중간 시 26편이 섞여 있다. 유람한 곳에 관한 전설, 설화, 신화 등을 인용하며 자신의 느낌을 적은 산문은 어린아이와 같은 재기 발랄함이 넘치기도 하고 감정적인 탄식과 전문적인 소견이 드러나는 등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시에서는 어른이 되어 느낄만한 무상함과 여유가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호동서락기》는 의령 남씨의 《관북유람일기關北遊覽日記》에 비견될 만큼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문으로 쓰여진 탓에 독자들이 접하기 쉽지 않았다. 저자는 많은 관련 문헌들을 참조하여 《호동서락기》에 접근하는 한편, 쉽고 재미있는 책 속 여행이 가능하도록 금원의 여행길을 직접 답사해 달라진 현재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충청 4군, 금강산, 관동팔경, 설악산을 돌아 한양까지

     

    저자는 《호동서락기》의 기록 순서를 따라 19세기 조선 여행을 시작한다. 금원의 첫 여행지인 제천 의림지를 시작으로 단양 삼선암과 사인암, 영춘 금굴과 남굴, 청풍 옥순봉으로 이어지는 충청 4군을 돌아보고, 표훈사, 만폭동, 유점사, 구룡폭포를 품고 있는 수려한 금강산 유람에 나선다. 고성 삼일포,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등 예부터 칭송되어온 명승지인 관동팔경을 둘러본 후 다시 설악산으로 들어가 대승폭포와 백담사, 수렴동 계곡을 유람한 뒤 한양으로 돌아온다.

     

    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금원은 곧 기생이 된다. 《호동서락기》에는 그녀가 기녀였다는 기록이 없다. 관동 기행을 마치고 고향 원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에서 곧바로 을사년(1845) 봄 추사 김정희의 육촌형제인 김덕희의 소실이 되어 의주로 떠나게 된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래서 저자는 《호동서락기》만을 놓고 보았을 때에는 금원이 기생일 거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금원에 관한 초기 연구에서는 금원의 학식이 워낙 뛰어나 몰락한 양반의 딸이나 중인 집안일 것이라 생각했고, 《호동서락기》어디에도 자신이 기생 신분임을 암시하는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성 문사들의 여러 문집에서 금원이 원주 기생 ‘금앵’으로 살았던 기록들이 발견되면서 그녀가 기녀 출신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원주 기생 금원은 금강산을 보고 온 정취를 시로 썼고 그 문장이 한양에까지 알려졌다. 원주를 다녀간 선비들이 “산 중에는 금강산, 사람 중에는 금원을 봤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 최초 여성 시모임을 열다

     

    금원은 29세에 의주 부윤으로 부임하는 김덕희의 소실이 되어 행차 길에 동행한다. 금원은 의주까지 가는 길에서 만난 유적지도 기록으로 남겼다. 의주까지는 모화현을 넘어 개성과 평양, 안주를 거쳐 가는 의주대로를 이용하였다. 서울에서 의주까지 1,080리(약 424킬로미터) 길을 ‘의주대로’라고 하는데 중국으로 통하는 지름길이고 사신과 중국무역 상인들이 왕래하는 길이었다. 의주대로를 지나며 금원은 선죽교와 청석관, 정주성 등에서 역사적 사건은 물론 당대인의 가슴 아픈 삶과 마주한다. 의주에 도착한 금원은 이곳에서 2년간 살았는데 그 동안에도 국경 도시를 두루 여행하였다.

    2년여의 의주 생활을 마치고 금원은 김덕희를 따라 한양으로 이사한다. 한양에서 그녀는 한강 변 용산에서 삼호정이라는 정자를 중심으로 여성으로만 구성된 시모임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를 만들었다. 삼호정시사는 조선 최초 여성 시인들의 시 모임으로, 여성 문학의 새 지평을 마련했다. 삼호정에서 함께한 시인 5명은 금원을 비롯하여 운초雲楚, 경산瓊山, 죽서竹西 그리고 친동생인 경춘鏡春이었다. 모두 실력 있는 여류시인이었다. 이 글벗들의 설득으로 《호동서락기》를 썼다고 한다. 금강산을 다녀온 지 20년 만이었다.

     

    금원에 관한 두 가지 의문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금원에 관한 두 가지 의문의 해답을 찾아 나선다. 먼저, 지금까지 금원은 김씨로 알려졌는데, 그녀가 정말 김씨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에서 성을 빼고 금원으로 표기했다. 전해지는 책 어디에도 금원의 성姓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동서락기》 본문에서는 저자를 금원 스스로 ‘금원’이라고만 썼고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연세대 본에는 ‘금원당’으로, 이화여대 본에는 ‘여사 금원(금앵)’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그녀가 김금원으로 등장하는 첫 번째 기록은 1926년에 저술된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다. 이능화는 이 책의 <기녀들의 지방적 특색>이라는 장에서 의주 기생을 소개하면서 금원의 《호동서락기》를 인용하였다. 그때 금원을 소개할 때 ‘김금원 여사는 시문을 잘했는데, 참판 김덕희의 첩’이라고 썼다. 이는 이능화가 금원의 성을 알고 썼는지, 아니면 성이 없으니 그냥 남편 성을 따라 김씨로 기술하였는지 알 수 없다. 당시 근대화되면서 서구의 영향을 받은 여성들이 남편의 성을 따라 쓰는 예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이후부터 금원은 자연스럽게 김금원이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금원이 만약 김씨라면 본관이 안동 김씨일 수 있다고 말한다. 남편 김덕희가 경주 김씨이기에 같은 본관일 리는 없고 그녀의 글 속에서 안동 김씨가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안동 김씨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금원이 서울에서 찾은 곳이 김상서(김흥근) 별장이고 세검정에서 인조반정을 생각하는 것, 설악에서 찾은 김창협의 영시암 등 그녀가 찾는 인물들이 주로 서인 출신의 당대 유력가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금원이 기녀로서 세도가들과 어울리면서 얻은 인맥이 혼재되어 그럴 수도 있지만, 그녀의 집안이 안동 김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금원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저자는 또 금원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사실 금원의 글에서는 부모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조선시대 일반적인 글쓰기라면 ‘부모는 누구이고 본관은 어디이며’ 등등 자기 출신을 먼저 밝히는 것이 기본이지만 《호동서락기》에서는 ‘한미한 집안’이며, ‘부모님을 오랫동안 졸라서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는 언급만 있을 뿐이다.

    저자는 그녀의 아버지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사는 지방 사족이거나 기생을 첩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고위직 출신의 유력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원주에는 소실을 두고 왕래했을 것이고, 그가 고위직 출신의 유력가가 아니고서야 3~40일 동안의 오랜 여행경비를 제공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금원과 경춘 자매 모두 명문가의 소실로 들어갔다는 것 역시 아버지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그녀들이 아무리 시기로서 재주가 뛰어나고 미인이었다 해도 자매가 모두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다. 금원의 아버지는 비록 기생이지만 재능이 많은 딸을 좋은 집안의 소실로 들여보냄으로써 안정된 미래를 보장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금원의 아버지에 관해서는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한 것이고 확실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사실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여러 가능성을 열어둘 뿐이다.

     

    자기가 쓴 책에 부모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이나 성을 밝히지 않은 것은 금원의 독특한 자의식으로 볼 수 있다. 당시 기생 신분 자체가 혈연관계에서 어느 정도 독립적이기 때문에 금원도 애써 자신의 성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호동서락기》 자체만으로 자신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의 자식으로서가 아니라 자신만을 오롯이 알리려 한 시대를 앞선 의식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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