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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회]북촌 양반 여성들, 근대교육을 열다 2
    최선경 / 2013-09-24 02:22:14
  • 여성교육의 선구자, 양현당 김씨 / 글 김소원

     

    양현당은 짐작하는 대로 이름이 아니고 당호이다. 그녀는 출신 지역을 따서 서경인 김씨라고도 했다. 서경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에서 알 수 있듯이 평양을 말한다. 그녀에 대해서는 박용옥의 《한국 여성 근대화의 맥락》에서 알아볼 수 있다.

     

    “김양현당은 자녀 없이 과부가 된 뒤 서울로 와서 북촌 양반 부인들과 교유했고 자산도 꽤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북촌 부인이 아닌 그가 찬양회의 부회장과 여학교 교장직을 맡은 것으로 볼 때 그는 근대 학문의 소양을 갖춘 개화의식이 높은 여성이었음에 틀림없다. 순성여학교가 개교한 1899년은 독립협회 중심의 개화세력이 보수적 정치세력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던 때였으므로 찬양회 활동도 위축되어 학교 운영을 위한 재정적 지원이 어렵게 되었다. 또한 고종황제가 약속했던 관립여학교 설립도 의정부 회의에서 각하하는 바람에 설립 가망이 무산되었다. 이처럼 첩첩이 막힌 어려움 속에서 김양현당은 1903년 3월, 그는 자신이 죽은 뒤 어린 여학생의 교육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를 염려하는 선각적 교육자로서 유언을 남기며 숨을 거두었다.”

     

    김양현당에 대해서는 이 이상의 자료를 아직 찾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가 위 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 여성교육 선구자가 김양현당이라는 점이다. 찬양회 부회장이었던 그녀가 순성여학교의 교장이 된 것은 그보다 2년 전인 1897년에 정선여학교를 설립한 경험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선여학교는 우리나라 여성이 세운 최초의 여학교로, 뜻 깊은 일이었지만 이 학교의 이후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다. 정선여학교는 승동에 있었다. 승동은 지금의 종로구 인사동, 공평동에 걸쳐 있는 마을인데 삼일운동 본거지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승동교회’로 이름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인터넷에서 순성여학교를 치면 승동여학교로 나오기도 하는데, 순성여학교는 느릿골에 세운 학교이다. 느릿골은 종로구 이화동, 효제동에 있던 마을로, 느릿골 골목이라는 이름이 종로 5,6가 사이에 지금도 남아 있다. 순성여학교가 승동여학교로 나오는 데에는 교장이 같은 사람이어서 주는 혼동일 듯싶다. 하지만 모두 차분히 자료 조사를 더 정밀히 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이화학당에 오는 학생은 고아와 병든 학생

     

    김양현당은 어떻게 여학교를 세울 생각을 하였을까? 우리나라의 근대학교는 아펜젤러가 배재학당(1885년)에 세우기 이전인 1883년 원산에서 민간인이 세운 ‘원산학사’가 시작이다. 그에 비해 여학교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주도해 갔다. 스크랜튼이 세운 이화학당이 1886년에 세운 것이니 우리나라 여성에 의해 학교가 세워진 것은 10년이 걸린 셈이다. 이화학당이 10년 동안 오는 길은 쉽지 않았다. 여성을 교육한다는 것이 낯설었던 시대에 이화학당에 오는 학생은 고아와 병든 학생이었다. 또 외국인이 아이를 꾀어 눈을 빼간다는 소문이 나돌아 학교는 힘든 상황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0년이 되는 해에는 학생수가 47명으로 늘어 학교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이화학당 정동 한옥교사(출처:이화역사관)

     

    이화학당이 10년이 되는 해에 김양현당은 학교를 세우게 된다. 김양현당은 어느 정도 개화의식을 가지고 있는 여성으로 기독교인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때 우리나라는, 지금으로 보면 인신매매인데, 딸을 팔기도 하였다. 그런데 기독교는 인신매매를 반대하고, 첩을 두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기독교에 대해 여성들은 마음을 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성교육이 필요하다는 개화사상을 받아들인 그녀는 당시의 사회 분위로 보았을 때 기독교인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미 학교를 세운 바 있는 그녀가 관립여학교 운동을 한 것은 더욱 뜻있는 일이라 하겠다. 여자를 학교에 보내겠다는 의식이 없던 때라 학비를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교재비 며 먹이는 일은 개인 사비를 털어야 하는 때였다. 그러한 사회를 계몽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운영하는 학교보다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훨씬 효과가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관립여학교인 한성여학교가 세워진 것이 1908년이니 김양현당은 끝내 관립여학교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1911년 8월에 공포된 <조선교육령>에 따라 종래의 고등여학교는
                                           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명되었다. 경기여자고등보통학교(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신소당과 이일정, 국채보상운동에 나서다

     

    1905년 을사늑약조약 뒤로 한반도는 교육 열기가 높아졌다. 개화세력을 중심으로 ‘나라가 부국자강하기 위해 교육과 산업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신념이 퍼져 나갔다. 교육으로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여자도 교육해야 한다는 생각으로까지 번져 나갔다. 그 결과 여성교육단체들이 만들어지고 활동하였다. 하지만 박용옥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886년에서 1910년까지 세워진 사립여학교가 174개이지만 여성이 세운 학교는 21개밖에 되지 않았다. 10%가 겨우 넘는 학교 수인데 김양현당을 비롯한 앞선 여성 교육운동가들이 갖는 선진성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다.

     

    1905년 뒤로 만들어진 여성단체는 대부분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가운데 주목해 볼 단체가 ‘여자교육회’이다. 이들은 1906년에 ‘현모양처의 자질을 양성 완비한다’는 목적으로 양규의숙을 개교했다. 우리나라에서 ‘현모양처’라는 말이 여자 교육에서 처음 쓰였다. 이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주제가 벗어나 여기서 짚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학문 없는 여자를 학식 있는 교사나 점잖은 남자가 지도해야 아름다운 결과를 얻는다’ 하였는데 이 취지를 보면 남성이 이끄는 여성교육단체가 갖고 있는 한계가 드러난다.

    그런데 이 단체의 임원 가운데 부총무로 이일정당이 보인다. 이일정은 헤이그밀사로 파견되었던 이준의 부인이다. 양규의숙이 재정 부족으로 운영이 어렵게 되자 양규의숙을 살리기 위해 세워진 단체가 ‘진명부인회’다. 이 단체의 회장은 신소당으로 1906년에 자기 집에 사립광동학교를 열어 교장이 되었다. 이 학교의 교감이 이일정이었다.

     

    여성 교육운동에 앞장섰던 여성 선각자들은 국채보상운동에도 앞장섰다. <대한매일신보>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알게 된 두 여성은 신소당의 집을 ‘대안동 국채보상부인회’를 만들고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대안동은 종로구 소격동・송현동・안국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북촌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일정은 그에 앞서 1905년, 인사동에 ‘안현부인상점’을 열었다. 여자들이 썼던 연지·분·머릿기름 따위의 화장품과 거울·빗·비녀 따위의 장식품, 바느질 도구 및 패물 들을 가지고 물건을 팔러 다녔던 여성을 방물장수라고 한다. 방물장수는 집집을 돌아다니며 여자를 상대로 물건을 팔았다. 이일정은 이러한 부엌살림, 방살림 같은 생활필수품을 가게 안에 벌여놓고 팔았던 것이다. 사,농,공,상 가운데 상을 가장 낮게 쳤던 조선사회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했지만 아직 근대의식이 생활까지 퍼져 나가지는 못한 때였다. 그러한 때 이일정은 당당하게 간판을 걸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북촌 한복판에 가게를 연 것이었다. 안현부인상점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부인상점이기도 하다. 이일정은 부인상점을 열고, 광동학교 교감이 되고, 여자교육회 부총무로서 근대 여성운동의 한복판에 있었다. 이일정은 1876년에 태어나 17세 때 이준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1935년 58세이 나이로 세상을 뜨는데 1963년 이준의 유해가 돌아와서 수유리에 함께 묻히게 되었다.

     

    영친왕의 어머니인 엄귀비도 여성교육에 많은 관심을 보여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명신여학교(나중에 숙명여학교)를 세우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왕실에서 나서기 이전 개화한 북촌의 여성들은 앞장서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알리고 이를 실천하였다. 그들은 여성교육운동에만 그치지 않고 국채보상운동이라든가 여러 사회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그들의 개화사상이 선교사로부터 시작했든, 남편으로부터 시작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랫동안 몸에 베인 유교의식을 벗고 새로운 물결을 수용하고, 실천에 옮겼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의 선구자적 역할이 있어 이른바 근대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근대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삼일운동을 비롯한 나라의 운동에 앞장섰고, 새로운 직업군을 열며 한반도에 근대가 정착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글 김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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