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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회]독신을 선택한 그녀들
    최선경 / 2013-08-26 09:15:55
  • 바야흐로 솔로들의 세상이 되었다. 아파트도 솔로를 위한 소형 아파트가 대세이고 식당도 솔로를 위한 식당, 마트에서는 솔로를 위한 소형 포장 등이 유행이다. 홀로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제는 솔로가 마켓팅의 주 고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최근까지도 솔로를 가만 두질 않았다. 결혼이 마치 의무라도 된 양, 독신은 ‘문제 있는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 사회는 특히 유교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솔로들을 위한 상품들
     

    효를 중요시 여기는 유교에서는 가정을 사회의 기본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시작인 ‘부부’가 중요했다. 모든 여자와 남자는 때가 되면 혼인을 하여 자식을 낳아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도(道)라고 가르쳤다. 그러니 때가 되어도 혼인하지 않는 독신은 분명 불효자였고 심하게 이야기하면 죄인이기도 했다. 자녀를 혼인시키지 않는 부모까지도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다.

     

    혼자 살 수 있는 자유를 달라!

     

    조선시대 여자가 혼자 살고 싶다면 어떠했을까? 일부종사(一夫從事)라는 논리로 정절을 강요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원하지 않는 혼인, 혼자살고 싶은 이들을 억지로 혼인시키는 것 역시 억압의 하나이다. 물론 불교에 입문하여 비구니가 될 수도 있겠지만 불교는 조선에서 천시되었고 승려는 천민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신분적 하락까지 감수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결혼이라는 굴레, 한 남자에게 종속되는 것이 싫었던 여성들에게 때마침 반가운 사상이 들어오니, 그것이 바로 천주학(서학)이었다. 처음에 이승훈, 이벽, 정약용의 형제들과 같은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서학이 받아들여졌고 그 집안의 양반 여성들 역시 서학을 접하게 되었다. 남편의 첩까지도 무조건 참으라는 여성 희생적인 논리에 그저 침묵만 하며 살던 여성들에게 인간의 평등과 부부의 양자 책임을 강조하던 천주교리는 놀라운 사상이자 탈출구였다. 그래서 초기 교회에는 동정녀, 과부, 기생 등이 많이 입문했던 것이다.

     

    1801년 정조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1752~1801)를 비롯하여 이승훈, 정약용 등 많은 지식인들이 사형되거나 유배를 받았다. 100여명이 사형당하는 데, 그중 강완숙과 그녀의 집에 모여 살던 동정 여성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혼인하지 않은 여인들이 모여 살았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사회에 충격을 던져 주었을 것이다. 남녀가 뒤섞여 집회를 하는 것도 모자라 여자들끼리 모여 산다는 그 자체가 불순하고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보았으리라.

    사제가 없었던 조선교회에 첫번째로 들어온 주문모 신부가 1795년 조선으로 밀입국한 사실이 알려지자 조선 정부에서는 곧바로 체포령이 떨어졌다. 신부를 가장 안전하게 피신시킬 수 있는 방법은 부녀자의 집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 임무를 강완숙(1760~1801)이 맡게 되었다. 내외법이 강했던 조선사회에서 포졸들이 함부로 여성을 체포하거나 수색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했던 것이다. 마침 강완숙은 충청도 덕산에 있는 남편과 떨어져 시어머니를 모시고 서울에 와서 살고 있었고 재산도 좀 있었기 때문에 적임자였다. 그로부터 6년간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에 거처하면서 세례를 베풀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리고 남몰래 충청도와 전라도 등 지방으로도 포교활동을 하러 다녔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강완숙이 체포되면서 그녀의 여종 복점이도 잡혀왔는데, 복점은 고문을 못이겨 끝내 배교하고 그간의 활동들을 자백했다. 복점의 증언이 기록된 <사학징의>에 의하면 복점이는 연락책을 맡아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그녀가 만난 사람들은 교회 내 지도적 위치에 있는 남녀신자였다.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을 공식적인 ‘회장’으로 임명하였고 명실공히 강완숙의 집은 박해받는 교회의 구심점이 되어 전국의 신자들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강완숙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그 배경에는 동정녀와 과부들로 구성된 여성공동체가 있었다.

     

    강완숙과 여성공동체

     

    강완숙은 비밀유지를 위해 서울에서도 여러번 이사를 하게 된다. 처음에는 남대문 안의 남창동에 살다가 1799년에는 인사동, 1800년 3월에는 관훈동에서 살았다. 집을 마련하는 비용은 몇몇 신자들이 1백냥씩 모아 400냥 이상을 마련했다고 한다. 당시 100냥으로도 집을 살 수 있었으므로 400냥 정도면 일반 집보다 3-4배 큰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완숙의 집에 살던 여자들은 우선 그녀의 딸 홍순희를 비롯하여 윤점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과부라고 속였다. 정순매는 동정을 지키기 위해 허가의 처라고 자칭하며 스스로 머리를 올렸다. 문영인은 궁녀 출신으로 궁중에서 문서작성을 맡았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사실로 인해 궁에서 쫓겨나와 강완숙 집에 머물렀는데, 이곳에서도 교리책을 필사하는 등 문서작성의 경력을 십분 발휘했다.

     

    강완숙은 의지할 곳 없는 불우한 여성들을 도와 입교시켰다. 과부가 되어 갈 곳 없는 여인 김흥년도 강완숙의 집에 5년간 머물며 일을 도왔다. 또 다른 과부 김순이는 바느질을 잘해 강완숙의 집에서 옷 만드는 일을 도왔다. 동정녀 김월임은 6년간 침선하는 일을 돕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예 강완숙의 집으로 들어와 살았다. 이외에도 강완숙의 집을 왕래하면서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던 신자들이 많았다. 김연이와 정복혜는 강완숙과 한신애의 집에 드나들며 그들의 지휘를 받았다. 특히 김연이는 주로 궁녀 출신 여성신자들과 가깝게 지냈다. 이렇듯 강완숙의 집에 모여 산 10 여명의 여성들은 공동체를 이루며 교리공부를 하고, 손님맞이, 주문모 신부 돕기 등 역할분담을 했다. 강완숙이 여성들의 모임을 주관하였고 교리를 가르치는 일은 딸 홍순희와 윤점혜가 도왔다. 심부름을 다닌 사람은 복점, 김월임, 정임 등과 같은 여종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동정을 선택한 동정녀이거나 혼자된 과부들이었다. 강완숙과 여성공동체의 여인들은 1801년 신유박해로 사형당하거나 유배형에 처해졌다.

     

    ▲강완숙의 사형장면. 영화의 한 장면(출처:뉴시스)

    위장결혼을 통한 동정부부

     

    동정을 지키는 또 다른 방법은 위장결혼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이순이(1781~1802)와 유중철(1779~1801) 부부다. 지봉 이수광의 후손으로 학자 집안에서 성장한 이순이는 신앙을 접하면서 독신으로 살기를 결심한다. 1795년 14세에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 동정으로 살기를 고백한다. 조선사회는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은 최대의 불효로 생각했던 시절이다. 그러던 차에 주문모 신부는 1795년 전주에 내려갔다가 전라도 선교책임자였던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도 동정생활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주문모 신부의 주선과 양쪽 부모의 허락하에 두 사람은 동정 서약을 한 뒤 1797년 혼인을 한다. 이들은 1801년 순교할 때까지 부부인 척 함께 살며 동정을 지켰다. 또한 권일신의 딸 권데레사(1783~1819)와 조숙(1795~1839) 부부 역시 15년간 동정부부로 살았다. 이순이와 권데레사는 외사촌 간이다.
     

                                                                               ▲이순이(루갈다) 묘비(전주)

     

    당시 사회는 여성의 독신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을 사형시키기보다는 지방의 관비로 유배 보내거나 권력가의 첩이나 종으로 보냈다.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것은 그녀들이 얼마나 독하게 신앙을 지켰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 여성들의 동정 지키기는 유행처럼 번져 지나칠 정도였다. 1860년대 베르뇌 주교는 편지를 보내, 교회의 허락없이 여성들이 독신을 고집할 경우 그 가족까지 파문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공식적인 수녀회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독신 여성들이 많아지는 것이 교회의 부담이 되었던 듯하다.

    동정녀들의 믿음과 열정은 1886년 한불수교로 천주교가 인정된 뒤에는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만들거나 학교를 세우는 사회복지, 교육활동으로 투사되었다. 이들은 수녀가 되거나 사회복지 기관에서 일하게 되었다. 1888년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프랑스에서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가 처음 입국하자, 동정녀들은 물을 만난 듯 공식적인 수녀의 길을 걷게 된다. 그중에는 순교자의 딸들도 있었다.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샬트르 역사관)

     

    그녀들이 신앙 때문에 독신을 선택한 것인지, 원래 독신에 대한 생각이 강했는지는 알 수 없다. 독신으로 수도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 사업에 헌신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고, 가족이 없기 때문에 활동이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다. 대대적인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맞설 용기도 강했다. 천주교에 입교한 여성 중에 왜 하필 동정녀들이 많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을 광신도로 볼 것인가?

    여성들은 가슴 속 한켠에 뜨거운 열정을 숨기고 있다. 그것은 때로 연인을 만나거나 혹은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발현된다. 또 다르게는 사회정의, 종교적 신념 등의 사회적 활동으로 드러나곤 한다. 치열한 시위현장에서 맨 앞에 서있는 수녀님들을 보며 나는 과거의 강완숙과 자매 공동체가 연상되곤 한다. 이제는 억지로 혼인할 필요도, 혼인을 거부할 필요도 없다. 그냥 자신의 의지대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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