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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회]북촌 양반 여성들, 근대 여학교를 열다 1
    최선경 / 2013-07-02 03:22:45
  • 양반 여성들, 여성에 눈을 뜨다 / 글 김소원

     

    지금 북촌은 한번 걸어보고 싶은 곳으로 인기가 놓다. 한옥들이 즐비하고, 군데군데 박물관이며, 찻집이며 예쁜 집들도 많다.

    북촌은 청계천과 종각의 북쪽에 있는 동네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는데,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다. 예로부터 왕족이나 고위관직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북촌에 살았던 양반여성들의 모습도 자못 궁금한데, 찬양회라는 여성 조직을 이끈 이들이 북촌에 살았던 양반여성들이었다. 찬양회는 우리나라 최초로 여권을 선언하고, 근대적 여권운동을 전개한 단체이다.

     

    1898년 9월 8일 <황성신문>과 9월 9일 <독립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물이 상하면 반드시 변하고, 병이 극하면 반드시 고치는 것이 고금의 이치다. (중략) 이제 우리 이천 만 동포형제가 (중략) 구습을 영영 버리고 개명한 신식을 좇아 행하는데, 일신우일신 함은 영영한 소아라도 저마다 아는 바거늘, 어찌하여 우리 여인들은 일향 귀 먹고 눈 어두운 병신 모양으로 옛날식 규방만 지키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혹시 신체와 수족과 이목이 남녀가 다름이 있는가. 어찌하여 병신 모양으로 사나이의 벌어주는 것만 먹고 평생을 심규에 처하여 그 절제만 받으리오. 먼저 문명개화한 나라를 보면 남녀가 일반 사람이라. 어려서부터 각각 학교에 다니며 제조를 다 배우고 이목을 넓혀 장성한 뒤에는 사나이와 부부지의를 정하여 평생을 사는데, 그 사나이한테 조금도 절제를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극히 공경함을 받는다.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오. 슬프다! 전날을 생각하면 사나이의 위력으로 여편네를 누르고, 구설을 핑계로 여자는 안에 머물면서 밖의 일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밥하고 옷 짓는 것만 하리오. 어찌하여 신체와 수족과 이목이 남자와 다름없는 사람으로 규방에 갇혀 밥과 술만 지으리오. 우리도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따라 타국과 같이 여학교를 실시하고, 각각 여아들을 보내 재주를 배우고, 규칙과 행세하는 도리를 배워 남녀가 일반 사람이 되게 할 당장 여학교를 실시하오니 우리 동포 형제 여러 부녀 중 영웅 호걸님네들은 각각 분발한 마음을 내어 우리 학교 회원에 드시려거든 곧 칙명하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이 기사를 보면 여성은 병신이 아닌 온전한 인간이라는 점,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평등한 인간인데 어찌 깊은 규중에 갇혀 밥 하고 옷 짓는 일만 하는 차별을 남자의 절제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점, 여성이 능력을 개발하고, 규칙과 행세하는 도리를 배우려면 여성도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여권 운동의 최대 목표는 여학교 설립에 있었다.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 자기의 재주를 찾고, 그 재주로 집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여성은 조선시대까지 공교육을 받지 못했다. 여성은 집안에서 아버지나 오빠로부터 글을 배우기는 하였지만, 거기까지였다. 남성들은 공교육을 통해 관직에 진출할 기회를 가졌다.

     

                                                         ▲1896년에 창간한 한글전용<독립신문>(출처:연합뉴스)

     

    여성 개화, 양반부인으로부터 시작하다

     

    북촌의 양반 여성들은 서민들보다 여성의 규제를 더욱 받은 여성들이었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하였다는 것이 놀라운데, 이러한 생각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회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천주교의 유입, 기독교의 전파, 동학운동 등으로 사회는 새로운 생각들을 갖게 하였다. 개화파 인사인 박영효는 1888년에 ‘개화상소’를 올려, 남편이 아내에게 폭행함을 금할 것, 소, 중학교를 세워 남녀 6세 이상은 모두 취학하게 할 것 들을 주장하였다. 거기다 위 ‘여권통문’에서 ‘그 사나이한테 조금도 절제를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극히 공경함을 받는다’라는 글을 보면, 그때에 조선에 들어온 외국인들이 부인한테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남녀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을 것이다.

     

    1898년이면 우리나라에 민간인이 발행한 신문들이 절정을 이루던 때이기도 하다. <독립신문>도 여성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96년에 창간한 <독립신문>은 한글 전용 신문으로서 한글을 깨친 여성들이 이 신문을 보았을 것이다.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에서 만들었는데 독립협회 활동을 한 사람들은 부인한테도 개화사상을 알리고, 신문을 보도록 하였다. 마치 서학을 공부한 이들이 부인과 함께 서학을 공부한 것처럼.

    독립협회는 사설과 기사로 여성을 무지로부터 해방시키고, 남녀평등관을 심어 주기 위해 여성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제국신문>은 1898년에 창간한 신문인데 발행인 이종일은 찬양회를 대변하는 신문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양반 여성들은 다른 신분의 여성보다도 사회의식이 먼저 트이게 되었다. 


    찬양회의 여학교 설립 운동

     

    ‘여권통문’ 발표는 1898년 9월 1일에 있었는데, 기사는 그 뒤에 실린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여성의 날을 9월 1일에 하자는 주장도 있다. 이 글이 실리고, 며칠 뒤인 9월 12일 오전 10시에 통문을 발표한 사람들이 모여서 최대 목표인 여학교 설립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학교 이름을 ‘순성여학교’로 정하고, 여학교 후원 단체인 찬양회를 조직한다. <제국신문>에서는 이 뜻에 합의한 자가 삼백여 명이라 하였고, <독립신문>에서는 사백여 명이라 하였다. 북촌에 사는 양반 부인 삼백여 명이 모여 ‘찬양회’를 꾸리게 된다. 찬양회 회원이 되는 자격은 따로 없었다. 신분의 차이를 두지 않고 회비만 내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남성과 외국 여성도 있었는데 대부분은 북촌 양반 여성들이었던 것이다.

    찬양회의 회장은 양성당 이씨이고, 부회장은 양현당 김씨, 총무원은 창길당 이씨, 사무원은 정길당 고씨였다. ‘여권통문’이 실린 기사에 이소사, 김소사의 글로 되어 있는 두 명은 회장과 부회장이라 짐작할 수 있다.

    김양현당과 고정길당은 북촌 사람은 아니다. 김양현당은 평양 사람이고, 고정길당은 고향이 함경도이지만 러시아에서 살았다. 두 여성은 북촌 양반여성은 아니었지만, 찬양회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찬양회가 세우려는 여학교는 관립학교였다. 정부는 1886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학교인 육영공원을 세운 바 있지만, 남자학교였다. 그때 여학교는 1886년 5월에 선교사 스크랜튼의 부인이 세운 이화학당, 1887년 6월에 여선교사 엘레스가 세운 정동여학당(후에 정신여학교)이 있었다.

     

                                        ▲1920년대 이화학당 모습(출처:http://blog.naver.com/misoceline/10105243062)

     

    1898년 9월 20일, 찬양회 회원들은 고종 황제에게 올릴 상소문을 작성한다. 상소문은 양반 유생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한 방법이었는데 여성들이 모여 왕에게 올릴 상소문을 작성했으니, 가히 파격이라 할 만하다. 이들은 10월 11일 백여 명이 모여 대궐문까지 시위를 하고,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의 마지막 문구만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신첩 등이 찬양회를 실시하와 충성충(忠) 사랑애(愛) 두 글자를 규중으로부터 온 나라가 흥왕케 하려 하오나 학교가 아니면 총혜한 계집아이들을 가르칠 도리가 없사오니 감히 아뢰오니 엎디어 빌건대 성명을 깊이 통촉하옵소서. 학부에 칙령을 내리사 특별히 여학교를 세워 어린 계집아이들로 하여금 학업을 닦게 하여 대한제국도 동양의 문명지국이 되옵고 각국과 평등의 대접을 받게 하옵기를 엎디어 바라옵나이다.” 


    고종은 이 상소에 즉시 답을 하였다. 고종은 교육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뜻을 두고 있었다. 1886년 육영공원을 세우기 전에도 1883년 동문학을 세워 영어와 신식 군사훈련을 시킨 바 있었고, 선교사들의 교육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고종의 답을 받은 찬양회 회원들은 너무 기뻐 10월 13일에 있었던 집회에서 상소에 대해 알렸다. 찬양회는 곧 관립여학교가 세워질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이듬해 학교가 문을 열거라 생각하고 12월에 학생을 모집하였다. 하지만 비답은 곧바로 시행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찬양회에서는 스스로 학교를 여는데 관립여학교가 세워지기 전까지라는 생각으로 30여 명의 학생을 받고 학교 문을 열었다. 학교는 어의동(지금 효제동) 느릿골에 세워졌다.

    순성여학교는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최초의 여학교로 알려져 있다. 이 학교의 교장은 찬양회 부회장인 김양현당이 맡았다. 그런데 김양현당은 1897년에 승동에 정선여학교를 세운 바 있다. 승동에 있어서 승동여학교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학교를 세운 이가 서경인 김씨로 알려져 있는데, 서경인이 양현당인 것이다. 김양현당은 우리나라 여성교육운동을 이끈 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

     

    글 김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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