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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회]조선에도 이런 훈남이 있었네
    최선경 / 2013-06-04 07:07:12
  • -운초 김부용과 연천 김이양의 사랑


    <꽃보다 더 예쁜 운초>

     

    부용화가 곱게 피어 연못 가득 붉어라.

    사람들 말하기를 내 얼굴보다도 예쁘다네.

    아침녘에 둑 위를 걷고 있노라니

    사람들이 부용화는 왜 안보고 내 얼굴만 보나.

    - 운초 김부용, <운초 김부용시선>, 허경진 역

     

    평안남도 성천의 기생 운초 김부용이 젊은 시절 지은 시다. ‘꽃보다 내가 더 예쁘다’는 자기자랑을 이런 식으로 시에 빗대어 멋지게 표현할 정도로 당차고 자신감 넘치는 여인이었다. 황진이, 이매창과 함께 조선의 3대 명기(名妓)로 꼽히는 운초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여류시인이라 할 수 있다. <운초당시고(雲楚堂詩稿)>나 <부용집(芙蓉集)>을 통해 전해지는 시만도 300여 편에 이른다.

     

                                                                   ▲<운초당시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운초 김부용이 회자되는 이유는 그녀의 시 때문도 있지만 당대에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운초가 성천기생으로 이름을 날리던 20대 후반, 77세 노년의 나이에 평안도로 유람 온 김이양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운초의 생존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시를 바탕으로 보았을 때 1800년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원래는 유학자 집안으로, 성천에서는 대대로 향리로 살았다. 어릴 때 작은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고 어느 시기에 기생이 되었는데, 아마도 집안이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기녀가 된 운초는 성천에서 여러 문사, 선비들과 교우하며 시를 주고받았다. 존재 박윤묵(1771∼1849)은 성천태수를 만나러 갔다가 운초를 보고는 “무산 높은 곳에 한 시선(詩仙)이 있으니, 천리에 그 이름이 전해진다”고 시를 읊었다. 그녀는 한양까지 이름이 알려졌고, 사대부들로부터 기꺼이 ‘무산의 시선’으로 불려질 정도였다. 한양, 평북 귀성 등을 돌아다니다가 1830년 겨울 평양으로 돌아오는데, 그곳에서 김이양을 만나게 된다.

     

    연천 김이양(1755~1845)은 예조․이조․병조․호조판서 등 고위직을 두루 거쳤고 1826년 6월 72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할 때는 순조 임금으로부터 봉조하(奉朝賀)를 하사받는다. 봉조하는 종2품 이상의 벼슬을 하던 사람이 관직에서 물러날 때 받는 명예직으로 평생 녹봉을 받는다. 노후가 보장된 명예직인 셈이다. 30여년의 공직생활을 명예롭게 은퇴한 김이양은 평생동안 꿈꾸던 산수 유람을 떠나게 된다. 이때 평양에서 운초를 만나게 된 것이다.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사랑

     

    1831년 당시 운초는 30세 전후의 젊은 여인이었고 김이양은 77세였으니 50년 가까운 나이차가 나는 셈이다. 은퇴 후 김이양은 ‘풍류호걸’이라 불릴 정도로 풍류와 산수를 좋아했고 신선시를 즐겼다. 정조 사후 당쟁으로 얼룩진 정계와 혼탁한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향인 신선세계를 지향했던 김이양은 시선(詩仙)을 자부하는 운초 김부용을 만나자 운명처럼 끌렸던 것이다. 마침 그는 이미 3년 전 부인을 잃고 혼자된 상태였기 때문에 운초를 소실로 들이는데 큰 부담이 없었고 덕분에 운초는 정실부인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연천과 운초가 주고받은 시들은 나이차를 초월한 로맨틱한 사랑의 편지였다.

     

    문 앞의 연리나무

    그 위에 까치가 깃들어

    집과 창문 은근히 비추어주고

    가지와 줄기 빽빽이 맺어있네.

    온화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니

    오르락내리락 날며 춤추는 것 같다.

    인간사 서로의 느낌이 있어야 하는 법

    이를 바라보고 따스한 정을 보내네.

    - 연천 김이양, 《김이양문집》, 권진호 역

     

    흔히 남녀간의 사랑을 연리지(連理枝)에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연리지는 두개의 나무가 자라면서 서로 엉켜 하나가 되는 것으로 금슬 좋은 부부나 연인사이를 가리킨다. 김이양은 운초와의 관계를 연리수에 비교하며 서로가 부부의 연을 맺기를 희망했다. 그는 고관대작 출신임에도 자신의 시에 기생 운초에 대한 연민을 솔직하게 표현하였고, 이후 자신의 모든 활동과 거동에 운초를 데리고 다녔다.

    정조의 부마이자, 김이양과 친분관계에 있던 홍현주(1793~1865)는 “초천(김이양)은 부용이란 시희(詩姬)를 데리고 있는데, 자못 시와 노래가 뛰어나고 산수와 난죽을 잘 그린다. 공이 노닐 때마다 항상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흔히 기생첩은 유희와 향락을 위한 노리개 정도로 여기다가 남편이 죽고나면 버려지기 마련인데, 김이양은 그렇지 않았다.
     

                                                                                      ▲연리지

    이들이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운초가 김이양을 따라 한양에 와서 살던 어느 날, 달 밝은 밤에 함께 정자에서 시를 짓다말고 소변을 보러 나가더니 돌아오질 않는 것이었다. 연천 김이양은 한참을 기다려도 그녀가 돌아오질 않자 하인들에게 찾아보라고 하였다. 그런데 운초의 방에 시 한 구절이 쓰여 있었다.

    客子靑天流似矢 (객자청천유사시) 主人白髮亂如絲 (주인백발난여사)

    “나그네 인생, 푸르른 하늘에 세월은 쏜살같이 흐르는데, 주인의 백발은 어지럽기 실과 같네.” 이를 본 연천은 “운초는 봄을 따라 갔구나. 봄을 따라간 너를 책망할 것이 아니라 내가 늙은 탓이지” 하며 한숨을 쉬고는 하인들에게 정자에 있던 술상들을 치우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두고 문을 잠그라고 했다. 그 뒤 누구에게도 운초를 찾거나 운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했다.

    운초는 그날 밤 백발 노인곁에 있는 자기 자신이 갑자기 한심해 보였는지, 훌쩍 떠나버렸다. 하지만 고향에 와보니 기생어미는 이미 죽었고 마땅히 자신을 반겨주는 사람도 없었다. 몇 개월이 지나 초췌한 모습으로 다시 연천을 찾아가니, “네가 봄을 따라 가더니 가을을 좇아 왔느냐. 네 모양을 보니 고생이 자심하구나” 하며 반겨주었다. 그리고는 정자로 데리고 올라가 정자 문을 열어보니 그날 밤 풍경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운초는 그날 짓던 시구를 이어서 지을 수 있었다. - 김화진, <오백년 기담일화>

     

    연천은 한 여인을 구속하지 않고 사랑하며 기다려 줄줄 아는 관대함의 풍류를 지닌 사람이었다.

     

    15년의 사랑 그리고 이별

     

    김이양은 1843년 2월 사마회갑(司馬回甲)을 맞게 된다. 사마회갑이란 과거에 급제한 지 60년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는 헌종 임금으로부터 하사품까지 받고 조상들께 인사드리러 성묘가는 길에 홍주(지금의 홍성), 결성, 천안 등 3군을 돌아보는데, 운초와 동행한다. 89세 노령의 그가 마지막일 수 있는 조상들과 친인척들께 인사드리는 공식적인 자리에 기생첩인 운초를 대동한 것이다. 그녀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이양의 부인 완산 이씨 묘에도 들러, 운초는 “좀 더 사셨더라면 이러한 영광을 누리셨을텐데”하며 애도의 글을 남겼다. 고향에 다녀온 후 연천은 감기에 걸려 시름시름 앓더니 결국 을사년(1845) 5월 91세에 생을 마감한다.

     

    <연천 상공의 죽음에 통곡함>

     

    풍류와 기개는 산수의 주인이시고

    경술과 문장은 재상이 될 재목이셨지.

    모신 지 십오년에 오늘 눈물 흘리니

    높고 넓은 덕 한번 끊어지면 누가 다시 이으리.

    - 운초 김부용, <운초 김부용시선>, 허경진 역

     

    연천의 죽음 앞에서 운초는 통곡했다. 둘이 함께 산 것은 15년. 운초에게 김이양은 사랑하는 남자이자 스승이었고 동지였다. 양반의 딸이었지만 기생으로 살아야했던 그녀의 어긋난 운명을 김이양은 재능을 펼치며 당당히 살 수 있도록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었다. 남편을 애도한 만시(挽詩)에서 “도(道)란 단순한 연분이 아니고 전세의 인연”이라면서 “기왕 인연을 맺으려면 어찌 늙기 전에 만나지 못했을까!”하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김이양이 젊은 시절에 운초를 만났다면 과연 그토록 떳떳이 그녀를 대우해줄 수 있었을까? 천수를 누린 김이양의 말년은 오로지 김부용을 위해 주어진 제2의 인생이었다.

     

    운초의 묘는 천안군 광덕면 광덕산 중턱 김이양 무덤 아래에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김이양 사망 후 운초는 절개를 지키며 살았고 ‘초당마마’라 불렸으며, 그녀의 유언에 따라 김이양 무덤 가까이 묻었다고 한다. 김이양의 손자 김대근(1805∼1879)의 《여연유고》에 운초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후손들이 운초를 정실부인처럼 잘 모셨고 그 유지에 따라 김이양의 묘 언저리에 묻어준 것으로 보인다. 1974년 천안문화원 등 지역단체들의 노력으로 그녀의 묘를 찾아, 시비(詩碑)와 안내판을 세우는 등 무덤을 정비하고 매년 추모 행사도 하고 있다. 

     

                                                                             ▲운초 김부용 묘 (천안 광덕산 소재)
     
                                                                                        
    ▲운초 김부용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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