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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회]강완숙은 왜 천주에 매료되었을까?
    최선경 / 2013-05-14 02:08:18
  • 나는 여성문화유산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다 올해 대표를 맡게 되었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는 여성과 관련한 문화유산에 대해 조사하고, 답사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에서는 대중사업으로 ‘여성문화 걷기 답사’를 진행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여성문화 걷기 답사’는 진행 중이다. 이미 9회차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새로운 코스를 개발한다는 어려움이 있는데, 이번 답사에서 서소문 밖을 답사하는 계획을 짰다. 물론 이 답사는 우리 회 안에 답사팀장이 맡아서 진행을 한다. 팀장과 함께 서소문 밖을 사전 답사하면서 ‘강완숙(1760~1801)’이라는 인물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경건한 무신론자’에 가까워서인지 ‘순교’에 대해 참으로 대단타, 감탄해 마지 않지만, 신앙심으로 목숨을 내놓는 결정에 마음속 깊이 공감하지는 못하는 터이다. 그러한 마음 탓인지 강완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지는 못한 상태였다가 이번 답사에서 그녀의 삶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가부장제가 깊어가던 사회에서 강완숙은 여성운동가 1호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강완숙(http://blog.naver.com/yangaram1/80178108209)

     

    서학이 천주교로

     

    강완숙은 1801년 5월 23일 궁녀였던 강경복, 문영인, 김연이, 한신애와 함께 서소문 밖 만초천변 모래사장에서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한 여성이다. 1801년에 죽은 것에서 알아차렸겠지만 강완숙은 300여 명이 처형된 신유박해 때 함께 희생된 인물이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서학’이라는 학문에서부터였다. 조선 후기, 시장경제가 발달하고, 신분질서는 붕괴되고, 한글이 널리 보급되면서 민중들의 지적 수준도 그 전과는 달라졌다. 유교의 그릇은 이러한 변화된 사회를 담아내지 못했다. 소현세자가 인질로 청나라에 머물렀던 시기에 아담 샬에게 <천주실의>를 전해 받았고, 1645년 조선으로 귀국했을 때 서학 책을 일부 가져왔다. 소현세자와 함께 들어온 사람들로부터 서학 책이 번져 나가기도 했겠지만, 대개는 청나라 사신으로 갔던 사람들이 새로운 학문으로 서학을 접하게 되었다.

     

    특히 이익이 이끄는 성호학파 가운데 성호좌파는 주도적으로 서학을 연구하였다. 이들은 여주에 있는 주어사에서 1777년부터는 ‘하늘, 세상, 인성 등 가장 중요한 문제 해결을 탐구하기 위해’ 유교를 중심으로 하던 강학회에서 서학에 대한 강독회를 열었다. 성호좌파의 대표적 인물이 이벽, 이승훈, 정약전, 권철신 들이었다. 마침내 1783년 이승훈은 세례를 받기 위해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서 세례를 받아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천주교 역사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제 서학은 조선에서 학문이 아니라 천주교로 거듭나게 되었다.

     

    강완숙, 천주교를 만나다

     

    강완숙은 1760년(영조 36)에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태어났다. 내포는 홍주, 결성, 해미, 서산, 태안, 덕산 들을 말하는데 충청도에서 서해안을 끼고 있는 지역을 말한다. 이곳 내포 지역은 일찌감치 천주교가 자리 잡았는데 이존창(1752~1801)의 포교 활동 덕분이었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1787년에서 1789년 동안에 세례를 하고 미사를 보는 ‘가성직제’를 하였다. 이존창은 이때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가신부가 되어, 고향인 예산을 중심으로 내포에서 포교 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강완숙이 천주교를 접하게 된 것은 1787년(정조 11) 이후가 된다.

     

    강완숙은 몇 살 때인지 분명하지 않은데, 후처로 덕산에 사는 홍지영과 혼인을 한다. 강완숙은 양반집 여성이라고 하는데, 홍지영의 아들 홍필주와 강완숙의 나이 차이가 열 살 정도인 것으로 보아 그때 홍지영은 꽤나 나이가 있었던 듯하다. 후처로 간 것으로 보아 강완숙의 친정이 권세 있는 양반 집은 아닌 듯한데, 강완숙을 심문한 기록에서 강완숙의 친정이든 남편이든 경제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었던 모양이다. 강완숙은 홍지영하고의 사이에서 딸 홍순희를 낳았다.

     

    강완숙이 천주교에 대해 듣게 된 것은 남편의 친척으로부터라고 한다. 그 시기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존창이 충청도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한 1787년 이후일 것이다. 이존창은 아마도 고향인 예산에서부터 포교활동을 시작했을 터인데 덕산은 예산 옆이라(현재는 예산군 덕산면이다) 내포 지역에서도 일찍 천주교에 입교했을 것이다. 내포는 한양 다음으로 천주교가 일찍이 전래된 곳이기도 한데 그 가운데 덕산은 신유박해 때 내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올 정도로 천주교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그녀는 ‘천주天主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교敎의 명칭이 바르니 교의敎義도 틀림없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는 천주교에 맹렬했던 듯 이복아들 홍필주, 시어머니, 친정부모님을 모두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 때 강완숙이 충정 감영이 있는 공주에 감금되었다. 그녀는 옥에 갇힌 교우들에게 음식을 날라 주다가 붙잡혀 갇히게 되었지만 양반 부녀자였기에 형벌을 받지 않고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강완숙은 끝내 남편만은 입교시키지 못했는데 신해박해에서 풀려난 뒤로 남편은 집에 두고 시어머니, 이복아들과 딸을 데리고 한양으로 이사하였다. 그녀가 남편과 떨어지게 된 것을쫓겨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강완숙이 남편한테 쫓겨났든 그녀가 남편을 버리고 왔든지간에 그녀가 남편도 없이 가족을 데리고 한양에 정착하고자 마음 먹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강완숙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은 이 부분 때문이었다. 18세기 말은 여러 변화의 과정에 있었지만, 여성에 대한 가부장 질서는 공고하던 때였다. 10살밖에 차이나지 않는 의붓아들이 강완숙의 뜻을 따랐고, 시어머니도 며느리의 뜻을 따라 아들을 두고 며느리를 따라왔으니 그녀는 가족들한테 신뢰를 받고 있으며, 충분한 리더십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강완숙의 이러한 활동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서소문공원 안에는 서소문 밖 사형장에서 처형된 처형자들을 기리는 순교자현양탑이 있다. 

     

    천주 아래에 모두 평등하다.

     

    신유박해는 진산사건으로 시작되는데, 전라도 진산에 살던 윤지충이 부모님의 신주를 불태운 사건이다. 이때 초창기에 천주교를 이끌던 많은 인물들이 배교를 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고문에 겁을 먹었다든가, 신앙심이 약했다든가 하는 문제는 아니라 그들이 생각한 천주교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천주교는 정치권력에서 배제된 남인들이 주로 믿었는데, 마테오 리치가 쓴 <천주실의>(1603년)는 유교에 대한 교양을 바탕으로 천주교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쓰여 있어 남인들은 그들의 사상적 기반인 유교가 천주교와 부딪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로마교황청에서는 1715년에 동방의 조상 숭배는 우상으로 규정하였고, 1773년에는 제사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다. <천주실의>로 공부한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사상적 바탕에서 크게 부딪침이 없다가 북경의 신부와 직접 교류하게 되면서 이러한 방침을 알게 되었고, 사대부 천주교인들은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와 공자 숭배 금지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진산사건 이후, 정약용과 북경에서 직접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 들이 배교하는 까닭은 이와 같이 뿌리깊은 사상적 기반이 흔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뒤로 천주교의 중심 세력은 중인과 여성이 되었다.

     

    강완숙을 비롯한 여성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억압적 상황에 놓인 여성들의 현실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유교 가운데 주자성리학을 받아들인 조선은 후기로 올수록 가부장제가 강화되면서 남존여비의 사회 속에서 여성들은 생을 살아가야 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천주 아래에 모두 평등하다고 하였다. 또한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받음으로써 이름이 없던 여성도 자기 이름을 갖게 되었다. 조선 양반이 첩을 거느릴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천주교에서는 일부일처제와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새로운 삶을 제시하였다. 조선 여성에게는 칠거지악이 있었다. 그 가운데 질투와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이 있다. 질투는 축첩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아들을 낳는 것은 가계를 계승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일부일처제가 되면 축첩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자손을 잇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니 18세기를 살고 있던 조선 여성에게는 가히 혁명적인 놀라운 세상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벽, 이승훈, 권일신 등 천주교를 최초로 받아들인 이들 남인의 부인들도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특히 이벽의 아내 류한당 권씨는 한문으로 되어 있던 서학 서적 가운데 <천주실의>, <칠극> 들을 한글로 번역하여 여성들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19세기에 한문으로 된 천주교 서적이 약 120여 종이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80여 종이 한글로 번역되어 있었다. 한글 천주교 서적은 대부분 여성들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강완숙이 <천주실의>를 읽고 서슴없이 입교를 하였다고 하는데, 류한당 권씨가 한글로 번역한 책이었을 것이다. 여성이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새로운 세계에 그녀는 매료되지 않았을까.
     

                                                                         ▲출처:http://rosacafe.com/120156106885

     

    강완숙의 활동

     

    강완숙이 서울로 온 것은 천주교 중심에서 활동하기 위한 것인 듯하다. 그녀는 한양의 중심 대사동(지금의 인사동, 관훈동)에서 자리를 잡았고, 이후에 안국동으로 다시 이사했다. 강완숙이 서울로 온 것은 1791년 10월 이후인데, 2,3년 만에 빠르게 교회의 주요 업무를 맡게 된다. 1795년 조선에 최초의 신부인 주문모가 입국하게 된다. 주문모는 계동에 있는 역관 최인길의 집에서 미사를 집전하며 머물렀지만, 6개월 만에 발각이 되고 주문모는 강완숙의 집에 머물게 된다. 이때부터 신유박해가 날 때까지 강완숙의 집은 천주교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삼엄한 눈길 속에서 강완숙이 주도면밀하지 못했다면 어찌 6년 동안이나 숨어 있을 수 있었을까. 남녀칠세부동석의 나라에서 외간남자를 몰래 숨겨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그녀가 강완숙이었던 것이다. 주문모 신부는 교리를 공부하는 명도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정약종을, 여회장에 강완숙을 임명하였다. 예배를 볼 때는 남녀가 함께 보고, 교리 공부는 여성들끼리 했다고 하는데, 그 중심에 강완숙이 있었다. 강완숙은 삼엄한 속에서 왕실 여성들에게도 전교를 하였다. 강화도로 유배 중이었던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그의 며느리 신씨(죽임을 당한 상계군 부인)를 전교하였고, 이들에 의해 경희궁 궁녀들도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다.

     

    황사영의 ‘백서’에 따르면, 강완숙은 남자 신도들에게도 신임을 얻고 있었다. 여자의 존재는 남자에 종속된 존재로만 여겼는데, 천주 앞에서 평등해지니 강완숙은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고, 능력을 그대로 인정 받을 수 있었다. 명도회 이후에 신도수가 급격히 늘었는데 2/3가 여자였다니 강완숙의 활동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교회 업무는 남신도들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여신도로서 강완숙이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교리를 아무리 공부한다 해도 뼛속 깊이 박힌 생각을 쉬 바뀌기는 어려운 일인데, 강완숙은 스스로 남자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동료로 자기 위치를 확보하였다.

     

    신해박해 속에서 강완숙은 여자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잡히지는 않았다. 그러다 체포된 사람들한테서 강완숙과 여신도 이름이 나와 여신도로서는 윤점혜와 함께 최초로 체포되었다. 조선 지도부층에서는 여성이 중심적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강완숙과 함께 체포된 윤점혜는 강완숙의 명성을 듣고 강완숙을 찾아온 여성이었다. 강완숙의 집은 미사를 올리는 성당의 역할도 하였지만, 여성들의 공동체 공간이기도 하였다. 강완숙 집을 중심으로 둘레에는 몇몇의 공동체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실을 팔거나 옷을 지어 팔거나 김지를 파는 등 여성이 할 수 있는 경제활동을 하였다. 또 천주서적을 만들고 파는 일도 하였는데 이 활동은 전교활동이면서 중요한 경제활동이었다고 한다.

     

    강완숙에 대한 관심은 조선 사회에서 남편과 떨어져 가족을 이끌고 충청도에서 서울까지 올라왔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활동은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는 면이 많았다. 강완숙은 남자를 보좌하는 역할이 아닌 남자와 동등한 위치에서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금이나마 진보적이라는 시민단체에서도 남성들이 더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경우가 지금도 많이 있다. 그런데 18세기를 살았던 여성이 스스로 남녀평등을 실현한 것이다. 여자만 관리하는 여회장이 아니었고, 교회 전체에 대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던 여회장이었다. 또한 경제적 자립을 하는 여성공동체를 만든 것은 우리나라 여성운동사에서도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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