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재단이프
  • 이프북스
  • 대표 유숙열
  • 사업자번호 782-63-00276
  • 서울 은평구 연서로71
  • 살림이5층
  • 팩스fax : 02-3157-1508
  • E-mail :
  • ifbooks@naver.com
  • Copy Right ifbooks
  • All Right Reserved
  • HOME > IF NEWS > 문화/생활
  • [15회]조선 왕실의 베이비시터, 봉보부인
    최선경 / 2013-04-23 12:29:49
  • 분유가 없었다면 아이 키우는 엄마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더욱이 젖도 잘 안나오는 엄마라면 난감할 것이다. 요즘이야 분유로 쉽게 해결할 수 있고 업체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제품도 고급화되고 있지만 신생아에게 가장 좋은 것은 역시 건강한 엄마의 젖이 아니던가! 분유가 없던 조선시대 그 해결책은 바로 유모(乳母)였다. 명품 분유광고들이 앞다투어 궁중의 이미지를 통해 고급스러움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 왕실에서는 왕후가 모유를 직접 수유하기보다는 유모의 역할이 더 컸다.


    서민들은 심봉사 처럼 젖 동냥을 하면서 키웠을 테지만 양반집에서는 유모를 고용했다. 말 그대로 유모는 젖을 줄 뿐만 아니라 기저귀 갈고 목욕시키고 안아주고 돌봐주는 등 어머니가 해야 할 육아를 거의 담당했다. 사대부인 경우 생모가 허드렛일을 할 수는 없고 산후조리도 해야 했기에 유모나 보모를 두었는데, 왕실에서는 특히 더 유모가 중요했다. 내외명부까지 책임져야 할 막중한 임무가 있었던 왕비에게 육아는 사실상 유모와 궁녀들 몫이었다.

     

                                                                                      ▲분유광고의 한 장면

     

    유모의 선발기준 - 대부분 천민출신

     

    1809년(순조9) 8월 순조의 아들(효명세자)이 태어나자 영중추부사 이시수가 원자의 유모 선발을 건의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유모는 반드시 너그럽고 인자하며, 따뜻하고 공손하며, 예의를 차리고 말을 적게 하는 이를 골라서 자식의 스승으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덕을 이룬 군자의 일이므로 이런 여자를 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일에 따라 올바르게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모는 반드시 외모가 단정하고 품행과 행실이 양순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순조실록, 9년 8월11일>

     

    유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젖이 풍부하고 건강해야 했다. 영아 사망율이 높았던 조선시대에 직접적으로 젖을 먹이는 유모의 건강상태는 당연한 전제조건이었다. <명종실록>에는 원자가 갑자기 다리의 힘이 약해지고 쇠약해진 듯하자 유모의 건강상태를 따졌고 의원이 “유모가 습증이 있다”고 하자, 곧바로 교체했다.

    유모의 신분에 대해, 내훈에는 ‘국왕이 세자를 낳으면 사대부의 아내나 대부의 첩으로 하여금 세자에게 젖을 먹이게 하다가 3년이 되면 내보낸다’고 하여 사대부의 아내나 첩으로 하여금 왕자의 유모를 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왕자의 유모는 신분도 남달라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현실적으로 이는 불가능했다. 내외법이 철저했던 유교사회에서 사대부 집안의 여인이 자기 아이를 두고 남의 아이를 기르는 것은 쉽게 용인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남녀유별의 의무가 없는 천민층 산모들 중에서 유모가 되었다. 관청의 공노비나 종친 ․ 사대부의 사노비 중에서 추천을 거쳐 유모로 발탁되었다. 성종의 유모 백씨는 경혜공주의 노비였고 연산군의 유모 최씨도 천민 출신이고 인종의 유모도 김제함의 종이었다.

     

    이때 유모는 자신의 아이를 떼어놓고 오기도 하고 때로는 양쪽 아이를 동무삼아 같이 키우기도 한다. 원자가 3~4세가 되어 정식 교육을 받게 되면 유모는 궁 밖으로 나와 살게 되지만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갓난아기 때부터 밀착된 관계였기 때문에 유모와 왕자는 친 모자관계처럼 친밀하고 편안한 사이가 되었다. 유모는 아이의 습성, 욕구, 성격까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왕과 왕비는 오히려 유모를 통해 아이의 상태를 전해 들었다. 왕자가 왕이 되면 자신을 키워준 유모의 은혜를 잊지 못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해줬다. 그 결과가 ‘봉보보인’(奉保夫人)이다. 여성의 젖까지 착취하는 신분제도에 분노할 수도 있겠지만, 그 보상은 생각보다 컸다.

     

    <내명부와 외명부 품계>

    관품

    내명부

    외명부

    왕궁

    세자궁

    왕궁

    종친의 처

    문무관의 처

    정1품

    빈(賓)



    공주(公主)

    옹주(翁主)

    부부인(府夫人)

    부부인(府夫人)

    군부인(郡夫人)

    정경부인

    (貞敬夫人)

    종1품

    귀인(貴人)



    봉보부인(奉保夫人)

    군부인(郡夫人)

    정2품

    소의(昭儀)



    군주(郡主)

    현부인(縣夫人)

    정부인(貞夫人)

    종2품

    숙의(淑儀)

    양제(良娣)



    정3품

    소용(昭容)



    현주(縣主)

    신부인(愼夫人)

    숙부인(淑夫人)

    신인(愼人)

    숙인(淑人)

    종3품

    숙용(淑容)

    양원(良媛)



    신인(愼人)

    숙인(淑人)

    정4품

    소원(昭媛)





    혜인(惠人)

    영인(令人)

    종4품

    숙원(淑媛)






     

    종1품 ‘봉보부인’으로 초고속 신분상승

     

    봉보부인이 처음 생긴 것은 세종 때이다. 1435년(세종17) 6월 예조에서 올리기를, “이제부터 유모의 봉작을 아름다운 이름을 써서 봉보부인이라 하고 품계는 종2품에 해당하게 하소서”하고 청하자 그렇게 하였다. 하지만 성종 대 [경국대전]을 완성하면서 종1품으로 승급되었고 고종대에 완성된 법전 [대전회통]에도 종1품으로 되어있다. 영의정 다음가는 벼슬에 해당하는 종1품 지위로서 이들은 궁중 행사에서도 정경부인이나 공주, 옹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참가했으니, 신분을 초월한 파격적 대우가 아닐 수 없었다.

     

    봉보부인은 작위와 함께 국왕으로부터 시시때때로 토지와 노비, 말, 곡식 등 하사품을 받았으며 그의 가족들은 모두 면천되고 벼슬을 얻기도 하였다. 부인이 왕자의 유모로 들어간 덕에 천민 출신 온가족이 덕을 보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여성들이 남편이나 아들 덕에 품계를 받지만 봉보부인은 그 반대의 경우였다.

    단종의 유모는 단종비를 간택하는 자리에 참석했다고 하니, 일찍 죽은 현덕왕후를 대신하여 대비의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조차 유모에 대해서는 극진한 대우를 하였다. 즉위 2년 유모 최씨의 친척 6,7촌까지 양민으로 격상시켰고 노비와 수많은 재물을 하사하였다.

                                                                          ▲김문식 저,<왕세자교육>에서 발췌

     

    성종의 유모 백씨에 대한 사례는 그 특별함의 전형을 보여준다.

    소혜왕후 한씨는 의경세자의 세자빈으로 궁중에서 살다가 1457년(세조3) 둘째아들 자을산군(이후 성종)을 낳고 갑자기 세자가 요절하자 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었을 당시, 한씨보다는 유모 백씨가 더 많이 애를 썼을 것이고 어린시절을 함께 보낸 유모에 대한 성종의 감정도 더 애틋했던 모양이다. 성종은 왕이 되자 백씨를 종1품 봉보부인으로 봉하고 천민이었던 그 남편 강선도 면천시키고 벼슬을 주는데, 당상관에까지 오른다. 신하들의 반발이 빗발쳤지만 그때마다 성종은 무마했다. 백씨가 왕실의 세도를 등에 업고 궁궐에 자주 드나들자 그의 집에는 청탁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백씨가 왕에게 직접 청탁을 하기도 했다. 그러자 성종은,

     

    “너는 무슨 물건을 받고 이런 청을 하는가? 관직은 공기(公器)인데, 내가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내알(內謁:은밀한 청)의 말을 듣고 사람들에게 벼슬을 준다면 국가의 정사가 어떻게 되겠는가? 만약 또다시 이런 말을 한다면 내가 반드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백씨가 부끄럽고 두려워하며 물러갔다. <성종실록, 1년 7월24일>

     

    이후 성종은 백씨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늘 백씨의 잘못을 감싸주었고 그녀가 죽었을 때에는 몹시 슬퍼하며 졸기를 써서 실록에 남겼으며 종1품 종친, 재상의 예로 장례를 치러주었다. 봉보부인은 천민 출신 여성이 오를 수 있는 공식적인 최고의 자리였다.

     

    ebs 역사채널 - 귀하신 몸 (원자의 유모)

    http://home.ebs.co.kr/historye/replay/2/view?courseId=BP0PHPI0000000035&stepId=01BP0PHPI0000000035&lectId=3126547

     

     

     



    @4d4e81d3f9219886bcadb3dc9b503f82@H*2013/04/130423_5175fff081cb0.jpg|33055|jpg|대전회통.jpg|#2013/04/130423_5175fff1f3c87.jpg|118942|jpg|분유광고1.jpg|#@4d4e81d3f9219886bcadb3dc9b503f82@
덧글 작성하기 -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덧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