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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회]왕실의 가례소, 별궁에서 생각하다
    최선경 / 2013-04-01 11:12:37
  • 조선시대에는 많은 궁이 있었다. 경복궁, 창덕궁처럼 왕이 집무를 보는 궁궐 말고도, 왕이 행차할 때 머물던 행궁(行宮), 왕으로 등극하기 전 사저로 사용한 본궁(本宮), 왕실에서 필요에 따라 특별히 지어서 사용했던 궁을 별궁(別宮) 들이 있었다. 왕이나 왕세자의 혼례 때 왕비나 세자빈을 맞아들이던 곳도 별궁이라고 하였다.

     

                                    ▲운현궁의 노락당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가례를 맺은 곳이다. 그러한 연유로 운현궁에서는
                             지금도 전통혼례를 치르고 있으며, 명성황후 가례 중 책비와 친영 의식을 재현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운현궁을 여인들이 살펴보고 있다. 왕후의 심정을 되새겨 보는 걸까.
                                       운현궁 안에 있는 유물전시관에는 가례시의 복식과 책비의 한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혼례식을 누구 집에서 치르지?

     

    조선에서는 왕이나 왕세자 혼례 때 왜 별궁이 필요했는지 살피기 전에 우리나라 결혼 풍습을 보면,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서류부가혼(婿留婦家婚)’ 혼인 형태를 보여왔다. 사위가 며느리 집에 머문다는 뜻의 서류부가혼은 사위가 딸집에 머문다는 이야기로, 고구려 시대 서옥제(壻屋制)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서옥’이란 ‘사위의 집’이란 뜻으로 혼인한 딸 집에 사위 집을 두고 같이 사는 형태를 말한다. 남편을 뜻하는 서방이라는 말이 집의 서쪽에 사위의 집을 지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여기서 비롯된 듯하다.

     

    처갓집에 머무는 기간은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이때에는 여성이 친정 부모를 모실 수 있었으니 여성의 지위는 조선시대 중기 이후처럼 사뭇 낮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성리학을 받아들이며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유교식 혼례로 바꾸었지만 조선 중기 이전까지는 혼례 뒤 부부가 친정에 머무는 풍습이 남아 있었다. 조선 초기 관리들은 낙향한 뒤에 처가에 머물렀던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신사임당이 시댁이 있는 한양에 머물지 않고 친정 부모가 계시는 강릉에서 살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풍습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유교식 혼례는 의혼(議婚, 혼인을 의논하는 일) 납채(納采, 남자 집에서 혼인을 하자고 예를 갖추어 청하면 여자 집에서 받아들이는 일) 납폐(納幣,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혼서지와 폐백을 함에 담아 보내는 일) 친영(親迎,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직접 맞이하는 일) 부현구고(婦見舅姑, 신부가 처음으로 시부모를 뵈며 폐백을 올리는 일) 묘현(廟見, 사당에 인사드리는 일)의 여섯 단계로 진행되어 이를 ‘육례’라 하였다.

     

    이것을 오늘날로 따진다면 의혼은 중매를 보는 일이고, 납채는 약혼식이 되겠고, 납폐는 결혼 전 함을 받는 일, 부현구고는 결혼식이 끝나고 폐백절을 올리는 일이 되겠다. 시부모님 가운데 한 분이라도 돌아가신 분이 있으면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묘에 찾아가 신부가 준비한 한복을 태우는 일을 하는데 이것을 묘현으로 볼 수 있겠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에 웨딩드레스를 입는 결혼식을 하더라도, 전통혼례의 풍습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인데,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유교식 혼례를 도입하고, 전 계층에서 실현되도록 강화하였지만 사람들의 풍습을 쉬 바꾸지는 못했다.

     

    육례 가운데 가장 유교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은 아무래도 친영과 묘현이 아닐까 한다. 조상님의 위패를 모셔 놓는 사당은 유교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면서 적장자 중심의 가부장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친영은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와서 신랑집에서 혼례식을 치르고 첫날밤을 보내는 형태로, 신랑이 신부집에 머무는 서류부가를 전면 부정하는 행위가 된다. 신부를 데리고 와 신랑집에서 혼례를 올리는 친영은 혼인생활이 부계 친족 중심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형태이다. 하지만 민가에서는 여전히 신부집에서 혼례식을 올리고, 신부집에서 삼일을 보내고 시댁으로 왔다.

    조선 왕실에서는 더욱 확실한 친영을 원하였기에 왕가의 혼례에서는 친영을 철저하게 지켰다. 유교식 혼례의 모범을 왕실에서 보여주고 백성들이 이를 따르도록 한 것이다. 친영을 오는 왕이나 세자는 왕비나 왕세자비가 머무는 별궁으로 가는 것이었다.

     

                                          ▲왕세가 아닌 왕으로서 가례를 치룬 중종과 선조는 왕이 직접 사가로 가는 것이
                                 문제가 되어 중국 사신이 머문 태평관에서 친영을 하였다. 현재 서소문동 오펠리스빌딩 앞이다.

     

    조혼의 풍습을 가져 온 간택

     

    왕실의 혼인은 특별히 ‘가례’라고 한다. 조선 시대 왕비의 가례 절차를 보면 양반 가문과 비슷하였다. 왕비(세자비)감이 결정되면, 택일(擇日, 좋은 날을 골라 종묘와 사직에 가서 왕비를 들이게 되었음을 고하는 의식), 납채(納采, 임금의 장인이 될 집안에 왕비로 결정되었음을 알리는 의식), 납징(納徵, 폐물을 보내는 의식), 고기(告期, 왕이 혼인 날짜를 알리는 의식), 책비(冊妃,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 명사봉영(命使奉迎, 대궐로 왕비를 맞이해 오는 의식), 동뢰(同牢, 침전에서 첫날밤을 치르는 의식), 왕비수백관하(王妃受百官賀, 왕비가 조정의 벼슬아치들에게 하례를 받는 의식), 전하회백관(殿下會百官, 왕이 백관을 만나는 의식), 왕비수내명부조회(王妃受內外命婦朝會, 왕비가 내명부와 외명부의 여성들에게 인사를 받는 의식)로 가례가 이루어졌다.

     

    왕실의 가례와 사가의 혼례를 견주어 가장 큰 차이는 의혼이 없다는 점이다. 즉, 왕비나 왕세자비는 중매로 정하지 않고, 간택으로 뽑은 점이다. 간택은 여러 후보자들을 대궐 안에 모아 놓고, 임금 이하 왕족이 직접 보고 적격자를 뽑는 행위였다. 우리나라에서 간택은 고려 때 원나라에 처녀 조공을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러한 간택은 명나라가 처녀조공을 원할 때도 이루어져 간택사가 간택한 처녀를 경복궁에 모아놓고, 왕이 친히 뽑아 명나라로 보냈다.

     

    이러한 제도를 왕실의 가례에 받아들인 것이니, 논란의 소지가 있었다. <세종실록> (세종 11년(1429) 8월 4일 기사) 기록을 보면,

     

    임금이 또 지신사(知申事) 정흠지에게 이르기를,

    “이제 동궁을 위하여 배필을 간택할 때에는 마땅히 처녀를 잘 뽑아야 하겠다. 세계와 부덕은 본래부터 중요하나, 혹시 인물이 아름답지 않다면 또한 불가할 것이다. 나는 부모 된 마음에서 친히 간택하고자 하나, 옛 예법에 없어서 실행할 수가 없으므로, 창덕궁에 모이게 하고 내관으로 하여금 시녀와 효령 대군과 더불어 뽑게 해야겠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황희·맹사성·변계량·신상·윤회 등은 모두

    “좋습니다.”

    하였으나, 허조만 유독

    “불가하옵니다. 만약에 한 곳에 모이게 하여 가려 뽑는다면 오로지 얼굴 모양만을 취하고 덕(德)을 보고 뽑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잠깐 본 나머지 어찌 곧 그 덕을 알 수 있으리오. 이미 덕으로서 뽑을 수 없다면 또한 용모로서 뽑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처녀의 집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좋다고 생각되는 자를 예선해서, 다시 창덕궁에 모아 놓고 뽑는 것이 좋겠다.”

     

    위 일은 문종이 세자 시절, 두 번째 세자빈 순빈 봉씨를 간택할 때의 일이다. 그 전에 세종이 직접 간택하였던 휘빈 김씨를 폐위하고 나서이다. 이 순빈 봉씨도 레즈비언 일화를 남기며 폐위하여졌지만 말이다. 세종은 스스로 간택한 문종의 비를 모두 폐위시켰으니 아이러니이고, 간택으로서 비를 맞이한 최초의 왕세자이기도 하였다.

     

    어쨌든, 세종은 왕비(왕세자비)의 자질로 용모를 중요하게 보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왕실의 가례는 중매로 되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올라오지만, 간택은 세종이 시작한 이후 계속되었다. 왕실의 가례에 조공으로 바친 처녀를 뽑는 간택제가 쓰였다는 점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외모지상주의 역사는 꽤 오래된 것이다.

     

    간택제의 다른 문제는 조혼의 풍습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보통 간택은 세 번 정도 이루어졌는데 초간택에서 6~10명의 처자를 뽑고, 재간택에서 3명의 처자를 뽑았다. 3명의 처자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지만 삼간택에서 뽑히지 못한 두 처자는 소문이 나서 다시 결혼할 수 없었다. 조선 중기를 지나서는 이미 비를 내정해 놓고 간택을 하였기에, 조선 초처럼 ‘혹시나’가 실현되는 일은 없었기에 사가에서는 딸이 혼자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지 않도록 혼인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국혼과 동시에 궁인도 간택을 하였으므로, 간택은 조선 여인의 생활에 영향을 미쳐 조선은 처녀조공이 사라진 뒤에도 조혼의 풍속이 계속된 것이었다.

     

                                  ▲안동궁터. 대한제국 시절의 별궁으로 황실 가례가 이루어진 곳이다. 안국역에서 정독도서관
                                    가는 골목 입구에 있는 풍문여고 자리에 있다. 지금은 교정 안에 이렇게 표석만 남아 있다.
     
     
    ▲풍문여고 안에 있던 안동별궁은 1965년 해체되어 정화당 건물은 현재 우이동의 한 보험회사 연수원으로, 경연당과 현광루는 고양시의 한    골프장의 휴게실로 쓰이다가 문화재청에 기증하여 현재 부여에 있는 한국전통문화학교 안에 남아 있다.

     

    친영을 정착하고 싶어 한 왕실

     

    마지막 간택에서 왕비(왕세자비)로 간택된 여성은 그날 이후 바로 별궁으로 들어가 궁중법도를 배우고, 가례의식을 준비하였다. 별궁생활의 외로움과 혹독함은 혜경궁 홍씨(1735~1815)가 그의 저서 <한중록>에서 밝힌 바 있으며, 조선의 마지막 왕비 순정황후 윤씨(1896~1966)도 밝힌 바가 있다. 어린 나이의 이들 빈들은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가의 정략결혼처럼, 그들의 뜻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궁궐 생활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조선 초부터 별궁을 두었던 것은 아니다. 별궁에 대한 기록은 중종과 문정왕후의 가례부터 나타난다. 별궁을 따로 둔 것은 사가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의미도 있지만, 왕실의 권위를 보존하자는 뜻이 있었다.

    가례의 절차인 ‘명사봉영’은 사가의 ‘친영’과 같은 것인데 왕이나 왕세자가 직접 신부 집으로 가야 하는 절차인데, 왕이 백성들의 집을 드나드는 것이 대의명분을 중시한 유교사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왕실의 권위를 유지하면서 명사봉영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별궁’을 두는 것이었다.

     

    별궁으로는 어의궁, 운현궁, 안동궁 세 곳의 기록이 보인다. 어의궁은 효종의 잠저로, 가장 많이 가례소로 쓰였으며, 운현궁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소, 안동궁은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 가례소로 쓰였다. 별궁이 따로 없던 시절에는 명나라 사신이 머물렀던 태평관에서 친영을 하였다. 태평관에서 친영을 한 기록은 중종과 문정왕후(중종 12년(1517)), 선조와 인목왕후(선조 35년(1602)) 가례에서 보인다. 우리나라에 유교의 가부장제가 강화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였다. 한국전쟁을 마친 뒤 반공이데올로기를 강화한 것과 같은 이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왕실과 사대부들은 흔들리는 민심을 잡고,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유교를 강화해 간다. 그러한 과정에서 별궁이 필요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왕실의 이러한 노력에도 정부는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여전히 혼례식은 처가에서 이루어졌고, 신랑은 삼일 동안 처가에 머물렀다. 면면히 내려온 풍습은 절대 권위를 가지고 있는 왕실에서도 어쩌지 못했던 모양이다.

     

    ▲어의궁(효제동)은 인조의 잠저인 어의궁(사직동)과 구분하기 위해 하어의궁 혹은 어의동본궁으로 불렸다. 그 의미를 아는지 이곳은 현재 한빛웨딩플라자와 이화예식장 사이에 있다. 어의궁이 이곳에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 뒤로 결혼식에 참석한 한복 입은 여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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