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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회]여종에서 명창이 된 석개
    최선경 / 2013-02-26 03:31:49
  • 석개라는 여성이 있었다 / 글 김소원


    중종 시대에 석개라는 여성이 있었다. 이 여성의 출신은 종이었다. 알다시피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였다. 노비를 셀 때 한 명, 두 명 하지 않고 한 구(口), 두 구(口)로 세었는데 이는 노비를 가축 비슷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건장한 노비는 무명 400필 값을 쳤는데 말 한 마리가 무명 450필이었다고 하니 노비는 말 한 마리 값도 채 되지 않는 처지였다. 이러한 처지의 노비한테 인격이라는 것은 주어지지 않았다. 얼마 전 드라마에서 인기를 끌었던 <추노>를 떠올려도 노비에 대한 인식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노비한테 인격이라는 것은 주어지지 않았다. 드라마 '추노' 포스터(사진=KBS)

     

    물통을 지고 가서 종일 노래하던 세답비


    노비는 우선 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공노비와 개인에게 소속되는 사노비가 있었다. 그 종류도 많았는데 여성의 경우, 밥 짓는 취비, 빨래를 하는 세답비, 반찬을 만드는 찬모, 바느질을 하는 침모 등이 있었다. 사노비의 경우 아주 큰 대감집이 아니면, 여러 일을 하기도 하였다.

    석개는 중종과 숙원이씨 사이에 태어나 중종의 여덟째 딸이 되는 정순옹주(1516~1581)와 혼인한 송인(1516~1584) 집안의 세답비였다. 종들은 특별한 이름도 없이, 조끄만년, 어린놈, 뒷간이, 똥개 이런 식으로 불렸는데 석개(石介)는 박지화(1513~1592)의 <수암집守菴集>, 심수경(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譚>, 신흠(1566년~1628년)의 <상촌집象村集>, 허균(1569~1618)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그 이름이 남아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우선 허균의 글부터 보면, “노래로는 기생 영주선(瀛洲仙)과 송여성(宋礪城)의 여종 석개(石介)를 모두 제일이라 하였다.”고 한다.

    석개는 노래를 잘 불러 문사들의 문집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보통 여자로서 노래를 부른다 하면 기생을 떠올릴 텐데 석개는 여종이었다. ‘영주선’처럼 가무를 잘한 기생, 시를 잘 짓는 기생들의 이름이 문사들의 문집에 나오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종으로서 이름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보지를 못했다. 송여성은 중종의 부마가 된 뒤 송인이 ‘여성위’에 봉해지면서 불려지게 되었다. 석개에 대해 <어우야담>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날, 송인의 집에 자그마한 계집종 하나가 들어왔다. 비틀린 화살같이 작은 눈에 늙은 원숭이 얼굴을 한, 석개라는 이름의 계집아이였다. 그 아이에게는 주로 물 긷는 일이나 약초 캐는 일 등 허드렛일이 맡겨졌다.

    그런데 석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물을 길어오라고 시키면 나무통을 지고 우물가로 달려갔다. 그런데 우물가에 가서는 물통을 난간에 걸어놓고 하루 종일 노래만 불렀다. 특별히 배웠던 것은 아니니 제대로 된 음악이 나올 리는 없었지만 이 노래, 저 노래 되는 대로 열심히 불렀다. 하루 온종일 노래하다가 날이 저물면 다시 빈 물통을 지고 돌아왔다. 집에 오면 늘 매와 꾸지람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다음 날이면 모두 잊고 또 물통을 지고 가서 종일 노래하다 돌아오곤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런 그녀의 버릇은 아무도 고칠 수 없었다.

    송인의 집에서는 석개에게 다른 일을 시키기로 했다. 이번에는 약초를 캐오는 일이었다. 석개는 광주리를 하나 들고 들판으로 매일같이 나갔지만 약초 캐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약초가 눈앞에 보여도, 발 밑에 밟혀도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역시 노래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어느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서는 주변에 작은 돌멩이를 수북하게 모아놓았다. 노래 한 곡을 부르고 나면 돌멩이 하나 집어 광주리에 넣고, 또 한 곡 부르고 나면 다시 돌멩이를 광주리에 담았다. 나를 잊고 세상을 잊고 노래 부르다 보면 어느 순간 광주리에 돌이 가득 찬다. 그러면 이번에는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돌멩이를 하나씩 꺼내 놓는다. 그리하다 보면 광주리에는 돌이 가득 찼다 텅 비기가 수차례 반복한다. 이렇게 하루 종일 노래만 하다가 날이 저물면 빈 광주리를 달랑 들고 집에 들어가곤 했다. 주변에서 아무리 크게 나무라도 그녀의 노래는 그칠 줄 몰랐다. 결국 석개의 이야기는 송인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송인은 그녀가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허락하였다. 석개는 얼마 안 가 장안에서 제일 노래 잘 하는 음악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근 100년 동안 그녀만한 명창이 없었다.

    -<조선 여성의 일생>, P351-P353에서 재인용“


                                                    ▲한강음전도(출처:책<조선의 문화공간>

    석개는 그렇게 꿈을 이뤘다.

     

    이에 따르면, 석개는 이 집안에서 소유했던 여종의 자식은 아니었다. 노비의 신분은 아니었는데 가난으로 인해 팔려왔든지, 다른 집에서 팔린 종이었던 모양이다. 종으로서 자기 일을 하지 않고 맨날 노래만 부른 석개에 대해 주인이 알았다면 모진 매질이 따랐을 법한데 주인 송인과 정순옹주는 석개한테 노래를 배울 기회를 주었다. 여유 있는 집에서는 일부러 사내종에게 피리를 가르치고, 여종에게는 거문고와 가무 등을 가르쳐 양반네를 즐겁게 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렇게 전문적으로 노래 공부를 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았을까 싶다.

     

    송인은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예서에 능해 궁궐의 편액에 그의 글씨를 남겼다고 한다. 정순옹주와 동갑인 송인이 부마로 정해진 때가 중종 21년(1526)이니, 열한 살이 된다. 하지만 부마가 되어 정계에 나갈 수 없는 몸이니, 송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한가로이 풍류를 즐기는 일이었을 터인데, 그의 묘비명에 따르면,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고 탐방을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풍류가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중종 24년(1529)에, 송인의 집에서 크게 성악을 벌이고 유밀과까지 준비하여 기탄없이 마셔댔는가 하면, 술을 하사하여 그 사치스러움을 가중시켰다고 하는데 흉년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조정에서 이야기가 오고갔다.

    위에서 절검하여 아랫사람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외조모가 돌아가신 지 겨우 1개월 밖에 되지 않은 때에 집에서 잔치를 열고 음악을 연주한 것은, 인정에도 차마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상소가 올라온다. 이때 송인은 아직 열네 살이었으므로, 그 아버지 송지한을 추문하는 것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하지만 송인이 죽은 뒤에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평을 보면, 호화로운 환경에서도 가난한 사람처럼 살았고, 거상(居喪) 때 잘 견디지 못할까 봐 평상시에 하루 걸러 담박한 음식을 먹었다고 하고, 놋쇠그릇으로 요강을 만들지 않았는데 그 까닭이 뒷날 망가져 사람들의 음식그릇이 되지 않을까 걱정해서라고 한다. 이 글이 ‘주례사비평’이 아니라면, 위에 거론되었던 사치는 아버지의 뜻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위의 중종 24년의 일에서 ‘성악’을 벌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집안이 음악을 좋아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집안의 풍토 때문인지, 정순옹주가 특별히 석개를 안타까이 여겼는지 석개는 벌을 받지 않고 노래를 배울 기회를 얻게 된다.

    전문가에게 배운 석개의 노래 실력은 일취월장하였던 듯 유몽인은 100여 년 동안 그런 명창이 없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석개는 그렇게 꿈을 이뤘다. 꿈을 놓지 않는다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석개는 보여 주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매질과 꾸지람이 두려워 어디 그렇게 노래를 끝없이 불러댈 수 있었을까. 내 팔자에 이렇게 노래를 불러서 무엇하랴, 하며 쉽게 포기하고 마는 것이 보통의 사람 일인데 석개는 종의 신분에서 명창으로 문사들의 문집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지금의 한남대교 북단 둘레에 있던 제천정에서 영천군수로 가는 이현보를 위해 이별의 술자리를 하는 그림이다.
    수월정에서의 풍류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이런 풍경 속에 석개의 자리가 있었다.(농암종택 소장 그림) 
     

    중국의 명창에 비견돼

     

    조선시대 한강가에는 이름난 정자들이 있어 양반네들이 풍류를 즐겼는데, 송인도 그런 정자를 지었다. 수월정이라는 정자인데, 동호에 있었다고 한다. 동호는 지금의 동호대교 북쪽에있었고 두모포라는 나루가 있었다. 한강과 중랑천 두 물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호수와 같이 물이 맑고 잔잔하였는데 한양도성 동쪽에 있는 수려한 물가라는 뜻으로 ‘동호’로 불렸고, 용산강이 ‘서호’로 불렸다. 이곳 둘레에는 몽뢰정, 쌍호정, 황하정 같은 정자들이 들어서 조선의 문화공간을 이끌었다. 이곳에 수월정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정확한 자리를 찾을 수는 없고, 옛사람들의 문집에서 수월정에 대한 추억을 찾을 수 있다. 신흠의 문집 <상촌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7월 16일에 태징(이수준의 자)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달밤에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고 인하여 수월정에 올라가 이틀 밤을 묵고 돌아왔는데, 동양위(東陽尉)도 따라갔었다. 이 정자는 바로 돌아가신 여성위 송인의 별장이었다. 여성위는 문장과 인망으로 당시에 우뚝 드러났고, 서법에 더욱 뛰어나 왕희지의 경지를 얻었으므로, 한 시대 금석문의 글씨가 모두 그의 손에 맡기어졌다. 나도 여성위를 직접 보았는데, 아름다운 풍채가 단아하고 묵중하며 미목이 그림같이 생기어 참으로 귀공자의 풍격이었다.”

     


    동양위는 선조의 부마로 정숙옹주와 혼인한 신익성을 이르는데, 이 글을 쓴 신흠의 아들이 된다. 송인이 죽은 뒤에 송인이 남긴 정자에서 여전히 풍류는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그의 집에는 석개라는 가기(歌妓)가 있었으니, 대체로 옛날 진청(秦靑) 같은 유였다. 여성위는 이미 이 정자의 좋은 경치를 소유한 데다 또 성기(聲妓)에 대한 오락까지 소유하여, 태평 시대에 청복을 누리고 끝내 부귀로 생을 마쳤던 것이다.” 
                                                                                         

                              ▲수월정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면 이와 같았을까. 동호대교 북쪽 달맞이 봉에서 바라본 한강의 모습

    천한 여자의 몸으로 여러 명상(名相)들의 시를 얻었으니...

     

    송인의 풍월행차에는 늘 석개가 같이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석개를 중국의 명창 진청과 견주어 석개의 위상을 드러내 주고 있다. 심수경도 <견한잡록>에 석개에 대해서 쓰고 있다.

     

    “여성군 송인의 비(婢) 석개는 가무를 잘하여 당시에 견줄 만한 이가 없었는데, 영의정 홍섬이 절구 3수를 지어 주고 좌의정 정유길, 영의정 노수신, 좌의정 김귀영, 영의정 이산해, 좌의정 정철, 우의정 이양원과 내가 연이어 화답하고, 기타 재상들도 많이 화답해서 드디어 큰 시첩이 되었다. 천한 여자의 몸으로 여러 명상(名相)들의 시를 얻었으니, 빼어난 예술이야 어찌 귀하지 않으리오.”

     

    석개의 노래에 반해 내로라하는 영의정, 좌의정들이 화답시를 지어 주었다는 내용이다. 앞서 유몽인은 석개가 매우 못생겼음을 ‘비틀린 화살같이 작은 눈에 늙은 원숭이 얼굴’이라고 하였는데, 문사들은 노래가 아름다우니 생김새도, 신분도 중요하지 않았다. 기녀도 아니면서 영의정, 좌의정들한테 시를 받은 석개는 감개무량했을까. 온갖 눈총에도 굴하지 않고 노래를 불렀지만 아무런 희망이 없던 종의 시절-명창이 되었다고 노비의 신분을 벗은 것은 아니다. 문집에서 석개 앞에는 늘, 종이었다는 말이 수식어로 따라 붙고 있다-을 되돌아보면 스스로 감탄을 하지 않았을까. 심수경도, 천한 여자의 몸이지만 높은 예술에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아직은 신분제가 공고하였던 조선 중기 때를 생각하면, 석개가 이룬 성과는 가히 신화적이라 할 만하다. 그렇게 꿈을 현실화시키면서 석개라는 여성은 우리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것이다.

    글 김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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