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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회]조선시대 여신을 모신 제례, 선잠제
    최선경 / 2012-12-17 02:50:28
  • 남경여직(男耕女嬂)이라는 말이 있다. 남자는 밭 갈고, 여자는 길쌈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로,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경제 활동이 농업과 길쌈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잘 아는 ‘견우직녀’ 이야기는 이 남경여직을 일깨우는 대표적인 설화이기도 하다. 농업은 인류가 정착생활을 가능하게 해준 보배로운 경제활동이었다. 농업으로는 먹을거리를 해결하였고, 길쌈으로 입을 것을 마련하였다. 뼈바늘, 바늘통, 가락바퀴 같은 유물로 인류의 의류생활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러한 유물은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하였던 신석기시대 유물에서 발견되고 있다. 인류는 동물의 가죽을 벗겨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였고, 이후 천을 직조하여 옷을 지어 입었다. 이러한 유물에서 여성의 길쌈활동은 신석기시대부터 해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6부가 두 편으로 나뉘어 길쌈 경쟁을 하였는데 무리를 이끄는 것은 공주들이었다. 공주의 등장은 길쌈이 나라의 중요한 산업이었으며, 길쌈의 담당이 여성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샛골나이’는 무명 길쌈으로 중요무형문화재가 되었다.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노진만 선생님께서 베를 짜고 있다.

     

    친경례와 친잠례

     

    먹을 것과 관계된 농업과 입을 것과 관계된 양잠은 고대사회로부터 중요한 산업이었고, 조선 사회에 이르면 왕은 친히 농사를 짓는 친경례를, 왕비는 친히 양잠을 하는 친잠례를 하였다. 이 의례에서 농업은 남자의 대표적 노동이었고, 길쌈은 여성의 대표적 노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여 길쌈은 여성의 부덕으로 삼았다. 지금은 길쌈이라고 하면 흔히 베틀에 앉아 천을 짜는 일만을 떠올리는데 여인들이 베틀에 얹을 실을 얻기까지는 지난한 과정의 노동을 해야만 했다. 실을 만들려면 의료작물을 가꾸고, 걷어들인 의료작물을 째고, 말리고, 열에 찌고, 베날기, 베매기 들의 과정을 거쳐 가장 마지막에 베틀에 앉게 된다. 지루하면서도 집중력 높은 노동의 시간을 견뎌야만 한 필의 천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은 신성시되기도 하여 ‘연오랑세오녀’ 같은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였고, 어느 설화에서는 베를 잘 짜는 여인이 왕비가 되기도 하였다. 여성의 노동은 남성의 노동에 견주어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현실에서 본다면, 길쌈은 그 가치가 조금은 달랐는데 그만큼 나라경제의 중요한 축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또한 인류의 의류문화를 발전시키고, 책임졌던 것은 여성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선잠단에 가다

     

    화학의료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의료작물을 기르고, 누에를 길러 실을 얻었다. 삼을 길러서 베옷을, 목화를 길러서 면옷을, 모시풀을 길러서 모시옷을 지어 입었고, 비단은 누에에서 얻었다. 양잠은 다른 의료작물과 달리 따로 땅을 소유하지 않아도 뽕잎만 채취할 수 있으면 3월부터 5월까지 약 40일 정도의 시간을 투자하여 단기간에 수확할 수 있는 일이었다. 또 누에가 5령으로 자라면 뽕잎을 자르지 않고 그냥 주어도 될 만큼 크게 되는데 이때에는 엄청난 양의 뽕잎을 먹는다. 나뭇가지 채로 뽕잎을 따야 하는 정도인데 이때 남자들이 뽕잎을 따주는 일을 한다. 이때를 빼고는 거의 여성들의 노동으로만 수확을 할 수 있어 국가가 나서서 양잠업을 장려하게 된다. 그래서 왕은 농사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친히 농사를 짓는 ‘친경례’를 하였다면 왕비는 양잠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친히 양잠을 하는 ‘친잠례’를 궁궐에서 하였다.

     

                                          ▲선잠단지. 일제강점기에 개인 소유로 되어 있다가 1958년 서울시 소유가 되었다.
     

    서울시 성북구에 가면 ‘선잠단지’라는 유적지가 있다. ‘선잠’은 누에를 길러 비단실을 얻는 일을 최초로 한 ‘서릉씨’를 이르는 말이고, 선잠단지는 조선시대 나라에서 서릉씨에게 제사를 모시던 곳이다.

    서릉씨는 중국 고대 전설의 시대인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한 명인 황제 헌원씨의 부인이다. 서릉씨는 어느 날, 차를 마시다가 실수로 누에고치를 뜨거운 찻잔에 빠트렸다. 그런데 고치에서 가느다란 실이 계속 풀어져 나와 그때부터 서릉씨는 양잠을 시작하였고 이에 백성들도 뒤따랐다고 한다. 이로부터 누조는 잠신, 선잠으로 불렸다. 잠신(蠶神)은 누에의 신, 선잠(先蠶)은 먼저 양잠을 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나라에서는 농사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는 ‘선농단’에서 제사를 모시고, 입을 것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는 ‘선잠단’에서 제사를 모셨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에서 제사를 모신 국가제례가 20여 가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여신만을 모신 제례는 선잠제가 유일하였다. 선잠단은 비단을 얻게 해준 서릉씨에게 제사를 지내는 단이지만, 비단뿐만 아니라 길쌈 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양잠을 장려하고, 양잠기술을 보급하기 위하여 국영잠실이라 할 수 있는 도회잠실을 설치하였다. 도회잠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궁궐 안에 두었던 궐내잠실, 한양 인근에 두었던 경중잠실, 각 도에 두었던 도회잠실이 그것이다. 이들 국영잠실에는 양잠기술자라 할 수 있는 ‘잠모’가 배치되었다. 


                           ▲서잠실이 있던 연희궁터. 현재 연세대학교 자리이다.

                                                               ▲동잠실이 있던 낙천정. 현재 광진구 자양동에 있다.
     
                                                           ▲신잠실이 있던 잠실리뽕나무. 현재 서초구 잠원동에 있다.

     

    양잠기술자, 잠모(蠶母)

     

    한양과 각 도에서 잠실이 운영되자 양잠 기술을 가진 여성들이 필요해지게 되었다. 조선 시대 여성은 사회활동을 하지 못하였는데 잠모는 궁녀, 의녀와 함께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했던 여성들이었다. 잠모는 관청의 노비들 가운데 양잠 기술이 있는 사람으로 뽑았는데 각 잠실마다 약 10명 정도의 잠모가 배치되었다. 이들 잠모는 관노비이기 때문에 양잠이 끝나면 다시 자기가 소속된 관청으로 돌아가야 했다.

    좋은 실을 내는 것은 잠모에 달렸기에 잠모를 뽑는 일은 매우 신중했던 모양이다. 성종 19년(1488) 11월에는 잠모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비리가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열여덟 살의 예빈시 여종 부합이 잠모로 뽑혔는데 나이가 어려서 양잠하기에 합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영의정 윤필상이 수릉관에서 근무할 때 음식물과 물품의 진상을 맡아보던 반감 내은석과 3년을 같이 있었는데 항상 윤필상 집에 찾아와 인사를 하곤 하였다. 하루는 “딸자식 부합을 잠모로 정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자 윤필상은 인정으로서 부득이하여 형조판서에게 편지로 청하였다고 한다. 윤필상의 말로는 내은석은 지금 문소전 반감이어서 가난이 막심한데 어찌 뇌물을 받았겠냐고 항변했다. 다만 부합이 잠모에 합당한지 살피지 않고 청한 죄가 있다고 임금에게 고하였다. 성종은 양잠은 반드시 잠모로서 능한 자를 기다려 양잠하게 하였는데, 윤필상은 인정으로 청하였으니 죄가 없고 그 아비 내은석은 딸이 잠모가 되면 누에고치를 훔쳐서 이익을 취할 수 있다고 여겼을 거라며 내은석을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이 사건을 보면, 잠모를 뽑는 일이 엄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이가 어려서 잠모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은 누에를 길러 실을 뽑는 일이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기술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잠모는 궁녀나 의녀처럼 체계적인 교육을 한 것이 아니고, 숙련된 기술자를 선발한 것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잠모의 기술에 따라 실의 질이 좌우되게 된다. 그래서 잠실에 좋은 성과가 있으면 잠모는 따로 상을 받은 듯, <성종실록>에 잠모에게 면포 1필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또 누에를 잘 치지 못해서 명주실을 얻은 것이 가장 적게 되면 잠모는 죄를 받기도 하였다. 열여덟의 나이로는 아무래도 잠모의 자격을 갖추기에는 세월의 두께가 너무 얇았던 것이다. 성종은 딸이 잠모가 되도록 청탁을 한 내은석은 딸이 잠모가 되면 누에고치를 훔쳐 이익을 취할 것을 고려하였다고 보았는데, 당시에 이런 일들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나라에서 국영잠실을 운영한 것은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한 거였다. 물론 국영잠실에서 걷어들인 비단실은 왕실에서 쓰였지만, 백성들에게 양잠의 모범을 보이고, 기술을 전파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래서 각 가정마다 양잠을 하도록 하였고, 양잠을 여성의 부덕으로 삼기까지 하였다. 양잠기술을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역할에 잠모도 한 몫을 하였다.

     

                                                 ▲<친잠례> 청원에 있는 잠사박물관에는 친잠례를 재연한 그림이 있다.
     

    하여간 이 사건으로 조선 시대 잠모가 인기 높은 직종이었던 것을 짐작할 수는 있고, 가난한 집에서 어린 딸을 궁녀로 들여보내듯 잠모로 들여보내려고 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궁궐에서 왕비가 ‘친잠례’를 할 때 옆에서 그 의례를 도운 여성들도 잠모였다. 하지만 친잠례가 정례화되었던 것은 아니어서 일관성 있는 계승을 이루지는 못했다. 또 16세기 이후 국영잠실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아 잠모가 사라지게 되면서, 우리 역사에서 그 존재가 잊히기도 했다. 하지만 양잠 기술자인 잠모는 조선시대 공적인 일을 수행한 여성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중세국가의 기간산업인 농업과 양잠업에서 양잠업을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도 말이다.

     

    근대화 과정에서도 계속된 여성들의 길쌈

     

    여성들의 길쌈은 그 영역이 넓다. 의료작물을 재배하거나 양잠을 하고, 베틀에 앉아 천을 짜고 나면, 염색도 하고, 바느질을 하여 옷을 만들고, 빨래도 해야 했다. 전통시대 여성들은, 바느질을 하거나 빨래를 해 주면서 가정의 경제를 도맡은 여성도 있었다. 면포가 화폐 대용으로 쓰이고, 공물이 되면서 여성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또 길쌈을 하여야만 했다.

    여성들의 고단한 노동은 근대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18년을 앞뒤로 하여 제사(製絲)가 기계공업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는데 직공의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공장으로 가지 않더라도 가정 안에서 이루어진 양잠은 가정 경제에 한 몫을 하였다. 1970년대 이후로 화학섬유가 등장하고 수공업적인 길쌈과 양잠이 점차 사라지면서 여성은 피복노동자로 활동을 이어나갔다.

     

    유교사회에서 국가 차원으로 여신에게 제사를 지낸 것은 극히 고무적인 일이다. 선잠단에 모셔진 서릉씨의 존재는 분명 의미가 있다. 고대 사회에서 직녀는 신성시되기까지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잠모가 있어서 여성의 공적인 활동을 하였다는 의미를 갖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성들은 ‘여성의 부덕’이라는 이름으로 고된 노동을 이겨내야 했고, 누나 혹은 여동생이라는 이름으로 피복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길쌈의 제단에 모셔진 여신은 위정자들이 여성들에게 준 작은 선물이었을까? 위선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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