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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첨성대 미스터리와 여신
    이프 / 2013-10-08 05:22:34
  • 우리 문화재 중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경주 첨성대가 아닐까 한다. 이 우아한 조형물을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전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데다, 그 구조를 살펴봐도 용도를 가늠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학자들을 중심으로 첨성대의 실체를 밝혀보려는 노력이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지만 천문대라는 주장이 여전히 대세를 이루고 있다. 좀더 진전된 점이 있다면 여기에 점성(占星)이나 제단(祭壇)의 목적 등을 절충하는 정도였다.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첨성대가 천문 관측을 위한 구조물이었으리라는 주장은 주류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은가. 왜 선조들은 이 아름다운 조형물의 용도를 철저히 비밀 속에 묻어둬야 했을까.



    꼬리를 무는 미스터리



    첨성대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어디서도 유사한 형태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구조물이다. 외부도 호리병 모양으로 미끈하고 우아한 형상을 하고 있지만, 내부도 유별난 구조로 되어 있다. 첨성대가 자리 잡은 지역은 경주시 인왕동의 평지로, 반월성의 서북쪽이며, 신라의 상징인 계림(鷄林)과 고분군에서 가깝다. 이러한 지리적 요소는 첨성대를 해석하는 데 고려돼야 할 변수일 것이다.

     

     

                                                                                    ▲첨성대
     
    첨성대는 2단으로 된 사각형의 기단부, 원통형으로 된 27단의 몸통부, 여기에 다시 2단으로 된 사각형의 상단부로 이뤄져 있다. 총 높이는 약 9.5m에 달하며, 몸통부 맨 아랫부분의 둘레는 16m, 맨 윗부분의 둘레는 9.2m이다. 4m 정도의 높이에 사방 1m 남짓한 창이 있고, 안에는 12번째 단까지 잡석과 흙으로 채워져 있다. 19∼20번째 단과 25∼26번째 단에는 우물 정(井)자 형태의 장대석이 걸쳐져 있고, 그 끝부분은 몸통부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꼭대기는 편평한 바닥이 아니며, 마치 지난 시절 우리의 우물에서 보던 것과 같은 입 구(口)자 형태로 되어 있는데, 내부 면적은 약 1.5평에 달한다.



    ‘첨성대 미스터리’의 본질은 첨성대가 과연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형물인가 하는 것이다. 이를 구명하려면 먼저 어떤 요소들이 미스터리를 구성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 요소들 전반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해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첨성대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왜 첨성대는 신라의 선덕여왕 대에 쌓여졌는가.

    셋째, 신라시대와 관계된 문헌에 첨성대에 대한 내막이 수록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넷째, 왜 첨성대의 구조가 그런 형태로 되어 있는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선조들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남겨놓고 있지 않다. 다만 9m 남짓한 덩그런 구조물과 첨성대라는 이름, 그리고 신라 선덕여왕 때 세워졌다는 사실만 기록해 놓았을 뿐이다.



    동양 최초의 천문대?



    주지하다시피 첨성대가 천문 관측을 위해 신라시대에 지어진 시설이었으리라는 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이다.

    첨성대가 천문대라고 주장하는 가장 큰 근거는 ‘瞻星臺’라는 한자 표기이다. ‘별을 바라보는 대’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瞻에는 ‘바라본다’ 외에 ‘우러러본다’는 뜻도 있지만, 우리 선조에게는 해와 달에 비해 별에 대한 신앙은 별로 없는 편이었다.



    칠성신이라 하여 북두칠성이 민족 고유의 숭배 대상이었으나 선조들은 북두칠성을 위해 제단을 따로 만들지는 않았다. 시대에 따라 영성(靈星·농업을 관장한다는 별), 노인성(老人星·남극성이라고도 하며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별), 천사성(天駟星·말의 조상으로 알려진 별) 등이 있었고, 이 별들에게 기원하기 위한 제단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이런 단들은 첨성대와는 판이한 형태이다. 높이 1m가 채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계단이 있어 사람들이 오르내리기 편한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첨성대를 ‘별을 바라보는 대’라고 간주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러한 형태의 제단은 우리나라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다.



    또 다른 근거로는 조선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다.

    ‘신라 선덕여왕 대에 돌을 다듬어 대를 쌓았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다. 그 속이 비어 있어 사람이 오르내리며 천문을 물었다.’



    우리가 선조가 세운 최초의 천문대 또는 동양 최초의 천문대라고 알고 있는 첨성대. 그러나 실상 첨성대를 천문대라고 간주할 만한 근거는 이처럼 취약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첨성대를 천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이 요인들 중에는 기존에 지적됐던 것도 있고, 필자의 견해도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둔다.



    ‘매우 불편한 천문대’



    첫째, 첨성대가 사람들이 오르내리기에 상당히 불편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첨성대 꼭대기에 오르려면 먼저 땅 위에서 약 4m 높이에 있는 사방 1m 크기의 창까지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또한 내부에 들어가서도 19∼20번째 단과 25∼26번째 단에 있는 정자석(井字石)에 각각 걸쳐진 2개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반원형으로 난 구멍을 통해 지붕까지 올라가야 한다.



    첨성대가 단순히 천문 관측만을 위한 시설이었다면 왜 이처럼 사람이 오르내리기에 불편하게 만들었을까. 더구나 첨성대 내부 돌들은 외부처럼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지도 않다. 원래의 돌 모양 그대로 들쭉날쭉 쌓여 있어서 좁은 공간을 드나들기에 더욱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더구나 혼천의(渾天儀) 같은 천문 관측기구를 가지고 오르내리기에는 매우 불편한 구조이다. 


                ▲첨성대가 별을 관측하는 구조물이라는 설이 대세를 이루지만, 실제 별을 관측하기에는 불편한 구조로 되어 있다 

    학자들은 첨성대와 유사한 구조물로 고려시대 천문대인 첨성당(瞻星堂)과 창경궁 안에 설치된 관천대(觀天臺)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물들은 첨성대의 실체를 더욱 모호하게 하고 있다. 이 구조물들은 사람들이 오르내리기 쉽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첨성대에서 볼 수 있는 매끄러운 외양이나 우아한 미의식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고대사회에서 천문을 관측하는 일은 다방면의 소양과 천문학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고관(高官)이 맡았을 것이다(신라에는 천문박사라는 직책이 있었다). 따라서 그 연령대를 적어도 장년층 이상으로 봐야 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건축물을 왜 구태여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도록 만들었을까. 더구나 첨성대 내부에 있는 사다리들은 정자석에 걸쳐져 있어 경사가 가파르기에 오르내리는 데 상당한 위험이 따랐을 것이다.



    둘째, 첨성대 내부의 형태가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다. 첨성대 내부는 비어 있는 게 아니다. 층층이 쌓인 벽돌 형태의 돌들을 1개의 단으로 간주할 때, 12단까지는 잡석과 흙으로 채워져 있고, 19∼20단과 25∼26단에는 우물 정(井)자 형태의 장대석들이 걸쳐져 있다. 만일 첨성대가 순수하게 천문 관측만을 위한 시설물이었다면 이러한 장치들은 사다리를 걸쳐 놓거나, 조형물의 구조적 안정성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이는 마치 편한 길을 두고 일부러 어려운 길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구조물을 훨씬 쉽게 만들 수도 있는데, 일부러 어렵게 만들어놓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보조 장치까지 만든 꼴이 됐으니 말이다.



    『삼국유사』에만 한 줄 언급



    첨성대가 천문대라면 이는 기능성 구조물이지 예술품이 아니다. 따라서 천문을 관측하기에 가장 용이한 형태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천문대를 이러한 형태로 만들지 않았다.



    셋째, 첨성대에 관한 기록이 정통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첨성대가 미스터리의 대상이 된 것은 구조물의 비중에 비해 그에 관한 기록이 극히 박약하기 때문이다. 첨성대의 존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문헌은 오직 『삼국유사』뿐이다. 심지어 그 진위를 놓고 오랫동안 논란을 벌인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紀)에도 선덕여왕에 관한 얘기는 꽤 실려 있지만 첨성대는 등장하지 않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기록 문화에 있어서 우리 민족은 세계 어느 민족에 비해서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 선조들이 유독 첨성대에 대해서는 왜 이처럼 소홀했는지 그 의도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삼국시대의 공식 역사서로 알려진 『삼국사기』에 첨성대에 대한 기록이 단 한 줄도 실려 있지 않은 것은 많은 의문을 자아낸다. 『삼국사기』에는 분황사, 영묘사, 황룡사 9층탑 등 선덕여왕 대에 세워진 건축물이 모두 실려 있다. 또한 자장법사가 불법을 배우러 당나라에 갔다왔다는 비교적 사소한 일들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천문 관측이라는 국가의 중대사를 담당하는 구조물에 대한 기록은 빠져 있다. 혹자는 사관들이 실수로 누락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왜냐면 『삼국유사』에도 ‘이 임금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짤막한 구절만 실려 있을 뿐, 어느 해에 무슨 목적으로 쌓은 것인지는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궁성 안이 아니라 밖에 있었던 첨성대에 사람이 수시로 오르내리며 별을 관측했다면 이 사실은 입소문을 타고 시중에 널리 유포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설화를 수록한 『삼국유사』에 그처럼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넷째, 첨성대가 세워진 뒤로 천문 관측 기록이 늘었다는 것이 확실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연세대 교수를 지낸 나일성은 첨성대가 세워진(흔히 647년으로 보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후 신라의 천문 관측 기록이 부쩍 늘었다는 것을 중요한 근거로 제시한 바 있다. 신라가 왕조를 유지하던 992년 동안 전체 천문 관측 기록 횟수는 141회인데, 이중 91회(약 65%에 해당)가 첨성대가 세워진 이후의 288년 동안에 이뤄졌으며 이는 첨성대와 같은 천문 시설이 축조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를 중요한 근거로 삼을 수 있을까. 첨성대가 세워졌다는 647년 이후 불과 20여 년 만에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다. 그리고 이 체제는 그 후 270년 가까이 지속됐다. 따라서 신라 후반기에 천문 관측 기록이 훨씬 증가한 것은 삼국을 통일한 사실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백제와 고구려도 천문 시설에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러한 관측은 신라로 통합된 후에도 계속됐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천문은 고도의 전문 영역이고, 백제와 고구려는 지역이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추정이 사실이라면 모든 관측 기록은 신라의 기록이 됐을 것이다.

    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닌 다른 용도의 구조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1970년대부터 제기되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게 일종의 불교적 제단이었을 것이라는 설이다. 동양사학자 이용범이 처음 제기했고, 최근에 고대사학자 김기홍에 의해 좀더 변형된 형태로 전개됐다. 이 설들은 첨성대의 외형이 불교에 등장하는 수미산(須彌山)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수미산은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성산으로, 그 정상에 도리천(?利天)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용범과 김기홍의 수미산 관련 설 들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난감한 점이 없지 않다. 결정적인 것은 첨성대라는 이름과 연관 짓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이름 자체가 우리에게는 문화유산이다. 첨성대라는 이름은 신라시대부터 전해지는 것이고, 선조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그렇게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설에서는 첨성대라는 이름과 아무런 관련성을 찾아볼 수 없다.



    수미산의 33천은 수평적인 위상인데 왜 첨성대와 같은 형태로 쌓여졌는지도 지적할 만하다. 즉 도리천인 33천은 수미산 정상에 있는 제석천과 사방 4개의 봉우리에 있는 8개의 천으로 이뤄졌다는데, 첨성대의 33단은 수직 구조로 되어 있다.



    또한 이 설들 역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첨성대 내부 구조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왜 첨성대 아랫부분은 흙으로 채워져 있는지, 창은 왜 그처럼 높은 곳에 있는지, 그리고 상층부에는 왜 우물 정(井)자 형태의 장대석들이 걸쳐져 있는지에 대해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첨성대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는 앞서의 4가지 의문에 납득할 만한 답이 따라야 한다고 본다. 첨성대는 규모로 보나, 기량으로 보나 결코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다. 꼭 그렇게 세워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첨성대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먼저 우리 문화유산 중에서 첨성대와 유사한 것을 찾아보자. 비교할 만한 것이 있다면 첨성대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있는 참성단은 그동안 일부 인사들에 의해 첨성대와 유사한 구조물로 주목받아왔다. 아래쪽의 단은 둥글고, 위쪽의 단은 정사각형이기 때문이다. 물론 참성단의 아래쪽 단의 몸통이 완전한 원형은 아니고, 위쪽의 단도 서쪽 일부만 그렇다. 그러나 아래쪽을 완전한 원형으로 만들지 못한 것은 지형적 조건 때문으로 보이며, 위쪽의 단이 다른 것은 첨성대와의 시대적, 또는 기능적 상이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상당히 유사하며, 이와 같은 구조물은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두 구조물은 이름도 비슷하다. 참성단은 요즈음은 ‘塹城壇’으로 고정된 듯하지만 원래는 ‘塹星壇’과 혼용했다. 첨성대와 의미는 다르겠지만 우리말 이름은 닮아 있으며, 같이 별 성(星)자가 들어가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참성단이 주는 힌트



    이외에도 특기할 것은 석단이 요즈음의 벽돌 형태의 돌로 쌓여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첨성대를 보면서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것이 이러한 벽돌 형태의 돌이다. 그런데 참성단의 단도 자세히 보면 모두 벽돌 형태의 돌로 쌓여져 있다. 물론 그 세련도는 첨성대에 비해 떨어지지만 이는 개의할 바가 못 된다. 첨성대는 훨씬 뒤의 시대에 세워진 것이고, 왕궁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구조물은 왜 벽돌 형태의 돌로 쌓여진 것일까. 건축기법상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강화도의 참성단은 우리 민족에게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단’으로 알려져 왔다. 또한 조선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예로부터 매년 봄, 가을에 대언(代言)을 보내 하늘의 별들에 제사지냈다’라는 기록이 있다. 첨성대가 참성단을 본떠 만들어진 것이라면 참성단의 이러한 기능 역시 고려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참성단은 그동안 일부 식자들에 의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지구라트(Ziggurat)와 비슷하다는 설이 제기되어 왔다. 지구라트란 고대의 근동지역에 세워진 피라미드 형태의 계단식 신전탑을 말한다. 참성단의 (원형의) 단 위에 또 다른 단이 있는 점, 이 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점, 단이 모두 벽돌 형태의 돌로 쌓여 있는 점 등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근동지방에는 암석이나 나무가 없기 때문에 예전에는 모든 건물을 흙벽돌로 지었다.

     

     

                                                                                   ▲지구라트 


    참성단에는 언제 심어졌는지 모르는 까치 박달나무가 있는데, 누군가가 이 나무를 심은 것은 지구라트 난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우주목(宇宙木)을 나타내기 위한 것처럼 보여 흥미롭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는 원래 하늘에 있는 신과 지상을 연결하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참성단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참성단을 축조한 실질적인 이유는 신과 교통하기 위해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광대한 아시아 대륙의 양쪽 끝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우리 문명은 실제로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을까. 첨성대도 혹시 지구라트와 어떤 유사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계속>



    ***윗글은 월간지 <신동아>(2007.01.01 통권 568호)에 실린 작가 최홍 님의 글

    “첨성대는 메소포타미아 여신 섬긴 석녀(石女) 선덕여왕의 개인 제단”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앞으로 2부와 3부가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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