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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대한 어머니'여신
    이프 / 2013-06-11 03:12:16
  • 중국 요하문명의 꽃이라는 홍산문화(BC 4500-BC 3000). 요하문명은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한 한민족의 선조인 북방민족의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 요하문명의 주인공이 사용한 ‘빗살무늬 토기’는 ‘시베리아 남단-만주-한반도-일본’으로 이어지는 북방 문화 계통으로 황하문명에는 없는 것이다. 홍산문화는 특히 여신묘 발굴로 유명한데 이와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는 <한겨레> 기사(2010.2.4)의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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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층짜리 거대 피라미드는 ‘판도라 상자’


    [한민족 시원, 만주]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다 (2)

    광개토대왕릉 빼닮아…백제 적석총도 같은 형태

    ‘성소’ 여신묘에 곰 형상, 단군신화 웅녀족과 ‘끈’

     

    일본강점기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중국의 동북 3성인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발해 등의 터전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독립운동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 곳곳에는 한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만주 일대에서는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에서 펼쳐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복속하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자칫 웅대하게 펼쳐졌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증발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평화인권단체인 좋은벗들(이사장 법륜스님)은 해마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만주 역사기행’에 나서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역사특강을 개최한다.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열린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는 동북아 문명의 시원인 요하문명으로부터 시작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와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한겨레>는 법륜 스님 등 다섯 명의 특강 내용을 11차례로 나눠 영상과 함께 <인터넷한겨레>에 싣는다. 우리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다잡고 역사적 지평을 넓히는 길안내다. (편집자)


    중화문명 뿌리 찾다가 홍산문화 발견…요하가 원류 ‘정설’


    이제 홍산문화로 들어가 보자. 홍산문화는 전기, 후기로 나눠는데 후기는 초기국가단계에 진입한다. 그래서 홍산문화는 요하문명의 꽃이라고 했다. 홍산문화의 발견은 전 세계 고고학계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줬다. 지금도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중국은 홍산문화가 발견되면서 상고사와 고대사에 대한 재편 작업에 들어갔다. 중국은 ‘동북공정’에 앞서 ‘하상주단대공정’, ‘중화문명탐원공정’이라는 역사 공정도 벌였다. 그런 공정의 시발점이 홍산문화의 발견이었다.

     

    하상주단대공정은 중국의 고대국가인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존속 연대를 결정하는 것이 연구의 뼈대다. 이 세 나라가 언제 시작되어 언제 망했는지, 그 연대를 단정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을 단대(斷代·시대를 나누다)라고 한다. 그래서 하상주의 존속연대를 1년 단위까지 세밀하게 확정하는 작업을 했다. 5년 동안 동북공정처럼 수십억 돈을 쏟아부어 300명의 학자가 연구를 해 결론을 낸 것이다.

    그 다음 작업을 한 것이 (하상주) 이전의 시기를 보기 위해, 즉 중화문명의 원류를 탐색하는 중화문명탐원공정이다. 중화문명탐원공정은 2000년부터 시작해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중화문명의 근원을 탐구하는 공정이라는 의미이다. 지금까지 대충 나온 결론은 중화문명은 요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요하가 중화문명의 시발점이라는 거다. 중국학자 몇 사람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기본 입장으로 굳어지고 있다.

     

    단군신화 다시 읽어야…그 이전의 역사는 없었나?   

     
                                                                 ▲여러 파편을 토대로 복원한 여신상 모습.
           여신묘의 주실 한 가운데는 실물크기의 3배, 2배, 1배에 달하는 흙으로 만든 여신상이 출토되었다. 우실하 교수 제공 


    자, 그럼 사진을 중심으로 홍산문화를 자세히 알아보자. 홍산문화의 꽃은 ‘우하량’ 유적이다. 그곳에서 거대 적석총과 여신묘가 나왔다. 우하량 지역에서는 많은 피라미드식 적석총이 나온다. 이 시대의 묘장문화가 적석총인데, 가장 큰 것은 한변이 60m가 넘는 거대 피라미드식 적석총이다. 여신묘(무덤이 아니라 여신의 사당)에서는 홍산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쏟아졌다. 이 일대(적석총과 여신묘가 발굴된 우하량 제2지점 지역)는 홍산문화 당시 성소였을 것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터가 나왔다. 이 지역에서 반경 수십㎞ 이내에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주거지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지역을 성소로 본다.

     

    여신묘는 십자형으로 돼 있는데, 주실에서 여신상이 나왔다. 가장 큰 여신은 인간 실물의 3배가량 된다. 명상하는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다. 눈은 둥근 청옥을 정교하게 갈아 넣었다. 그런데 여신 옆에서 진흙으로 실물 크기로 빚은 곰 형상이 발견되었다. 지금은 5천 년이 지났으니까 다 부숴져서 발 부분과 채색된 아래턱만 남아 있다. 이게 발굴이 되면서 홍산문화의 주도세력이 곰을 토템으로 숭배하는 민족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단군신화의 웅녀족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지금은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이 곰 형상과 곰 토템 부족이었음을 인정한다.   


     
               ▲여신묘 터와 복원도 모습. 여신묘는 십자가 모양으로 중앙에 주실과 남실, 북실 등이 있었다. 우실하 교수 제공

     

    이제 단군신화는 다시 읽어야 한다. 단군신화라고 하면,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기원전 2333년에 우리들의 사고가 고정이 돼 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역사는 없었나? 우리의 단군신화를 보면 처음에 환인이 있었고,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신시를 세웠다고 한다. (법륜 스님 역사특강 2강 참조)내려오자마자 단군이 탄생하나? 환웅족이 외부에서 유입되어(하늘에서 내려와) 한참 살다 보니까 곰족과 호랑이족이 와서 “인간을 만들어 달라” 애원하며 공존하는 시기가 있다. 그리고 한참을 공존하다가 곰이 여인이 되고 환웅과 결혼을 해서 단군을 낳는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면 기원전 2333년 이전에도 우리 역사가 신화적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군신화라는 신화구조로 남아 있다. 그리고 고조선 지역으로 추정하는 요서에서 (신화를 뒷받침 할) 유적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다. 이것은 1980년 이전에 어떤 역사기록에도 없고 어느 누구도 몰랐던 것이다. 
     

    서양 틀로는 설명 못해…청동기 없이도 국가 형성 가능 보여줘 

     

        ▲우하량 제2지점 제단 유적지 모습. 우실하 교수 제공 
     

    여신묘에서는 다량의 옥기가 출토되었다. 오로지 옥기로만 부장품을 넣어줬다. 이런 옥기를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을까? 중국의 옥기 전문가들이 옥을 자를 때 쓴 도구를 발견했는데, 그 시대와 동일한 조건에서 실험을 해봤다. 그랬더니 실제 발굴되는 것과 비슷한 1.5cm정도 두께의 옥에 모래나 옥가루를 뿌려가면서 나무 막대기를 돌려서 구멍을 파는데 순수한 작업시간만 31시간이 걸렸다.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견되는 정교한 옥기 하나를 완성하려면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홍산문화 적석총에서는 옥기가 무더기로 발굴된다.

    이는 홍산문화 시대에 옥기를 만드는 장인집단이 따로 존재했었고, 신분이 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묘장 마다 크기가 다르고, 매장 방식이 다른 것도 신분 분화의 증거다. 중국 학자들은 홍산문화 시대에 최소한 7등급으로 신분이 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씨족단계나 부족단계에서 무슨 여신묘를 짓겠나? 또 한 변이 20~30미터짜리 3층 피라미드식 적석총이나 가장 큰 60미터짜리 7층 피라미드식 적석총을 쌓으려면 엄청나게 많은 인원을 동원해야 했을 것이다. 씨족이나 부족 단위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군중을 통솔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는 홍산문화 당시 사회구조가 씨족이나 부족단계를 넘어서서 여신이라는 단일신을 중심으로 통합된 사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까닭에 중국학계에서는 홍산문화 후기 단계를 초기 국가단계, 초기 문명단계라고 보는 것이다.

    우하량 제2지점 제단 유적지 안내문에는 ‘약 5500년 전에 이미 국가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홍산문화유적지’라고 쓰여 있다. 기존의 역사학의 시각에서 보면 국가단계에 진입한다는 가장 유력한 증거는 문자와 청동기다. 홍산문화 시대에 문자와 청동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초기 국가단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옥기가 있기 때문이다. 홍산문화의 유적이나 유물을 보면 청동기가 없어도 국가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홍산문화나 요하문명이 발견되기 전까지 옥기시대라는 말이 만들어질 수 없었다.


    세계사적으로 청동기시대가 되면 여러 가지 문화사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우선 신격이 여성신 중심에서 남성신 중심으로 바뀐다. 그런데 홍산문하는 초기 국가단계로 넘어갔는데도 신이 여성신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지니고 있는 서양 역사를 기준으로 한 편년이나 틀에 하나도 안 맞는다. 문자나 청동기가 없는데도 이미 초기 국가단계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그렇다. 홍산문화 시기를 설명하려면 ‘옥기시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500-1000년 앞서…중원에는 없어

     

     

     

     ▲홍산문화 피라미드식 거대 적석총의 먼 거리 사진(왼쪽)과 가까운 거리 사진(오른쪽). 아직 정식 발굴이 되지 않았으나 7층 피라미드 구조의 적석총이다. 밑변이 60m×60m이고 남쪽에는 60m×40m의 제사터가 있다. 우실하 교수 제공 
     

    문제의 60m짜리 피라미드식 거대 적석총은 아직도 발굴이 안 된 상태다. 처음에는 그 규모가 너무 커서 무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주변을 파봤더니 돌이 쌓여 있었다. 이것도 혹시 적석총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시굴을 하고, 그것을 기초로 평면도를 그렸다.


     

      

    ▲ 거대 적석총 입체도와 평면도. 이형구 교수 제공 
     

    7층짜리 피라미드식 적석총인데, 한 변의 길이가 60m나 된다. 그 밑에는 가로 세로가 60미터, 40미터인 평평한 돌을 깐 제단까지 나왔다. 이 거대 적석총을 발굴하면 그 안에 뭐가 나올지, 진짜 세계적인 이슈가 될 것이다. 최소한 지금까지 나온 것보다 더 많은 게 나올 수밖에 없다. 저 큰 무덤 안에 달랑 옥기 하나 나올 리는 없지 않은가?

    동북아시아 상고사와 고대사를 보는 눈을 새롭게 다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가 메소포타미아 우르지역에 나오는데, 그게 기원전 2600-2500년까지로 추정한다. 그런데 홍산문화의 이 거대 적석총은 그것보다 500-1000년가량이나 앞선다. 크기도 어마어마하다. 이집트 피라미드도 기원전 2500년까지 밖에 안 본다.

    이런 피라미드식 적석총은 중원에는 안 나온다. 중원 가까운 곳에서는 허베이성 위쪽과 내몽고자치구가 만나는 영하시에 있는 서하왕국의 서하왕릉에서 흙벽돌로 쌓은 피리미드식 묘를 발견할 수 있다. 거기는 전부 황토 고원이라 돌이 없으니까 흙으로 피라미드를 쌓았다. 그쪽 사람들의 조상 역시 홍산문화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 수도 국내성 터 일대 적석총 수천 기 널려 있어 

     

    홍산문화의 피라미드식 적석총이 우리 민족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홍산인들이 고구려, 백제를 거쳐 한반도로 적석총 문화가 이어졌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장군총이다. 장군총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이 있었던 중국 집안시에 있다.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장군총 앞에 서면 기가 죽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크다. 장군총의 한 변의 길이는 30미터, 31미터다. 그런데 평면도를 보면 홍산문화의 적석총과 구조가 똑같다. 물론 연대와 크기는 홍산문화 거대 적석총에 비교할 수 없지만. 장군총뿐만 아니라 광개토대왕릉, 북한이 발굴했다는 단군릉도 모두 7층, 9층의 피라미드식 적석총 구조다. 또 집안시의 환도산성 아래 ‘산성하 무덤군’에 아직도 수천 기의 크고 작은 피라미드 적석총이 널려 있다. 모두 홍산문화 적석총과 연결된다. 

     

                                            ▲ 중국 집안시 산성한 고분군의 피라미드식 적석총. 우실하 교수 제공 

     

    어떤 사람들은 홍산문화 적석총과 고구려 적석총이 연결된다고 하면 ‘고구려 적석총은 빨라야 기원후 3~4세기 이고, 홍산문화 적석총은 기원전 3500년인데, 어떻게 4천 년 가까운 간격을 뛰어 넘어 두 유적을 연결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집트 사람들이 기원전 2500 년에 피라미드를 짓고 지금까지 한 번도 다시 지은 적이 없다. 또한 마야, 잉카문명을 일군 사람들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었지만, 그 이후로 현재까지 이들은 한 번도 그런 거대한 피라미드를 다시 지은 적이 없다. 그렇게 4천 년 동안 한 번도 안 지었다고 현재의 이집트인들이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경우에는 고구려, 백제 시대에 과거의 피라미드를 복원까지 하지 않았는가?”

     

    홍산문화 시절엔 한국도, 중국도 없어…후손들 여러 갈래로

      

     ▲ 홍산문화의 피라미드식 적석총을 닮은 고구려 장군총(위 사진·조현 기자)과 백제의 피라미드식 적석총 조감도(왼쪽 사진)과 일본의 피라미드식 적석총(오른쪽 사진). 우실하 교수 제공 
     
     백제 적석총을 보면 고구려 장군총에 비해서 규모는 훨씬 소박하다. 그러나 형태는 홍산문화의 것과 거의똑같다. 돌을 깎거나 다듬어 네모나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석을 크기에 맞춰 축대 쌓는 식으로 가지런히 쌓았다. 일본에서도 3단으로 쌓은 피라미드 무덤이 발견된다. 당연히 백제를 통해 일본으로 넘어갔을것이다.
     

    이렇게 홍산문화에서 최초로 등장한 적석총이 고구려, 백제를 거쳐 일본까지 이어진다. 몽골 초원 지역에도 적석총이 많지만, 중원에는 없다. 서하왕릉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중화문화라고 할 수 없다. 서하는 요나라, 거란 시절에 독립왕국이 있었다. 그들도 어차피 홍산문화의 영역 안에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홍산문화 세력들이 전부 다 한반도로 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홍산문화 시절엔 중국도 없었고, 한국도 없었다. 일부 세력은 옥 귀걸이의 경우처럼 중원으로 남하하기도 하고, 다른 세력은 한반도로 내려오고, 또 한 세력은 몽골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문화유형을 보면 앞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주요한 맥이 한반도로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몽골에도 돌궐족이나 흉노족들의 무덤이 있다. 그들의 무덤도 전부 적석총이지만, 피라미드는 아니다. 그냥 돌무지무덤이다.(일부 피라미드식 적석총도 동몽골 지역에서 발견되기 시작했다. 이것을 몽골에서는 ‘돕조’라고 부른다. 몽골학자들과 연대해 연구 중이다.)

     

    하가점-하층문화 톡톡 튀어나온 석성의 ‘치’, 고구려 성과 똑같아

     

     

     

    ▲하가점-하층문화에서 치를 갖춘 석성이 발견되기 전까지 치는 고구려 산성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지인 중국 적봉시 오한치 삼좌점 석성의 치(왼쪽 사진·우실하 교수 제공)와 중국 랴오닝성 고구려 백암산성의 치. 조현 기자. 
     

    요하문명에서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문화가 하가점-하층문화다.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인 청동기 비파형 동검이 나오고, 고구려 석성의 독특한 형태인 ‘치를 갖춘 석성’의 원형이 발견된다. 치가 무엇이냐 하면 석성을 쌓을 때 일정 거리를 두고 톡톡 튀어나오게 한 부분이다.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고대 군사 전략상 치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적군이 치에 들어오면 한 방향이 아닌 삼면에서 적을 타격할 수 있어 성의 방어에 무척 용이했다. 고구려의 치를 모방해 당나라, 명나라 성에서도 치가 발견되는데, 치가 좀 더 발달한 형태가 옹성(甕城) 구조이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유적 가운데 삼좌점 석성에 아직도 치의 형태가 25개나 원형 상태 그대로 보존돼 있다. 4천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깨끗하게 남아 있다. 하가점-하층에서 치를 갖춘 석성이 나오기 전까지 치는 고구려 성에서만 발견되는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동아시아 어디에도 없는 고구려의 발명품으로 알았다. (시각차가 있을 수 있지만) 고구려와 하가점-하층문화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우실하 교수(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정리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원문바로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028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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